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잡이가 또 돌아왔네
  • 이형석 (<헤럴드경제> 기자) ()
  • 승인 2005.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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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서부 영화:<오픈 레인지> <황야의 마니투>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사멸하는 장르는 아예 다른 영토로 발을 들여놓거나 이종과 교배하지 않는 한, 대개 막바지에 다달아 씁쓸함을 곱씹거나 자신을 희화하는 방식으로 우스워진다. 미국의 뜨겁고 찬란했던 시대를 풍미했고, 한국의 개발시대에 채찍질이 되었던 서부 영화가 모습을 바꾸어 다시 돌아왔다.

케빈 코스트너가 감독, 주연한 <오픈 레인지>와 독일산 펑키 웨스턴 <황야의 마니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오픈 레인지>가 진한 향수 속에 씁쓸함을 담아내는 복고적 서부 영화라면, <황야의 마니투>는 웨스턴이라는 장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깔깔대는 코미디다.

<오픈 레인지>는 정통 웨스턴의 정석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는 영화다. 주인공은 이방인이고, 마을은 불의의 세력에게 장악되어 있다. 늘 그렇듯이 거칠지만 정의로운 주인공과 미녀의 로맨스가 곁들여져 있으며, 대결은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가며 최후의 승부에 이른다. 그리고 정의는 승리한다. 캐스팅도 향수를 자극하는 데 한 몫 한다. <대부>에서 보스의 충실한 조력자였던 로버트 듀발이 ‘보스’라는 이름으로 주인공인 케빈 코스트너의 파트너가 되었고, <벅시><러브 어페어>로 미녀 스타의 전성기를 누렸던 아네트 베닝이 오랜만에 얼굴을 내밀었다.

전형적인 서부극의 관습 답습한 <오픈 레인저>

카우보이 찰리(케빈 코스트너)는 보스·모스·버튼 등 일행들과 함께 우연히 한 마을에 들렀다가 위험에 처한다. 평온해 보이는 마을이 사실은 악덕 농장주, 그와 결탁한 보안관에게 지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료가 살해된 것을 계기로 마을의 비밀을 알게 된 찰리 일행은 복수와 정의를 위해 총을 집어든다. 결투가 거듭되고, 악덕 농장주와 최후의 대결에 이른다.

서부 영화는 존 웨인의 고전시대를 거쳐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변종되었다가, 1990년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야심작 <용서받지 못한 자>에 이르러 마지막 조종을 울린다. 고전 서부극이 명징한 선악대립 속에 정의를 위해 싸우는 영웅을 부각했다면, 마카로니 웨스턴은 권선징악의 강박을 내버리고 폭력의 격렬함과 인물들의 고독한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더 이상 영웅일 수 없는 카우보이의 쓸쓸한 회고담이었다. 격렬하게 싸워왔던 젊음은 아무 것도 보상해주지 못했고, 주름이 잔뜩 팬 카우보이의 빈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B급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할리우드에서 주목되었고, 카우보이의 아이콘으로 스타덤에 오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감독·주연작이었던 이 작품은 이스트우드의 배우로서의 ‘자의식’과 서부 영화의 역사를 한 번에 훑어낸 걸작이었다.

하지만 케빈 코스트너의 <오픈 레인지>는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용서받지 못한 자>에 비해 자의식도, 장르적 재미도 뚜렷하게 전해주지 못한다. 전형적인 영웅담인 고전 서부극과 <용서받지 못한 자>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지만 그 어느 것에도 충실하지 못한 채 뻔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카우보이 찰리가 젊은 시절 전문 살인자였다는 설정이 눈에 띄지만, 극이 전개되며 정의라는 명분이 지나치게 앞세워져 인물의 고독감이나 황폐감을 파고들지 못하며, 캐릭터의 입체적 구축에 실패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어설픈 사족처럼 보인다.

독일 펑키 웨스턴 <황야의 마니투>

 
반면, <황야의 마니투>는 서부 영화의 컨벤션을 조소하며 유쾌발랄한 독창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리던 이들을 상대로 음주운전 단속이 이루어진다던가 엄숙하게 무게 잡던 악당 보스가 CM송에 맞추어 엉뚱한 춤을 춘다거나, 부시 대통령·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아폴로 13호 등의 이름을 코믹하게 패러디한 대목 등 때로는 유치하고 때로는 재기발랄한 농담이 엉뚱한 스토리 속에 잘 녹아있다. <황야의 마니투>역시 감독이 주연을 겸했다.  

<황야의 마니투>에는 근사하게 폼 잡는 영웅도 없고, 비열하게 묘사되는 인디언도,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악당도 없다. 인물들은 허둥대며, 상황은 기가 막히고, 대결은 코믹하다. 백인 총잡이 레인저가 망한 부족의 인디언 추장 승계자 아바하치의 목숨을 구해주게 되고 의형제를 맺는다는 반 웨스턴적 설정에서 영화는 엉뚱한 발을 내딛기 시작한다.

이 둘은 창업을 결심하지만 악당 산타마리아의 사기에 걸려들어 모든 것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토끼부족’의 추격을 받는다. 이들은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부족의 유산인 '마니투의 보물지도'를 찾아 나선다. 보물지도를 나누어 갖고 있는 위니터치, 미녀 부시 등을 찾아 긴박한 여정을 떠난다. 서부 영화를 보는 외부(독일)의 시선이 재미있다. 서부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오픈 레인지>에서는 향수를, <황야의 마니투>에서는 재기 있는 농담을 얻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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