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남자' 본프레레 감독의 운명
  • 손정환(중앙일보 기자) ()
  • 승인 200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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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남자’ 본프레레의 운명
한국 축구 대표팀이 몰디브에 고전하다가 2-0으로 이겨 독일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을 확정한 11월17일, 남미 예선에서는 브라질이 에콰도르에 0-1로 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월드컵 5회 우승에 빛나는 브라질은 호나우두·호나우디뉴·카카·카를루스·카푸 등 정예 멤버가 총출동해 파상 공세를 펼쳤지만 에콰도르의 그물 수비에 막혀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골을 넣지 못한 것은 물론 후반 35분에는 에콰도르의 에디손 멘데스에게 결승골을 허용했다. 비록 이 날 경기가 해발 2800m 고지대인 에콰도르 키토에서 열렸다고는 하지만 브라질의 패배를 변명할 거리는 못된다. 브라질은 한·일 월드컵 예선 때도 키토에서 에콰도르에 0-1로 졌었다.

그렇다면 한국이 몰디브에 2-0으로 이긴 것과 브라질이 에콰도르에 0-1로 진 것 중 어떤 것이 더 자국민을 열 받게 한 일일까. 겉으로 보면 비교할 성질이 안되지만 한국 축구팬들이 느낀 ‘열’은 브라질에 못지 않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은 적어도 한국 축구팬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과거 대표팀 감독들이 “내용이 좋지 않아도 일단 이기지 않았나” “일본에는 졌어도 목표인 월드컵 본선 진출은 이루지 않았나”라고 항변했을 때도 국내 언론과 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도 똑같은 형편이다. “어쨌든 최종 예선에 진출하지 않았나. 지금까지 훈련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부터 전지훈련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훈련하면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은 충분히 가능하다”라고 말하지만 축구 팬들의 눈초리는 싸늘하기만 하다.

사실 독일 월드컵 2차 예선에서 나타난 본프레레 감독의 실력은 성적과 내용 모두에서 전혀 신뢰를 주지 못했다. 레바논·베트남·몰디브와 맞붙어 4승2무. 언뜻 괜찮은 것 같지만 9득점, 2실점은 매우 실망스럽다. 경기당 평균 1.5골. 한·일 월드컵 본선에서 폴란드·미국·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독일·터키와 맞붙어 기록한 평균 1.1골 보다 조금 나을 뿐이다.

작전 구사력·선수 장악력 시원치 않아

물론 정신이 해이해진 선수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다 차려준 밥상도 발로 차버리는 선수들을 데리고 무슨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나. 그러나 최종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 실력 없는 선수를 기용한 것도, 의욕 없는 선수를 기용한 것도,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도, 최선을 다할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도 모두 감독 책임이다. 상대에 따라 적절한 작전과 전술을 구사해야 하는 것도 감독이다.

11월1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몰디브 전만 놓고 보자. 총 30개의 슛을 날려 2골. 성공률이 10%도 안된다. 코너킥은 14개나 얻었지만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첫 골도 후반 20분에 터진 김두현의 중거리 슛이었다. 세트플레이나 전술에 의한 골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자, 그러면 하나씩 따져 보자. 몰디브가 철저히 수비 위주로 나오리라는 것은 ‘상식’이었다. 이미 원정 경기에서 밀집 수비를 뚫지 못해 0-0으로 비긴 한국이었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경질된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그 밀집 수비를 뚫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월드컵 4강’이라는 겉멋이 들어버린 한국 선수들은 상대 선수들이 중앙에 몰려 있는 그 상황에서도 중앙 돌파를 고집했다. 짧은 패스는 번번이 수비에 걸렸다. 한국의 공격수는 몰디브 수비수보다 평균 10cm 이상 키가 컸지만 공중전에서도 월등한 우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몰디브 골키퍼의 선방이 돋보이기는 했지만 전반전 내내 골문을 열지 못했다는 것은 ‘전략 부재’라고 보아야 한다.

상황에 맞는 작전을 지시해야 했고, 제대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는 선수는 바로 교체했어야 한다. 그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본프레레 감독의 자질은 부족하다. 상황에 맞는 다양한 작전과 적절한 선수 기용은 ‘연습량 부족’과 상관없다.

본프레레 감독이 한국 선수들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본프레레가 한국에 온 것이 지난 6월이다.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훈련 시간이 별로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선수들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본프레레가 선수들의 장단점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50~60% 정도밖에 파악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축구인도 있다. 그것은 본프레레가 ‘연구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제 최종 예선이 남아 있다. 상대는 2차 예선 상대와 다르다. 이란·쿠웨이트·바레인·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4개국과 일본·북한·우즈베키스탄이다. 12월9일 조 추첨에서 상대가 정해지겠지만, 중동 두 팀이 같은 조에 편성될 것이다. 중동 팀은 항상 상대하기 껄끄러운 팀이다. 아마 한국과 일본은 시드를 배정받을 것으로 예상되어 같은 조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나 우즈베키스탄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최종 예선은 한 곳에 모여서 리그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년 2월부터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벌어진다. 과거의 경험상 한국은 한 곳에서 리그전을 하는 것이 더 낫다. 대회를 앞두고 장기간 합숙 훈련을 하고, 한꺼번에 해치우는 것이 낫다. 국내 프로 리그를 진행하면서 수시로 소집해 찔끔찔끔 훈련하는 방식에는 익숙하지 않다. 집중력도 떨어진다. 지금까지 보여준 본프레레 감독의 스타일에도 맞지 않다.

축구협회, 소신껏 일할 여건 만들어줘야

본프레레 감독은 내년 1월 미국이나 유럽에서 가질 전지 훈련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동안 자신이 눈여겨본 새 얼굴들을 테스트하는 기회로도 삼아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많지 않다. 2월부터는 바로 최종 예선에 돌입한다.

한국 축구는 이미 코엘류 감독을 경질하고 본프레레로 말을 갈아탔다. 본프레레의 능력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축구협회의 지원도 달라져야 한다. 사실 코엘류 때도 협회의 지원은 히딩크 때와 너무 달랐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에서 반드시 8강에 올라야 한다’는 지상 과제에 따라 히딩크 감독에게는 협회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속된 말로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었다. 코치진과 트레이너, 그리고 언론담당관까지 따로 두었다.

본프레레에게 그렇게까지 해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감독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여건은 만들어주어야 한다. 본프레레는 지금 혼자다. 코치진은 모두 한국 지도자들이다. 본프레레의 지도 방침이 코치들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면 효율을 극대화할 수 없다. 기왕 외국인 감독을 모셔왔다면 그에 따르는 지원도 있어야 한다.

그러고도 신통치 않다면 과감하게 갈아야 한다. 외국인 감독이 성공하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선수를 장악해야 한다. 히딩크는 선수들을 장악했고, 선수들에게 신뢰를 얻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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