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은 내가 죽였다”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5.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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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간 베일에 싸여 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 <시사저널>은 김씨를 살해했다고 스스로 밝힌 특수 공작원 출신 암살조장을 만났다

 

“우리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1979년 10월7일 밤 파리 시내의 한 카지노 근처 레스토랑에서 납치했다. 김형욱이 한국 여배우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레스토랑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그 여배우가 보낸 안내자 행세를 하며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캐딜락 승용차 안에서 김형욱을 마취시킨 다음 밤 11시께 파리시 서북 방향 외곽 4km 떨어진 외딴 양계장으로 가서 분쇄기에 그를 집어넣어 닭모이로 처리했다.”

<시사저널>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 부장이 파리에서 실종된 지 25년 만에 김형욱 부장을 위와 같이 처치했다고 털어놓은 현장 암살 실행조를 찾아냈다. 그의 정체는 중앙정보부가 양성한 특수 비선 공작원 이○○씨. 그는 당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파견되어 특수 암살 훈련을 받은 곽○○씨와 한 조가 되어 김형욱을 암살했다고 말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미국 망명에서부터 암살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암살 대목이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였으며 그의 유해는 어디로 갔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이 때문에 지난 25년간 김형욱 실종 사건을 놓고 수많은 추리와 소문이 난무했다. 그러나 이번 <시사저널>의 취재는 구체적으로 ‘자기들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암살자를 만나 그들의 증언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풍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이씨와 곽씨가 김형욱 암살 실행조였다고 스스로 밝히기까지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씨가 김형욱 사망 사실에 대해 처음 입을 연 때는 지난해 10월 하순이었다. 이씨는 기자에게 “김형욱은 파리 근교 양계장에서 닭모이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줄곧 “무덤에 갈 때까지 비밀로 해야 할 문제”라며 더 말하기를 꺼렸다. 진실을 말해달라고 설득하기를 6개월여. 거듭된 설득 끝에 “내가 잘 아는 후배가 이렇게 살해했다더라”하는 식의 제3자 화법으로 사건 전모를 털어놓았다.

"암살 직전 박 전 대통령 만났다"

그러나 그의 증언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결코 알기 어려운 침투 루트며 지형지물, 살해 방법 등을 자세히 담고 있었다. 또 그의 증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이 있었다. 결국 기자와 만난 지 6개월 만에 자신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자기가 핵심적으로 암살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물론 현장 사진이라든지 다른 뚜렷한 물증이 확보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씨의 주장이 김형욱 실종 현장의 진실을 100% 담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난 6개월간 그를 만나면서, 그가 거짓말을 하거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없는 말을 지어낸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못했다. 또 당시 해외 파트에 근무했던 일부 중앙정보부(중정) 요원들에게 그가 말하는 침투 루트를 들려주고 신빙성 여부를 확인한 결과 “특수 활동을 했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자세한 사실을 알기는 어렵다”라는 답변을 얻었다.

그밖에도 <시사저널>은 지난 6개월 동안 그를 설득해 어렵게 얻어낸 진술들의 진위 여부를 다각적으로 확인해 보았다. 암살했다고 자처한 사람이 나타났지만 최소한 추가 목격자를 확보하는 일이 필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입에서 나온 현장 유인조 여배우 최지희씨를 수소문했다. 이 여배우는 그동안 김형욱 실종과 관련해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녀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기자는 한·미·일 3국을 수소문한 끝에 가까스로 한 가지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김형욱 전 부장은 1979년 10월 초 파리에서 실종되기에 앞서 미국에서 이 여배우로부터 받은 편지를 갖고 있었다. 당시 김씨는 자신의 회고록을 구술받아 집필하던 김경재 전 의원(필명 박사월)에게 함께 그 여배우가 보낸 연애 편지를 보여주었던 것. 편지에는 ‘해외 여행이나 하며 함께 보내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경재 전 의원은 지금까지 김형욱씨가 최지희씨와 만나 즐기기 위해 보디가드 없이 파리로 갔다가 실종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김 전의원은 그동안 그 여배우를 보호하기 위해 편지를 보낸 연예인이 가수 ㅊ씨라고 밝혀왔다(상자 기사 참조).

지난 4월8일 낮 기자는 서울시청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씨가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목격했다는 여배우 최씨를 만났다. 그녀는 “김형욱씨를 만나러 파리로 간 여배우는 내가 아니라 다른 여배우였다”라고 말했다.  이 여배우는 비공개를 전제로 당시 자기와 또 다른 여배우 ○○○씨, 김형욱 정보부장, 박동선씨, 박종규 경호실장, 박정희 대통령 사이에 얽힌 비화를 털어놓았다.

 “김형욱 정보부장 시절에 내가 그 여배우를 박정희 대통령과 엮어주었는데 김형욱 정보부장이 가로챘다. 나중에 김형욱씨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그녀가 곤란해졌다. 돈 문제도 남아 있었다. 내가 왜 그 사정을 잘 아느냐 하면, 본인이 나에게 고통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내가 김형욱씨를 아주 나쁘게 생각했는데, 그 여배우가 그 무렵 파리를 자주 오갔다. 그 친구로서는 김형욱이 도와줘서 어느 정도 살게 된 거고, 그래서 김형욱씨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사이였다. 지금도 그 은혜로 빌딩도 갖고 있다.”.

파리에서 김형욱 씨가 실종되던 현장에 미모의 한국 여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처럼 여러 갈래를 통해 확인된다.

<시사저널>은 지난 6개월 동안 기자가 김형욱 암살 실행팀장 이○○씨와 가진 인터뷰를 그대로 옮긴다.

파리에서 김형욱을 처음 어떻게 만났는가?
우리는 암살 실행조였고, 유인조는 따로 있었다. 한국 여배우가 현장에 있었다. 김형욱이 미국에서 단신으로 파리로 온 것은 그 여배우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여배우도 자기가 김형욱 암살 목적에 동원된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전혀 몰랐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알고 있었다면 유인 공작이 들통 나기 마련인데 누가 그걸 알려주겠는가. 그 여배우는 자연스런 만남으로 알고 갔다가 나중에 김형욱 실종 사건에 자기가 이용당한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경영하던 술집도 선배 여배우에게 넘겼다고 들었다.

김형욱은 어떤 자세였는가?
1979년 10월7일 밤 우리 두 사람은 파리 시내 한 카지노에 딸린 레스토랑으로 갔다. 안내원은 그곳이 김형욱과 여배우가 만나기로 한 장소라고 했다. 우리는 여자 일행이 탄 차가 대기하는 순간 모셔다 드리겠다며 기다리라고 한 뒤 카지노에서 나와 막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려는 김형욱 앞에 서서 ‘밖에 여자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안내했다. 김형욱은 약간 술이 올라 있었다. 여배우가 타고 있던 캐딜락 문을 열자마자 ‘저희가 모시겠습니다’하면서 팔을 잡고 부축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동시에 즉시 코에 마취제를 스쳤다. 타고 있던 여배우 일행에게는 ‘많이 취하셨으니 오늘은 저희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차에서 내리도록 했다.

여배우 일행이 보는데 그게 가능한가?
첫 만남이기 때문에 김형욱은 우리를 여배우의 보디가드로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당시 한국 정계에 대단한 파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보디가드를 붙였다고 해도 김형욱은 의심하지 않았다. 여배우는 거꾸로 우리가 김형욱 보디가드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축하고 앉히고 하는 과정에 특수 기술을 썼다. 그런 기술을 쓰면 사람은 어리어리한 상태로 잠시 말을 못하고 술취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김형욱을 앉히자 마자 여자 손님에게 ‘오늘은 너무 취하셨으니 저희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여배우는 납치를 눈치채지 못했는가?
아마 납치된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암살하기 위해 데려가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김형욱씨를 납치해 어디로 갔나?
안내원이 운전을 하고, 나와 후배는 뒷좌석에서 의식을 반쯤 잃은 김형욱의 양옆에 앉아 미리 답사해둔 파리시 북서쪽 외곽의 한 양계장으로 차를 몰았다. 시내에서 4~5km정도 떨어져 있는 한적한 농가 양계장이었다.

왜 암살 장소로 양계장을 택했나?
프랑스 정보기관은 세계 제2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소수 정예 조직이다. 그런 기관에 발각되지 않고 완전 무결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암살이야 어떤 방법으로든 할 수 있지만 흔적을 남기면 국가가 곤란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경찰과 정보 당국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방법을 찾다가 양계장 분쇄기를 택했다.

양계장에서 어떻게 처리했나?
낮에 양계장을 답사해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 양계장은 노인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고 근처에 인가가 드물었다. 대신 사나운 개들이 있었다. 낮에 이곳을 찾아 개들이 우리를 알아보게 하는 조처를 취했다. 우리가 받은 훈련 중에는 개에게 짖지 않도록 조처하는 기술이 있었으므로 그건 어렵지 않다. 양계장 문을 열고 들어가 사료분쇄기 작동 버튼을 눌렀다. 사료분쇄기는 대형 믹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분쇄기 입구는 계단 3개 정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양계장 암살 아이디어는 누가 냈는가?
이런 말 하기 참 싫지만 내가 고안해 낸 아이디어였다. 그러니까 아직도 소문이 안난 거다. 누가 그런 방법을 쓰라고 시켰다면 중간에 누군가 배신하게되어 소문이 난다.

김형욱씨는 당시 어떤 상태였나?
가벼운 수준의 마취를 했기 때문에 양계장에 도착할 때까지 어리어리한 상태였다. 급소를 잡고 들쳐멘 채 분쇄기 계단 위로 올라갔다. 살은 좀 쪘지만 키가 그리 크지 않아서 무겁지는 않았다. 머리부터  분쇄기에 집어넣었다. 잠깐 동안 흔적도 없이 분쇄되어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닭에게 공급되었다.

당시 김형욱씨와 눈을 마주치거나 이야기를 나눈사실이 있는가?
우리는 교수대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의 심정으로 그를 분쇄기에 처리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는 사라져 줘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다른 감상이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유명을 달리하는 자에게 가장 고통이 적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우리 세계의 철칙에 따라 머리부터 집어넣어 부순 것이다. 그는 마취된 상태여서 말을 안했다.

김형욱씨가 카지노에서 나왔다면 달러가 든 소지품 등이 있었을 텐데...
강도를 목적으로 그를 제거한 것은 아니지만 돈이 많이 나왔다. 그 돈은 이후 우리가 여러 나라를 거쳐 탈출하는 과정에서 여비로 사용했다.

한순간에 그렇게 납치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김형욱 제거는 우리 팀이 이미 1년 전부터 준비했다. 1978년 11월부터 일본을 경유해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본부를 둔 비밀 정보기관 모사드에 파견되어 특수 훈련을 받았다. 암살 현장 답사와 실행 지휘는 내가 담당했다. 프랑스는 김형욱이 자주 오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보기관의 눈에 들키지 않고 완전무결하게 처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래서 준비 작업을 많이 했다.

어떤 준비를 했나?
침투부터 임무 완수 후 탈출까지 항공로를 택하지 않고 해상 루트와 육상 루트를 번갈아 이용했다. 항공은 여러 가지 흔적이 남지만, 해상 루트는 화물선 등에 타면 흔적 없이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로 들어간 경로는?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 항구에서 화물선을 타고 벨기에의 항구 도시인 안트베르펜(앤트워프)로 들어갔다. 불어로는 앙베르라고 불리던 항구 도시였다. 벨기에 역시 불어권 국가여서 프랑스로 오가는 육로는 한 나라나 다름없었다. 벨기에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파리로 들어갔다

침투 코스를 자세히 설명해 달라.
앙베르라는 곳이 벨기에서 큰 항구 도시이지만 이 나라는 북해를 낀 해안선이 70km를 넘지 않는다. 김형욱 제거 작전은 성동격서라고, 서쪽에서 치고 동쪽으로 빠지자는 것이었다. 우리 일이 발각된다면 프랑스 수사 당국은 당연히 스페인 반도를 통해 피레네 산맥 넘어 침투해 들어왔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부터 특공대가 투입됐던 그쪽 비밀 루트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보기관은 정보력이 세계 2위를 자랑한다. 그래서 모든 의심받을 상황이나 코스를 뒤집어서 허를 찌르는 침투가 필요했고, 성동격서 전법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북해 도버 해협까지 거치는 기나긴 침투 코스를 택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우리는 우리 목표를 향해서만 가면 되었다.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무사히 목표물까지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의 신원을 알 필요는 없었다.

이스라엘 하이파 항구에서 출발해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기까지 체류 일정은?
9월24일께 하이파 항에서 안내원이 마련해준 화물선을 탔다. 안내원이 매수해둔 사무장 방에 숨어 열흘 가량 항해한 끝에 10월4일께 벨기에 안트베르펜 항구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를 타고 프랑스 국경 넘어 파리로 들어갔다. 10월5일 파리에 도착해 안내원과 양계장을 답사했다. 김형욱을 납치해 암살하기까지 파리에서 만 이틀간 머물렀다. 이런 일은 속전속결이 원칙이다.

김형욱씨를 분쇄기에 넣은 뒤 행로는?
다른 안내 차량을 타고 남부 국경으로 달려 피레네 산맥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스페인 남부 영국령인 지브롤터 항구까지 찻길로 거의 1주일 가까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초 계획대로 침투할 때 탔던 화물선이 안트베르펜 항에서 하이파로 돌아오는 길에 지브롤터 항구를 경유하는데, 그곳에서 귀환하는 화물선을 타고 처음 출발한 이스라엘 북부 항구 하이파로 들어갔다. 이스라엘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며칠 쉰 뒤 귀국했다.

임무 완수 보고는 어떻게 했나?
하이파에 돌아와 처음 보낸 안내원에게 성공했다고 알렸다.

공작에 실패할 경우 대비책도 있었을텐데...
프랑스 정보기관에 발각되면 국가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대한민국과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어야 했다. 일이 잘못돼 붙잡힐 경우 현장에서 자결할 생각이었다. 또 발각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는 안내원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둘만 동양인 등산객으로 위장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쪽으로 도보 탈출하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갈 때 공작 자금은 어떻게 받았나?
현지 안내원들이 다 있었으니까 특별한 돈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로 돌아오니 자금을 좀 줬다.

암살 과정에 수칙이 있었는가?
암살을 실행하는 사람은 국가와 민족, 보낸 기관에 대해서는 오명을 씌우지 않는다. 오물을 쓰게 될 상황이 되면 자기 한 사람이 뒤집어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을 시켜서는 안된다.

일각에서는 김형욱이 서울로 납치되어 와 차지철에게 살해됐다고 주장하는데...
프랑스 정보기관과 경찰을 우습게 아는 상상일 뿐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해상과 육상 침투를 했고,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공으로 하면 어떤 식으로든 다 체크가 되기 마련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윤일균 차장에게 직접 전화해서 김형욱 회고록 저지 공작을 지시한 것을 보면, 제거 공작도 결국은 박대통령이 지시한 것 아닌가?
그런 거는 묻지 말라. 박대통령이 ‘그놈 못쓰겠더라’고 하면 밑에 사람은 당연히 ‘각하 안심하십시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습니다’ 하는 것이 원칙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금도 김형욱 사건은 중정에 기록이 없다.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가 지시하고 의논하고 보고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부 자료는 남아있다고 들었다. 김형욱과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 이상열 공사의 통화 기록은 남아있다던데...
그런 기록이야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이공사라는 그 분도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 같은 사람은 오명을 써도 자기 개인이 써야 된다. 그 사람들이 관련되었다면 대한민국과 관련되는 거니까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잠시 안내는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몰랐을 것이다.

기자와 프랑스에 가서 옛 양계장 자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어찌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답사까지 했으므로 파리 서북쪽 외곽으로 가면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당시 영감 한명과 개 몇 마리가 있었던 양계장이었다. 내가 연구한 방법 중에 양계장 분쇄기 처리가 가장 안전했다.

중정 소속 특수요원이었으므로 김재규 부장이 파견한 것 아닌가?
아니다. 나를 담당하던 중정 윗선에서도 내가 파리에 침투하는 것을 몰랐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박종규 아니면 차지철 비선을 의심하던데, 그쪽 소속 아니었는가?
누구의 비선도 아니었다.

그러면 그때 박대통령이 불러 무슨 말을 하지 않았나?
그랬다기보다 그냥 ‘나쁜 놈이로구나’라고 한말씀은 하셨다. 그 밑에서 꾸미는 일은 우리 스스로 했다.

파리로 가기 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박대통령을 만났는가?
1979년 초 밤에 불려갔는데 청와대 별관으로 알고 있다. 경호하는 분들이 옆에 있었지만 나는 대통령 말씀을 듣느라 긴장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술을 따라 주셨다. 그것뿐이었다.

박대통령이 술잔을 따르며 김형욱을 제거하라고 하던가?
절대 그런 말씀 없었다. 그냥 나쁜 놈이로구나 이렇게 말씀했을 뿐...   ‘나쁜 놈이로구나, 내가 믿었던 김형욱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 하며 통탄을 하시는데……(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더 말이 필요한가? 박대통령이 나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비밀인데… 옛날부터 국가 원수가 비선 간첩 내놓고 만나고 총애해 주는 일 봤는가. 절대 그런 것은 드러내면 안된다.

조국을 짝사랑했다고 주장하는데, 이제 나라에서 책임 있는 대답을 해줘야 할것 같다
조국은 내게 영원한 짝사랑 대상이다. 정보총책임자인 김형욱이 함부로 떠드는 것을 막아야 했다. 국가의 정보 총책임자가 함부로 정보를 누출하고 그 정보를 돈을 주고 팔겠다고 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 인간은 제거해야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국가를 짝사랑은 하지만 믿지는 않는다. 내가 스페인 반도를 통해 파리로 들어가지 않고 그 먼 길을 돌아간 것도 조국을 보호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지난 6개월 동안 당신을 만나면서 거짓말이 아닌지 의심한 것을 사과드린다. 누가 시킨 것보다 스스로 신념화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절차가 있었다는 주장을 이해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직후 서거만 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공로를 인정하고 챙겨줬을 텐데...
아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다. 국가가 그런 걸 해준다면 대한민국은 국가가 아니다. 모든 일은 국가를 위해 내가 다 책임지고 갈 것이다.

김형욱씨를 제거한 데 대한 지금 심정은 어떤가?
그 일은 대의 명분을 세워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교도관이 사형수를 처형해도 기분이 불쾌한 일인데, 인간을 그렇게 처리한 내 기분이 좋았겠는가. 언젠가 내가 조사받으며 진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파리로 떠날 때 나는 후배에게 우리의 행위가 종교적으로 돌아보아 떳떳한가, 김형욱의 가족 앞에 떳떳한가를 생각하고 나서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지금 김형욱씨 가족이 살아있는데 왜 기자는 나에게 이런 말까지 모두 하게 만드는가?

이 모든 사실을 다 국정원의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에 나가 밝힐 의향은 없는가?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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