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프레레 못 자르는 네가지 이유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5.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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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대표팀이 수렁에서 헤매는 ‘네 가지 이유’

 
본프레레호가 출범하기 직전인 2004년 5월 <시사저널>은 한국 축구의 위기를 분석하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동아일보 스포츠면 편집을 담당하는 이지훈 기자의 고뇌로 시작되었다. 이기자는 “대표팀이 질 경우를 대비해 제목을 준비해 놓는데 단어가 바닥 났다. 선수들의 일그러진 표정 사진을 먼저 찾고 제목을 다는 요령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여, 한국 축구의 시름은 더욱 커져 있다. 한국 축구의 시계는 2002년 월드컵 이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국 축구는 다시 교과서적인 ‘뻥 축구’를 하고 있다. 올해 대표팀은 열세 차례 A매치에서 14골을 넣었다. 동아시아대회 3경기에서 51개의 슈팅으로 1골. 이 1골도 11 대 8이라는 수적 우세에서 뽑아낸 것이었다. 올 A매치 90차례 코너킥에서는 단 한 골만을 뽑았다. 지난 11월 몰디브와의 경기에서는 코너킥을 14개나 얻었으나 한 골도 넣지 못했다. 몰디브는 평균 신장이 한국팀보다 10cm 이상 작다. 코너킥을 반납해야 할 처지다. 올 A매치 프리킥 상황에서 골을 만든 것은 단 두 차례. 문전 지역에서 프리킥 찬스를 잡으면 한숨부터 나온다.

한국 대표팀의 가장 취약한 포지션이 감독 자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한국 축구는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장수의 목을 잘라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장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은 분명한데 마땅한 대안이 없어 그대로 써야 한다는 데 있다. 한국 축구의 현주소다. 한국 축구가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근본 이유가본프레레 감독을 해임하지 못하는 네 가지 이유 속에 담겨 있다.

1 대안이 없다.
‘대부분 국가들이 월드컵 체제를 갖추었고, 유럽 프로 리그가 시작해 명망 있는 지도자를 찾기 어렵다. 또 월드컵까지 10개월밖에 남지 않아 어떤 감독이 오더라도 선수 파악과 팀 정비에 시간이 걸린다.’ 대한축구협회가 본프레레 유임을 선언한 이유다. 한 축구협회 고위 인사는 “외국인 감독 선임을 위해 진행되는 작업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축구협회의 다른 인사는 “본프레레만도 못한 사람을 데려올까 걱정이 돼서 그렇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월드컵을 ‘대충’ 치르자는 것인가? 대안이 없다는 말은 축구협회의 능력 부족과 직무 태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해 말부터 일기 시작한 감독경질론의 본질을 ‘냄비 여론’이라고 폄하하고, 감독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노력은 없었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축구협회의 몫이다. 그런데 축구협회 기술위원회와 국제국이 제대로 된 후보군조차 꾸리지 못하고 있다. 역대 외국인 감독 선임 과정에는 언제나 단골 손님이 등장한다. 브르노 메추·세놀 귀네스·필립 트루시에…. 명장이라기보다는 월드컵을 통해 눈에 익은 감독들이다. 축구협회가 평소 선진 축구를 연구하고는 있는지, 외국 감독에 대한 조사를 하고는 있는지 의심스럽다.
시간이 없다는 소리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근 거스 히딩크가 호주 대표팀 감독에 부임했다. 호주는 남미 5위팀과 플레이오프를 거쳐야 본선 티켓을 딸 수 있다.
한국 대표팀을 맡아 월드컵에 나가고 싶은, 명장 반열에 오른 감독은 얼마든지 있다. 선수들이 월드컵에서 뛰고 싶은 것만큼 감독들도 월드컵에 나서고 싶어한다. 승부사들에게 한국은 가장 매력적인 팀 가운데 하나다. 성장 가능성이 큰 데다 월드컵 본선 티켓을 손에 쥐고 있다. 또 한국 축구는 대표팀에 대한 지원도 그렇게 처지는 편이 아니다.

한 프로팀 감독은 “선진국 축구협회에서 추천을 받거나 공개 채용 광고를 내면 좋은 감독들이 몰려올 것이다. 협회의 무능으로 부풀려진 몸값 거품도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 프로 구단 고위 관계자는 “협회가 성의가 없어서 그렇지 한국팀을 맡고 싶어하는 이름 난 감독은 많다. 축구의 모든 일정이 대표팀 위주로 짜여 한국보다 대표팀 감독 하기 좋은 나라는 드물다”라고 말했다. 이장수 FC서울 감독은 “대표팀 위주의 축구 행정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 것도 최근에 들어서다. 팀이 죽을 지경이어서 외마디 비명을 지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8월17일 사우디아라비아전을 보고 축구협회가 감독의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것은 팬을 우롱하는 행위다. 그동안 노출된 문제는 덮어두고 한 경기로 본프레레를 평가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다. 사우디전을 이기면 여론을 돌릴 수 있다는 속내가 깔려 있다. 어차피 사우디는 티켓을 딴 마당에 1진 멤버를 한국에 보낼 리 없다. 

2 경질은 축구협회 책임론으로 이어진다.
감독 경질은 본프레레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앞선 움베르토 코엘류 감독의 실패로 한국 축구는 중흥기 2년을 까먹었지만 축구협회는 어물쩍 넘어갔다. 자기들이 데려온 지도자이기 때문에 축구협회가 본프레레를 옹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본프레레는 협회의 입맛에도 맞다. 히딩크처럼 까다로운 것도 아니고, 코엘류처럼 불평이 많은 것도 아니다.
축구협회는 감독 경질이 막대한 금전적 손해로 이어진다고 항변하고 있다. 2004년 6월부터 2006년 7월까지 한국팀을 맡기로 한 본프레레 감독의 연봉은 70만 달러로 알려져 있다. 그를 경질하더라도 남은 연봉은 지급해야 한다. 코엘류에게도 협회는 남은 기간에 해당하는 임금 24만 달러를 지급했다. 전 기술위원장 박경화씨(수원대 교수)는 “코엘류의 남은 임기 동안 한국 축구에 대한 책이나 보고서라도 쓰게 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회택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외국인 감독을 불러 1년 만에 뽑아먹으려는 도둑 심보를 보이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지만 코엘류와 본프레레에게 배운 것은 거의 없다.

 
외국인 감독 선임과 감독을 맡은 축구협회 국제국과 기술위원회의 책임이 크다. 축구협회에서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는 국제국 가삼현 국장은 외국인 감독 선임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국제국은 어떤 기준에 따라 코엘류와 본프레레 감독을 선임했는지에 대해서는 극비 사항으로 취급하고 있다. 국제국은 비밀은 많고 권력이 집중된 부서이다. 이를 염려하는 사람은 협회 내에도 많다.
본프레레가 축구 발전에 대한 청사진을 내놓지 못해 대표팀 경기력 저하로 이어졌다. 기술위원회는 이를 수수방관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한 축구인은 “기술위원회가 본프레레를 방목했다”라고 말했다. 올해 공식적으로 기술위가 본프레레를 만난 횟수는 두 번뿐이다. 본프레레 감독도 기술위의 보고서를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과 속내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기술위원은 없다. 신문선 SBS 해설위원은 “비싼 외국인 감독을 들여왔으면 협회는 인건비를 빼기 위해서라도 관리·감독했어야 했다. 일본이 2000년 아시안컵을 완벽하게 우승할 때에도 강화위원회는 필립 트루시에 감독을 끈질기게 다그쳤다”라고 말했다.
일반 기업에서 자격 미달인 사람을 데려와 돈을 낭비했다면 징계는 피할 수 없다. 책임의 본질은 축구협회에 있다. 하지만 축구협회와 기술위원회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당연히 반성하는 사람은 없다. 대신 축구팬 80%가 넘는 비판 여론을 냄비 여론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축구팬들이 한 경기를 보고 경질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3 대표 선수들은 본프레레가 좋다.
본프레레호에서 한 번 주전은 영원한 주전이다. 친선 게임에서도 붙박이 주전이 나선다. 이동국·이운재·정경호·유경렬·김동진·김정우…. 본프레레는 선수의 이름값에도 집착한다. 월드컵 최종 예선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본프레레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이천수와 김남일을 고집했다. 우즈베키스탄전에서 몸 상태가 완전치 않은 유상철을 고집했다. 동아시아대회에서는 부상으로 축구화도 못 신는 박주영을 대표팀에 포함했다. 본프레레는 나이지리아 감독 시절부터 선수 발굴을 게을리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골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대표팀 공격수 자리는 이동국의 독점 체제. ‘본프레레의 황태자’ 이동국은 본프레레 취임 후 전경기 출장에 빛난다. 최근 이동국의 경기 내용은 2002년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하는 쓴맛을 본 뒤 상무에서 보이던 플레이와는 판이하다.

동아시아대회에서 골키퍼상을 받은 이운재의 순발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최근에는 선방 장면도 보이지 못했다. 킥도 부정확하고 거리는 짧아졌다. 32세라는 나이가 부담스러워 보인다. 무엇보다 이운재의 몸은 비대해졌다. 동아시아대회를 앞두고 몸무게가 5㎏ 늘어난 상태로 대표팀에 들어왔다고 한다. ‘10년간 대표팀 골문을 책임질 재목’이라고 평가받던 김영광과 김용대의 플레이는 경기에서 본 적이 없어 아예 비교가 안 된다.
대표팀에서 주전 경쟁은 사라졌다. 이는 곧 경기력 저하로 이어졌다. 월드컵 때 대표팀과 비교해 보자. 우선 압박이 사라졌다. 볼을 잡은 상대 선수에게 2명, 3명이 에워싸고 압박하는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스피드도 떨어졌다. 월드컵 때처럼 최전방과 후방의 간격이 30m를 넘지 않으면서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들던 모습이 아니다. ‘압박’과 ‘속도’에서 떨어진다면 세계 축구의 흐름에서 퇴보할 수밖에 없다.
월드컵 때보다 나아진 경기력을 보여주는 선수가 눈에 띄지 않는다. 골을 넣어야 하겠다는 악착같은 맛이 없다. 꼭 이기겠다는 의지도 없다. 심지어 일본전까지도 마찬가지다.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결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팀 소집일에도 강남의 나이트클럽에 가면 연예인과 어울리는 축구 선수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문제다.

실력 없는 선수를 기용한 것도,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도, 최선을 다할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도 모두 감독 책임이다. 한 프로팀 감독은 “선수들이 투지가 없다. 선수들을 긴장 속에서 경쟁 관계로 이끌어내지 못하면 결과는 실패뿐이다”라고 말했다.
대표 선수들은 본프레레 체제가 편하다. 그렇다고 선수들이 본프레레를 신뢰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선수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프레레의 생명력은 길었다. 본프레레가 1991년 나이지리아 여자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자마자 성희롱 사건이 터졌다. 이 파문으로 나이지리아 축구협회 전체가 흔들렸다. 결국 코칭스태프가 전원 해임되었으나 본프레레는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본프레레가 ‘대단한 생존자(great survivor)’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다.

4 정몽준이 ‘노’라고 하지 않았다.
본프레레가 살아 남은 가장 큰 이유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사인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회장의 스타일과 축구협회의 성격을 보면 감독 경질과 같은 사안은 전적으로 정회장의 판단에 달려 있다. 한 축구협회 임원은 “정회장의 말은 협회에서 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라고 말했다. 축구협회는 축구 발전을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축구 발전에 앞서 정몽준 회장이라는 대명제가 존재한다.

 
정회장이 축구를 이벤트로 활용하고 있어 한국 축구 발전에 한계가 있다고 비판하는 축구인들도 있다. 최근 정회장이 축구협회가 추진하고 있는 ‘축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것도 뒷말이 무성하다. 정회장은 김용식·홍덕영·이회택·차범근·김화집·히딩크와 함께 한국 축구의 영웅으로 헌액되었다. 축구협회는 이들을 기리는 <한국 축구의 영웅들>이라는 책도 발간했다. 이 책은 ‘정몽준이 빠진 2002 월드컵은 있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 7월 히딩크·이회택·차범근·정몽준은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사인회를 갖기도 했다. 월드컵을 개최한 노력과 축구 행정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공을 송두리째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현직 회장이 자기 이름을 헌액한다는 것은 심했다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원로 축구인 허승표씨는 “협회 행정과 대표팀 경기가 모두 정치인 정몽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는 “정회장은 축구협회를 축구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회장을 비판하지 못하는 언론과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협회도 축구 발전에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축구 칼럼니스트 오은 스위니는 “한국 기자들은 왜 정회장 눈치만 보고 한마디도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한 축구 기자는 “정회장 비판 기사를 썼다고 경기장 출입 카드를 주지 않았다.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발전도 없다”라고 말했다.
김호 전 대표팀 감독은 “감독이 문제가 아니라 축구협회장을 스카우트해 오는 게 한국 축구에서 더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다른 유명 축구인은 “축구를 정치인의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한국 축구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월드컵 4강을 발판으로 2002년 유력한 대선 후보로 우뚝 섰던 정회장. 축구 정치에 사활을 건 만큼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량 미달인 본프레레 감독을 지켜보고만 있다. 정회장이 ‘축구공은 둥글다’는 요행수에 지나치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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