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사태’ 후폭풍에 고려대 ‘들썩’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5.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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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비운동권 시각차 크게 벌어져…사건 자체는 의도된 폭력 아닌 해프닝 성격 강해

 
지난 5월5일 오전 9시 고려대학교 민주광장.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른바 ‘총학(총학생회) 없는 평화 고대’를 기치로 내건 학생들이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운동권’ 학생들을 성토했다.  지난 5월2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명예박사 수여식을 막아 나선 총학생회와 ‘다함께’ 소속 학생들이 학교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학생들은 성토로 그치지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 행동에 나섰다. 고려대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 이 날 ‘다함께’ 소속 학생들이 또다시 피켓 시위를 벌이려 하자, 이들이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이건희 사태’의 후폭풍이 고려대에서 거세다. 이건희 회장이 ‘부덕의 소치’라며 수습에 나섰지만, 노노 갈등과 유사한 학생들간 논쟁은 가열되고 있다. 사실 이번 사태는 해프닝 성격이 강하다. 언론에 충돌 과정만 부각되면서 학생들이 작정하고 일으킨 의도된 폭력으로 비쳤지만, 전말은 그렇지 않다.

고려대에 이건희 회장에 대한 명예박사 수여 소식이 퍼진 것은 지난 4월27일께. 이때까지만 해도 총학생회는 시위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100주년 기념 삼성관’으로 명명된 기념관을 삼성이 지어, 단일 기업으로는 역대 최다액(4백80억원 상당)을 기부한 마당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두고 총학생회도 고민에 빠진 것이다.  

노동절인 지난  5월1일 일부 학생들이 총학생회에 선전전을 제안했다. ‘지켜만 볼 것이 아니라, 삼성의 노동조합 탄압 의혹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자.’ 학내 정치 단체로서 가장 진보적인 다함께’ 소속 학생들이 이같은 요구를 하자, 총학생회는 이를 받아들여 피켓 시위를 벌이기로 확정했다. 총학생회는 피켓 시위 계획을 학생처에 통보했다. 학교측도 학생들의 시위 사실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적어도 피켓 시위에 한해서는 학교측이 어느 정도 양해하고 있었다고 총학생회 관계자는 말했다.

“이회장이 카펫 밟았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

5월2일 오후 3시부터 총학생회와 다함께 소속 학생들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이 거행되는 인촌기념관 입구에 깔린 레드카펫 양쪽에 늘어섰다. 명예박사 수여의 부당성과 삼성그룹의 무노조 경영은 노동조합 탄압 경영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학생들이 짠 계획은 레드카펫 양쪽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그 사이로 이건희 회장이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회장이 탄 차가 예상과 달리 카펫이 깔린 곳이 아니라 옆쪽에 주차했다. 이회장이 학생들을 피해 옆문으로 향했다. 순간 학생들은 대열을 이탈해 이회장에게 달려갔고, 삼성 직원들과 교직원들은 “약속이 다르다”며 제지하고 나섰다. 순식간에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총학생회의 한 간부는 “우발적인 상황이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 날 시위를 주도했던 다함께 소속 한 학생도 “우리는 단지 이건희 회장에게 피켓을 잘 보이게 하려고 다가섰을 뿐이다. 막아선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들은 폭행을 당한 쪽은 오히려 학생들이라고 항변했다.
이날 상황에 대해 총학생회는 유감 성명을 냈다. 총학생회의 한 간부는 “학교에도 책임이 있다. 누가 보더라도 4백억원이 넘는 기념관을 지어 주었으니, 학위를 수여하는 것이다. 돈 주고 입학하는 기여입학제와 뭐가 다르냐”라고 말했다. 문제 제기를 한 학생들의 주장은 명료하다. 학위 대신 차라리 감사패를 주었다면 이번 사태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번 사태를 두고 당사자 격인 삼성그룹은 ‘쿨’하게 대응했지만, 학교측과 일부 언론, 게다가 청와대까지 ‘오버’했다. 학교측은 총장을 제외한 보직 교수들이 일괄 사퇴했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삼성 출신인 진대제 장관은 학생들의 반기업 정서를 비판했다. 이 역시 과잉 대응이다. 다른 대기업 회장이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도 학생들이 문제 제기를 했을까?

실제로 1995년 고려대는 정주영 명예 회장에게 이건희 회장과 똑같은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적이 있다. 지금보다 학생운동 세력이 강했던 그때였지만 학생회나 학생들은 정회장에 대한 명예 철학박사 수여를 문제 삼지 않았다. 당시 현대그룹은 지금의 삼성처럼 재계 1위였다. 1998년 정주영 회장이 소떼 몰이로 판문점을 넘었을 때, 고대 학생 일부는 정명예회장을 통일운동가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1997년),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2003년) 등이 명예박사를 받을 때도 이런 소동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이건희 회장을 학생들이 타깃으로 삼은 것은 삼성그룹의 무노조 경영과 무관하지 않다. 시위가 있었던 5월2일, 학생들은 삼성전자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다 해고된 노동자를 섭외했다. 시위에 참여한 한 학생은 “이건희 회장을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겠느냐. 학교에 온다고 하니 직접 만나 무노조 경영에 대해 따질 것은 따지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총학 퇴진 서명운동 벌일 태세

이번 사태 이후 고려대 내부에서 운동권과 비운동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다수는 총학생회를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을 비판한다. 총학생회의 한 간부는 “가뜩이나 학생회 입지가 약해지고 있는데, 완전히 왕따당하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학생들 사이에 인식 차가 큰 것은 어윤대 총장이 주도하는 글로벌 KU 프로젝트에 대한 시각차도 한 원인이다. 2003년에 취임한 어윤대 총장은 ‘막걸리 대학’으로 상징되는 고대를 확 바꾸어 놓았다. 전임 총장들과 달리 경영학과 출신인 어총장은 CEO 총장을 자처했다. 글로벌 KU 프로젝트를 세워 지난해에만 1천2백억원을 재계에서 끌어왔다. 세계 3백80개 대학과 국제 교류 협약을 맺어, 매년 8천여 명의 고려대생들이 교환 학생으로 해외로 나가고 있다. 본교 강의 25%도 영어로 진행되고 있다.

이같은 글로벌 변화를 학생들은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대학의 산업화·자본화에 따른 부작용을 운동권 학생들을 비롯한 일부 학생들은 비판한다. 이런 시각차가 이번 사태의 배경에도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5월2일 이후 시위를 두고 고려대에는 대자보 공방이 그치지 않고 있다. 고려대 총학생회 사이트를 비롯한 홈페이지에서도 리플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총학 없는 평화 고대’를 요구하는 학생들은 총학생회와 다함께 소속 학생들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사과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총학생회장 퇴진을 위한 서명운동까지 벌일 태세이다. 100주년을 맞는 고려대가 때아닌 몸살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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