[단독] “여성, 관리자급부터 막혔다” ESG 열풍에도 견고한 대기업 ‘유리천장’

주요 대기업 10곳 ESG 보고서 조사·분석 결과 삼성전자 16%·현대차 8% 등 女 관리자 압도적으로 적어 ‘후보군’ 구축 안 되니 여성 임원 비율도 지지부진

2023-04-04     오종탁 기자
3월29일

‘사원-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이사-상무-전무-부사장-사장’ 대기업의 전통적인 승진 코스다. 평범한 대졸자가 대기업에 입사하면 조기 퇴사하지 않는 이상 대리까지는 무난하게 승진한다. 대리에서 관리자급인 과장으로 올라설 때부터가 본게임이다. 대리에서 과장으로의 승진율이 30%대로 확 떨어지고 과장에서 차장, 차장에서 부장으로의 승진율은 이보다 낮은 20%대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결국 함께 회사 생활을 시작한 대기업 신입사원 1000명 중 8명가량만 부장에서 이사로 임원 승진을 한다. 

성별(性別)을 여성으로 한정하면 관리자급 이후 승진의 문은 더더욱 좁아진다. 시사저널이 재계 20위권 대기업 중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보고서 또는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작성하는 10곳(그룹 또는 계열사)의 관리자급 여성 직원 비율을 조사·분석해 보니 모두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적었고, 별다른 증가 추세도 확인할 수 없었다. 

뽑을 땐 절반인데 관리자는 5분의 1도 안 돼  

재계 1위 삼성전자의 경우 2021년 기준 26만6674명에 달하는 전체 임직원 중 여성은 36.3%로 조사 대상 기업의 평균(31.4%) 수준이었다. 과장에서 부장까지의 관리자 직급으로만 한정하면 여성 비율(전체 관리자 수에서 여성 관리자 수를 나눈 비율)은 16.1%로 반 토막 난다. 관리자급으로 승진하기 전인 사원 직급에서 여성 비율이 45.3%에 이르는 점을 고려하면 문제가 명확해진다. 애초 공채 입사자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던 여성 사원이 관리자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우수수 회사를 관두는 것이다. 

조사 대상 기업 중엔 신세계의 여성 관리자 비율이 39.7%로 가장 높았다. 백화점업 특성상 원체 여성 직원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신세계의 여성 임직원 비율은 69.1%로 남성을 압도한다. 임직원 열에 일곱이 여성인 셈이다. 신세계는 관리자급을 다시 과장과, 그보다 높은 직급의 중간관리자로 구분한다. 여성은 과장 직급(276명)에서도 남성(219명)보다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중간관리자 직급에선 남성(296명)의 5분의 1(63명)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같은 유통업계인 CJ그룹과 롯데쇼핑도 여성 관리자 비율이 각각 26.7%, 19.1%로 상위권에 속했다. 여성 임직원 비율은 CJ가 28.5%, 롯데쇼핑이 67.5%였다. GS리테일의 여성 관리자 비율은 7%로 동종 업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 GS리테일 측은 “파트장과 점장, 온라인센터장 등을 제외한 수치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남초 회사’ 이미지가 있는 포스코그룹과 현대자동차의 여성 관리자 비율은 각각 23.5%, 8.3%였다. 포스코는 여성 임직원 비율이 5.8%로 최하위 수준인데도 관리자 비율은 높은 축에 속했다. 현대차의 여성 임직원 비율은 9.0%였다. 

KT는 관리자 직급을 하위관리자(대리), 중위관리자(과장, 차장), 상위관리자(부장, 임원)로 세분화해 여타 기업들과의 단순 비교는 힘들지만, 중위관리자 17.7%, 상위관리자 7.2%로 대략 평균 즈음에 위치한다고 추산할 수 있다. 이 밖에 SK(주)가 15.3%, (주)한화가 6.9%였다. 

그동안 대기업 ‘유리천장’이 조명받을 때 주로 언급된 직급은 임원이었다. 여성 임원이 워낙 적어 사회적 관심도가 높은 데다 유리천장을 뚫은 여성 임원을 스타로 띄우는 게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규칙 개정으로 2014년부터 기업들이 정기보고서에 임원의 성별도 표기해 공시하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가운데 2013년 114명에 머물렀던 국내 100대 기업(상장사 매출액 기준) 여성 임원이 지난해 상반기 400명을 넘어서며 유의미한 증가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임원 직급에서의 여성 비율(전체 임원 수에서 여성 임원 수를 나눈 비율)은 5.6%에 불과했다. 100대 기업 중 여성 임원이 아예 없는 기업도 아직 28곳이나 된다. 기업분석 전문 한국CXO연구소의 오일선 소장은 “절대적으로 낮은 여성 임원 비율에서 보듯 유리천장은 여전히 견고하다. 진짜 문제는 (간과되고 있는) 여성 관리자”라며 “대기업 여성 직원들이 우선 임원 후보군에 들어가는 관리자급으로 많이 진출해야 여성 임원 비율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을 텐데 출산과 육아 등의 문제로 퇴사하는 사람이 많아 관리자로 남는 비율이 좀처럼 높아지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여성 관리자 없으니 임원도 안 나와 

실제로 이번 시사저널 조사 대상 기업들의 최근 몇 년 새 여성 임원 비율은 지지부진했다. 삼성전자의 여성 임원 비율은 2019년 6.3%에서 2020년 6.3%, 2021년 6.5%로 제자리걸음이다. 같은 기간 신세계(12.1%, 7.1%, 11.8%)와 롯데(7.8%, 6.8%, 9.8%), 포스코(2.6%, 3.7%, 2.5%)의 여성 임원 비율은 갈팡질팡했다. 다른 기업 중에서도 이렇다 할 증가세가 나타난 곳은 없었다. 재계가 ESG 경영 열풍에 올라타 ‘여성친화’와 ‘여성 인재 양성’을 강조해온 사실이 무색할 정도다. 

관리자급에서부터 버티고 선 한국 기업들의 유리천장 문제는 이미 8년 전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주목한 바 있다. ILO는 2015년 1월 ‘기업과 경영에서의 여성: 탄력 가속’이란 보고서를 통해 한국 기업체의 관리직급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11.0%로 조사 대상 126개국 중 115위라고 발표했다. 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는 시리아,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 오만,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방글라데시, 요르단, 알제리, 파키스탄 등이었다. ILO는 한국이 경제 강국임에도 여성 관리자 비율이 낮게 나온 데 대해 “전통적인 성 역할 규범이 여성의 노동과 의사결정 참여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한국의 여성 관리자 비율은 2000년 7.8%에 비해선 개선됐으나 기업 채용과 내부 승진 제도를 보면 여성에 대한 구조적 장벽이 다수 존재하는 등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더해 올해 3월8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여성들에 대한 구조적 장벽이 기업 등 민간 영역과 함께 공공 영역에도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기업 임원과 정부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대학 총장, 초·중·고교 교장 등 고위 관리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에서 한국은 2021년 기준 OECD 36개 회원국 중 35위를 기록했다. 한국(16.3%)과 꼴찌인 일본(13.2%), 튀르키예(18.2%) 등만 20%를 밑돌았고 나머지 33개 회원국은 모두 20% 선을 넘었다. 한국의 비율 16.3%는 OECD 회원국 평균(33.7%)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성별 관리자 비율 공시하게 해야” 

현재 대기업 여성 관리자 비율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ESG 보고서나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정도뿐이다. 보고서 발간이 의무 사항이 아니기에 해당 수치를 공개하지 않는 기업이 대다수다. 일부 기업이 보고서에 공개하는 수치의 기재 방식이나 관리자 설정 범위 등이 조금씩 달라 면밀한 비교·평가를 위해선 추가로 분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기업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피할 것과 알릴 것’을 구분해 수치를 공개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ESG 보고서에서 성별 관리자 비율을 공개하지 않는 LG그룹의 경우 남녀 신규 채용 인원수, 경영진 수 등을 통해 여성친화기업임을 어필하는 모습이다. LG는 지난해 11월 그룹 공채 출신 첫 여성 CEO(사장)를 발탁한 바 있다. 이정애 LG생활건강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LG는 물론 삼성, SK, 현대차 등 4대 그룹을 통틀어 오너가 출신이 아닌 여성 전문경영인이 주요 계열사의 사장급 대표가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 사장은 2015년 그룹 공채 출신 최초의 여성 부사장이 됐고, 이번에도 1호 사장이 됐다. 이에 대해 재계의 한 관계자는 “개인과 기업 모두 박수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이런 몇몇 여성 임원의 단편적인 사례만으로는 재계 유리천장을 근본적으로 깨뜨리기 어렵다”면서 “(여성 임원의 파격 기용이란) ‘톱다운(Top down)’과 더불어 여성 관리자의 체계적인 양성 같은 ‘바텀업(Bottom up)’을 조화롭게 가져가야 개별 기업과 재계 전체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 본다”고 전했다. 

오일선 소장은 “앞으로 국가적인 화두인 인구 감소를 놓고도 여성 인력 활용 이슈가 점점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며 “중장기적으로 기업에서 여성 관리자층을 두텁게 해나가는 게 개별 기업과 경제는 물론 국가 전체 경쟁력을 높이는 방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기업 정기보고서에 추가로 성별 관리자 비율을 공시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정보 공개를 의무화하면 자연스레 기업 간 경쟁의식이 발동하고, 실제 여성 관리자와 임원 수 확대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 대기업 여성 직원 급여도 남성의 67% 수준 

대기업 직원의 성별에 따른 차이는 승진뿐 아니라 급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기업분석 전문 한국CXO연구소가 15개 업종별 매출 상위 10위권에 드는 150개 대기업의 2021년 사업보고서를 통해 남녀 평균 급여를 조사한 결과 여성 직원 급여는 남성 직원의 67%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 대상 기업의 평균 급여는 남성 직원 8710만원, 여성 직원 5880만원으로 여성 직원이 남성 직원의 67.5% 수준이었다. 전년 대비 보수 상승률도 남성 직원 9.2%, 여성 직원 8.2%로 차이가 있었다. 

15개 업종 가운데 남녀 평균 급여를 비교했을 때 여성이 남성을 앞선 곳은 없다. 그나마 제약 업종의 여성 직원 급여가 5860만원으로 남성 직원의 77.1% 수준을 기록해 격차가 가장 적었다. 반면 건설 업종은 여성 직원 평균 급여가 5130만원으로 남성 직원(9500만원)의 54.0%에 그쳤다. 

한편 범위를 노동자 전체로 넓혀도 여성의 월평균 급여가 남성의 65% 수준에 불과하다고 민주노총 부설 민주노동연구원은 지적했다. 이 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 노동자의 월평균 급여는 220만원으로 남성(339만원)의 64.9%였다. 여성 노동자 중 월 166만원 이하를 받는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29.3%로 남성(9.9%)의 3배에 달했다. 이는 여성이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연구원은 분석했다. 정경윤 민주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용과 임금 등에 있어 성별 격차를 줄이려면 하루빨리 (고용과 임금에 관한) 성별 공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OECD에 가입한 원년인 1996년부터 2021년까지 26년째 회원국 중 1위를 놓치지 않았다. OECD의 성별 임금 격차가 발표될 때마다 ‘남녀가 주로 종사하는 직무가 달라 임금 차이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반론이 뒤따랐지만, 최근 데이터를 보면 우리나라는 직무·직종·사업장이 같은 남녀 간 임금 격차도 주요국 중 최상위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