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제비뽑기’로 국민 대표 뽑자?
2004-03-23 이문재 기자
사상 초유의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정치부 기자나 시사 칼럼 필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번에는 평소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여성들까지 나섰으니, 전국민이 정치 평론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군부 독재의 좁고 긴 터널을 지나온 30~40대들이 모인 술자리는 정치학 세미나장을 방불케 합니다. 탄핵 정국이 총선과 이어져 더 그렇겠지만 ‘친구’들은 선거 제도부터 씹기 시작합니다.
한 친구가 일인일표제에 딴죽을 겁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는 나와 이민 갈 생각만하는 네가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라며 핏대를 세웁니다. 어떤 친구는 납세액과 투표권이 비례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입니다. 세금 천만원을 내는 사람은 만원 내는 사람보다 몇 표 더 찍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친구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가장 민주적인 선거는 제비뽑기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대표를 선거로 뽑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했듯이 선거를 하면 시민의 대표가 아니라 귀족, 즉 유명하거나 돈이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뽑힌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비뽑기로 시민의 대표를 정했다며 열변을 토합니다.
제비뽑기론은 사실 더글러스 러미스라는 생태론자의 주장입니다. 그는 무력감을 느끼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대의 정치와 선거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탄핵 정국이 투표율을 얼마나 끌어올릴지 모르지만, 이번 총선 이후에는 제발 민주주의에 대해 무기력증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