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2-그 때 그 사람들1-백범의 경우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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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오늘부터 존댓말 생략하고 반말로 지껄입니다. 널리 이해해주십시오.

1905년 저 치욕적인 을사늑약(보통 '을사보호조약'으로 표기되지만 이 표현이 더 정확하다)이 일본에 의해 강제 체결되던 해 백범 김구는 30세였다. <백범일지 designtimesp=630>에 따르면, 당시 진남포 에버트청년회에서 총무로 있던 백범은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울로 올라와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민영환이 자결하던 이해 11월30일, 그는 동지들과 서울 종로 바닥에서 군중을 모아놓고 공개 연설을 하다가 일본 순사들과 부딪쳐 한바탕 치열한 가두 시위를 벌였다. '왜놈'들이 총을 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자, 불 탄 집에 나뒹굴던 기와 조각을 던지며 이에 항거했던 것이다. 백범이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들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백범은 이 날 우국 지사 한 분의 자결과 또 한분의 자결 미수를 목격했 다. 자결한 분은 민영환이었고,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친 분은 당시 참찬 벼슬을 살던 이상설이었다. 백범은 이상설의 자살 미수 소식을 몇몇 동지들과 민영환에 대한 조문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알게 됐다. '나이가 사십 안팎즘 되어 보이는(당시 이상설의 나이는 36세였다) 어떤 한 사람이, 흰 명주저고리에 갓 망건도 없이 맨상투 바람으로 의복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면서 크게 소리치며 울부짓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를 물으니 이상설이더라는 것이다.
백범은 당시 서울에 올라와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상소 운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전덕기 이 준 이 석(이동령) 최재학 계명륙 김인집 등 20여 명이 참여해 불법적인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짓고, 한번에 다섯 사람씩이 공동 상소문에 서명하여 '상감'에게 올리기를 계속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바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소 운동은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옛 고사를 상기하며 곧 중단되고 만다.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 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판단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애국 운동에 매진하기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백범은 실제로 1911년 음력 정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세번째 투옥됨으로써 중단될 때까지. 약 6년간을 황해도 안악 배천 재령 등지를 오가며 학생을 모아 가르치고, 각종 사설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등 교육 운동에 투신했다(백범의 1907년 안중근 의사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직후,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일시 투옥됐다가 풀려난 바 있다. 당시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정식 재판에까지 회부됐으나 혐의가 없는 것이 밝혀져 불기소로 풀려났다).
백범에게 1905년은 언제 끝을 볼지 모를 기나긴 독립 투쟁을 위한 '준비'의 시기였다. 그는 이 때 이미 독립은 혈기와 의분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실제 1905년에는 허 위 이강년 최익현 선돌석 연기우 홍범도 강기동 민긍호 유인석 이진롱 우동선 등에 의해 제2차 의병 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백범이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정했다. 백범은 사후 평가이기는 하지만 백범일지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군사 지식이 없고, 다만 충천하는 의분심만 가지고 일어났으니, 여러 곳에서 실패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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