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죽이기> 쓴 강준만 교수
  • 김당 기자 ()
  • 승인 199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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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물나는 양비론은 그만 끝내자”

지방 대학의 한 교수가 한국 사회에 도전장을 던졌다. <김대중 죽이기>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단 책이 그것이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말하기 꺼리는, 그래서 저자의 말을 빌려, 우리 모두 공모하고 있는 지역감정을 고리로 언론과 지식인을 정면으로 탄핵한 이 책이 한국 사회에 미칠 파문은 커 보인다. 발 빠른 신문들이, 나온지 열흘 만에 4판을 찍은 이 책과 저자에 대해 애써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수상쩍다. 진보에서 보수까지 여기저기로부터 ‘죽일 놈’ 소리 들을 것을 각오하고, 오로지 역사가 자기편이 되어 주리라는 믿음 하나로 이 책을 썼다는 강준만 교수(전북대․신문방송학과)로부터 그가 왜 그같은 ‘지적 자살 행위’를 감행했는지 들어 보았다.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 전공이 언론학이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김대중씨 문제는 지역감정 문제를 다루다 보니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로 도드라진 것일 뿐이고 제가 갖고 있는 문제인식은 김대중씨 문제 이전에 우리 사회의 이른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와 형태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지식인의 생명은 독립성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의 지식인 집단을 보면 언론에 완전히 종속된 채 독자적인 채널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론을 통해 등단하지 않으면 대중에게 자기 의견을 전파할 길이 없습니다. 지식인이 언론에 종속돼 있다 보니까 생기는 문제가 뭐냐 하면 지식의 시장성이 언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지식인의 상품성이 언론에 의해 결정되다 보니까 다양한 목소리가 처음부터 배제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김대중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라는 겁니까?

 저는 그렇게 본 것이죠. 이를테면 분명히 우리 사회는 친김대중적이거나 김대중씨의 논리를 옹호해줄 지식인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매체들로부터 기피 당하니까 그런 기회 자체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에서 다룬 김대중씨 문제는 하나의 사례 연구일 뿐이고,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이자 배경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구조 자체가, 지식인 집단이 언론에 장악돼 있는 상태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나라 언론은 상업적이고, 알게 모르게 자기들 나름의 특별한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고, 또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 플레이를 하는 집단이거든요. 그래서 자기들의 입맛에 안 맞거나 정치적 성향을 거스르는 지식인들은 처음부터 언론에서 배제됩니다. 지식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매체에 어떤 글을 쓸 때는 어떻게 한다는 것을. 그것은 곧 우리 사회에서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심판관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언론과 지식인에 의해 주도되고 확산되어 온 집단적 편견과 음모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 대표적 사례를 ‘김대중 죽이기’로 본 것입니다.

교수로서 ‘동업자’를 비판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언론학자로서 언론의 동업자 감싸주기를 비판해온 제가 그것을 외면한다면 그것 또한 이율배반인 거죠. 그리고 또 동업자 비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제가 한 잡지에 ‘추악한 교수직 나눠먹기’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교수 집단이 교수 초빙이라고 공채 광고를 해놓고 거의 다 후배․제자만 뽑는 풍토를 이 책에서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사실 저로서는 그때가 더 쓰기 어려웠습니다.

책에다 자신을 ‘반쪽 전라도내기’라고 표현했던데, 어쨌건 전라도 사람으로서 경상도 사람들을 꾸짖어야 하는 부담도 컸겠습니다.

 부담은 컸지만 정면 돌파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신문스크랩을 해 보았더니 그동안 지역 감정 해소한다고 수백 가지 행사가 열렸어요. 삼남 지역 사람들이 지리산에도 함께 올라가 보고, 직종 별로 교류도 해보고, 애들끼리 만나 우정도 나누게 하고, 영․호남 사람들이 서로 헌혈해 피도 섞어보고 별짓을 다했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해서 될 문제입니까. 그래서 지금 어떻습니까. 지금까지도 대구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전두환씨 인기가 김대중씨보다 더 높게 나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게 민주주의 하자는 겁니까? 그것을 누가 지적해 줘야 합니까? 지식인과 언론의 역할이 뭡니까? 그런 것 하나 지적하지 못하면서 우리 사회의 무엇에 대해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도 경상도 사람들이 자랑스레 말하는 의리, 나쁘게 말하면 그런 패거리 의식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되고 한국 정치가 개판이라는 이야기를 책에다 해놓긴 했지만, 경상도 사람들이 제 주장에 동의할 것인가 생각하면 가슴이 무겁습니다. 수긍을 안할 것이기 때문이죠. 왜? 제가 얘기하기 때문이죠. 반쪽 전라도도 전라도니까. 그런데 반면에 경상도 쪽에서 존경 받는 지식인이 그런 얘기를 한다면, 그러면 달라집니다. 또 서울에서 어떤 존경 받는 지식인이 같은 말을 한다면 그 말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제가 문제를 제기했다고 해서 달리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저만 욕먹을 수도 있지요.

이 책은 기본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책인데, 역효과만 얻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자극을 주고 싶은 것은 정말 존경받는 지식인․종교인들이 이 문제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역감정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지역감정 해소한다고 인적 교류니 뭐니 해서 백날 만나봤자 안되는 겁니다. 그것은 최근까지의 여론조사에서 입증되고 있습니다. 또 사실 양쪽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만나면 문제가 없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경상도 친구가 더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경상도 사람들 다 좋습니다. 친절하고. 다만 자기 지역 출신 정치인이다 하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건 확 휩쓸려 가버리는 것이 문제고, 이것은 지적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걸 그동안 누가 지적했습니까. 이른바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그동안 매체에 써온 것을 보더라도 민주주의의 핵심이 정권교체라는 말은 안했어요. 저는 그것을 지적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조선일보>만 그렇게 물고 늘어졌습니까?

 저는 <조선일보>와 아무런 개인적인 감정이 없습니다. 또 주위에서 보면 언론학을 전공하지 않은 교수들도 <조선일보>에 관한 이야기는 의견일치가 됩니다. 좋은 신문이라는 거죠. 그런데 좋은 신문이라는 것이, 누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다른 신문들은 대부분 경영진․논설위원․데스크․평지가 이렇게 따로 노는데, 그래서 누수가 있는데 <조선일보>만은 일사불란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겉과 속이 다른, 계산을 갖고 전략․전술에 따라 보도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신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언론학자로서 저는 <조선일보>를 하나의 일간지라고 보기보다는 사실은 지하 정당이고 일종의 정치 세력이라고 봅니다. 지난 대선 때 어땠습니까. 김대중씨하고는 전에도 싸운 적이 있지만, 정주영 후보하고도 한판 결전을 붙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겼지 않습니까. 또 정주영 후보한테 표를 적당히 많이 주면 김대중 후보가 어부자리로 당선되는, 유권자의 투표 의도와는 상반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그거나 알고 찍어라 하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김영삼 후보를 밀지 않았습니까. 그런 신문은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가 책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편집국장 출신 4명을 현재 장관급에 진출시켜 놓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느 신문사에든 몇 사람은 있기 마련인 호남 출신이 <조선일보> 부장급 이상 편집 간부 36명 가운데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을 결코 ‘우연’일 수가 없는 거죠.

출판사 쪽에서 들으니 국회에서 책을 백권 사갔다고 하던데, 결과론이긴 하지만 ‘김대중 죽이기’라는 표현은 ‘김대중 살리기’ 또는 ‘정치(인)를 위한 옹호론’을 역설적으로 이름붙인 것 아닙니까?

 저는 정치 보도와 관련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정치인을 매도하고 부끄럽게 해서 개혁될 수 있는 것과, 정치가 그렇게 썩은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옹호해서 개혁하는 쪽으로 잘 유도하는 것하고 둘 중에서 저는 후자가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봅니다. 사실 지금처럼 정치 자체를 짓밟아버리면 여야 구별이 없어지고, 결국 이것도 여당만 이롭게 됩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정치행위라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언론과 정치 평론가들은 시시비비를 가려 누군가의 편을 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자신들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훼손해 궁극적으로 자신의 상품성에 누를 끼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론과 정치 평론가들은 일단 정치가 시끄러우면 정치인을 코흘리개 아이들처럼 다룹니다. ‘왜 싸우니 왜 싸워’하면서 둘다 나무라는 것이 정치 보도나 평론의 공식처럼 통용됩니다. 그러면 그 더러운 정치판에 누가 뛰어들려고 합니까. 어떤 국민이 가치 판단을 하고 투표를 합니까. 지식인들이 가치 판단을 회피하는데.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글깨나 쓰는 사람들 보면 다 그런 식입니다.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단골로 나와서 말하는 교수들도 그렇고. 시청자들이 보기에 멋있게 보이죠. 얼마나 박력 있습니까. 정치인들 앞에서 막 정치를 욕하고.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정치가 달라질 수 없는 겁니다. 정치가 아무리 썩었더라도 덜 썩은 놈과 더 썩은 놈은 가려야지, 다 썩었다고 하면 아무런 의미나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정치를 옹호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국민이 해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독자 반향은 어떻습니까? 특히 지역감정 부분에 대해서는 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글을 쓰셨던데 ‘돌멩이’가 날아오던가요?

 저한테 직접 온 것도 있고 출판사 쪽에서 편기 온 것을 전해주는데 그런 얘기가 많더라구요. 자기들이 읽어도 ‘아, 이 사람 참 곤란한 지경에 이를 수 있겠구나’하는 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저한테 온 편지 중에서도 ‘선생님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니까 절대 기죽지 마라’ 그럽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대개 호남 출신 독자들이죠. 제가 전화를 끊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돌멩이’가 날아온 적은 없습니다.

시비를 거는 독자들이 많을 거라고 예상해서 전화를 끊고 있는 겁니까?

 그것 보다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섭니다. 강의 준비도 해야 하고 또 지금 제2편을 쓰고 있는데 전화 오고 그러면 책 쓰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매체 쪽에 글 쓰는 것을 아주 딱 끊었는데 자꾸 연락이 오고 인터뷰하자고 하거든요. 그러면 또 제가 성격이 소심해서 매정하게 끊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아예 전화를 끊고 있는 겁니다.

‘김대중 죽이기’라는 음모에서 김대중씨가 책임질 부분은 없습니까?

 김대중씨가 공감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 참 답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를테면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즐긴단 말이에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김대중씨를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근거의 핵심이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이미지하고, 실제 신문에서 접하는 정치 행태하고 사이에는 분명 거리가 있고, 그것이 주는 괴리감이 있거든요. 게다가 언론 매체가 그 괴리를 더 벌리는 쪽으로 보도하다 보니까 싫어하는 사람들로부터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두 얼굴의 느낌을 주는 거죠. 그런데 김대중씨는 끝내 그 거리를 좁히지 못했어요.

이 책이 그 거리를 좁히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이 책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책에서 거론했던 교수․평론가 들의 양비론적 시각 만큼은 제동을 거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분들이 제 논리에 설득 당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런 논리가 행태에 대해 아무한테서도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제 비판이 일정 부분 제동을 거는 효과는 있을 겁니다. 제가 이 책을 쓴 의도도 사실 독자들을 직접 설득하기보다는 양비론을 펴온 지식인들한테 제발 이제는 그짓 좀 그만하라는 것이거든요. 정치가 개판이라느니, 국민이 불쌍하다느니 하는 소리는 신물이 나니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책대로라면 그렇게 많은 지식인과 언론 그리고 일반 국민이 ‘김대중 죽이기’에 가담하고 있는데도 아직 ‘안 죽은’것을 보면 정말 끈질긴 생명력 아닙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김대중씨를 ‘죽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를 제거하면 됩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그것을 잘 압니다. 그렇게 안할 뿐이지. 호남 고립화 구도가 심해질수록 김대중씨의 영향력은 적어도 호남권에서는 커지게 돼 있습니다. 따라서 김종필씨도 쫓아냈겠다, 이제 3당 합당으로 짜인 호남 고립화 전략을 중단하고 호남의 상처를 실질적으로 치유하면 김대중씨의 영향력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현재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김대중씨가 집권했더라면 그런 호남 차별 문제에 더 접근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봅니다. 김대중씨가 대통령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권력 구도를 호남 사람 일색으로 다 바꾸고 경제력을 호남 쪽으로 집중시킬 수 있겠습니까. 저는 김대중씨한테 그런 양식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김대중씨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김영삼 대통령한테 기본적으로 개혁 의지가 있다고 보는 사람인데, 역사에 남을 일을 왜 안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한국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구조․형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지식인 집단이 언론에 장악돼 있는 상황이라 독립적인 심판관은 한국 사회에 거의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통해 언론과 지식인의 집단적 편견과 음모를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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