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 지폐+핵물질 테러 핵융합 막자”
  • 워싱턴.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5.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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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10년 묵힌 ‘슈퍼노트’ 꺼내 들고 대북 압박에 나선 까닭

 
미국의 대북 압박이 북한의 불법 위폐 문제를 계기로 본격화하고 있다. 한국이나 중국이 6자회담의 재개에 악영향을 우려해 가급적 북한의 위폐 문제에 조심스런 입장을 취하는 것과 달리 미국은 위폐를 범죄 행위로 규정짓고  정치적 고려 없이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지난 12월20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은 북한의 불법 위폐 문제와 관련해 법집행 차원에서 조사하고 있다”며이 문제가 정치적 흥정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타국의 달러 위폐를  미국에 대한 ‘casus belli’, 즉 전쟁 행위로 간주할 정도로 대단히 심각히 받아들인다.

 워싱턴의 정통한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미국이 북한의 위폐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삼기 시작한 시점은 지난 여름부터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6자회담이 별 진전이 없자 북한의 주요 외화 획득원 중 하나인 위폐 활동과 마약거래선을 봉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당시 이를 주도한 기구는 국무부 내에 설치된 ‘북한실무그룹’(NKWG). 이 그룹은 소위 IAI(Illicit Activities Initiative), 즉 불법활동 방지구상으로 알려진 행동방안을 마련하고 북한을 비롯해 이란, 시리아 등 국제적인 마약 밀거래와 불법 위폐, 불법 상표 조작 등에 나서는 나라들을 집중 추적 감시하고 제재책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비서실장을 지내 관련 내용을 훤히 파악하고 있는 래리 윌커슨씨는 “이 구상은 대량살상무기의 세계적 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국무부 주도로 만들어졌다”면서 “주 대상은 북한의 불법 외화 획득원을 원천 봉쇄하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이 그룹을 주도한 인물은 지난 1980, 1990년대에 일본에 거주하며 조총련계의 대북 거래를 연구한 경험이 있던 북한 전문가 데이비드 애셔 전 국무부 조정관. 지난 7월 은퇴한 뒤 현재 국방부 산하 국방분석연구소(IDA)에 소속되어 있는 애셔는 지난 11월15일 우드로윌슨센터가 주최한 연설에서 “히틀러 나치정권 이래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를 상대로 위폐 제조 활동을 한 나라가 없다”면서 북한을 ‘범죄국가’로 지목해 관심을 끈 바 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가 지난 12월7일 비슷한 이유로 북한을 ‘범죄국’으로 지칭한 것도 실은 애셔의 발언에 근거한 것이다.

 
사실 미국은 지난 1989년 필리핀에서 북한 관리의 외교행랑에서 육안으로 진짜 달러와 구별하기 힘든 100달러짜리 지폐, 일명 슈퍼노트(Supernote:미국 사법 당국이 부르는 공식명칭은 C-14342)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미국은 확정적인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 전담반을 구성해 내사에 집중해왔다. 특히 1990년대 들어 북한의 위조 화폐 문제가 심심치 않게 불거졌지만 미국 정부는 북한 핵문제 해결이라는 외교적 우선 목표를 희석시킬까봐 의도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이같은 분위기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차단을 최우선 외교 목표로 설정한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뒤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 의회조사국에서 다년간 북한의 위폐, 마약 거래 등을 전문적으로 추적해온 라파엘 펄 선임 연구원은 “부시 행정부는 종전에는 순전히 북한의 위폐 제조 등 불법 행위 자체만을 들여다봤지만, 지금은 그런 불법 행위를 통해 북한이 벌어들이는 돈과 그 용처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펄은 북한이 이런 불법 활동을 통해 연간 5억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으로 추산한다.

아일랜드 노동당 당수, 북한 위폐 유통 혐의로 기소

또하나 부시 행정부가 우려하는 것은 북한이 국제 범죄테러 조직과 연계해 슈퍼 노트를 대량 유통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 단순히 슈퍼 노트뿐 아니라 핵물질까지도 북한이 국제 테러조직에게 팔아넘길 수 있다는, 다시 말해 슈퍼 노트를 매개하는 데 동원된 북한의 밀매 파이프라인이 그대로 북한의 핵물질 밀거래로 전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를 반영하듯 부시 대통령은 지난 6월29일 대통령 행정명령 13382호를 발표했다. 이 행정명령은 대량살상무기를 확산하는 나라에 대해선 미국 내 자산 동결은 물론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 금지를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이같은 행정명령이 나오기 무섭게 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지난 9월 중순 미국 재무부는 마카오에 있는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이 지난 20년 동안 북한의 위조 달러를 세탁해 주었다며 이 은행을 ‘돈세탁 우선 우려 대상’으로 지정했다.

 
이런 딱지가 붙게 되면 해당 은행은 미국 은행과 일절 거래를 할 수 없게 된다. 미국 재무부는 이어 지난 10월21일에는 북한의 조선룡봉총회사 등 8개 회사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관련한 불법 금융활동을 벌였다며 미국 회사와의 거래 중단 및 미국 내 자산 동결 조처를 내렸다. 일종의 대북 경제 제재인 셈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같은 대북 제재가 나오기 직전인 지난 10월12일 주요 미국 언론을 통해 일제히 보도된 북한과 션 갈랜드 아일랜드(71) 노동당 당수 간의 위폐 커넥션이다. 그간 설로만 떠돌던 북한의 위폐 제조와 국제적 유통 거래가 소상히 드러난 것도 이때였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발표되기 한 달 전인 지난 5월17일 북한과 공모해 슈퍼 노트를 불법 유통시킨 혐의로 당시 숀 갈랜드 아일랜드 노동당 당수를  기소하고, 아일랜드 사법 당국에 대해 신병 인도를 요청해놓은 상태였다. 당시 기소장에서 미국은 100달러 슈퍼 노트가 ‘북한 정부의 주관 아래 북한에서 제조됐으며, 정부 관리를 자칭하는 북한 사람들이 이 슈퍼 노트를 전 세계에 판매하고 유통시켰다’며 사상 처음으로 북한을 슈퍼 노트 위폐 제조국으로 지명했다.

특히 기소장에 따르면 갈랜드는 지난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노동당 당수 자격으로 아일랜드를 비롯해 영국 등 유럽 각국을 방문하면서 6명의 부하와 함께 북한 관리들로부터 최소 100만 달러 이상의 슈퍼 노트를 구입했다. 또 이들이 유통시킨 슈퍼 노트 총액은 2천8백만 달러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북한의 슈퍼 노트 위조 등 불법 행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미국의 대북 압박은 가히 전방위로 전개되고 있다. 달러 위폐를 단속하는 주무 부처인 미국 재무부의 스튜어트 레비 차관은 최근 잇따라 “북한이 대량으로 슈퍼 노트를 유통시켜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부추키고 있다”면서 “즉각 중단하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그의 경고가 나오기 무섭게 지난 12월13일 재무부 금융단속국은 미국 내 모든 금융기관에 대해 북한의 불법 금융활동을 경고하는 권고문을 발송했다. 또 그로부터 사흘 뒤 미국 정부는 한국을 포함해 40개국을 초청해 북한의 슈퍼 노트 불법 제조와 관련한 비공개 브리핑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지난 16년간 유통시켜온 100달러 슈퍼 노트 실물을 공개했는가 하면 북한이  슈퍼 노트를 만들기 위해 스위스에서 구입한 잉크와 프랑스 등에서 초정밀 인쇄기를 구입한 물증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미국의 대북 압박이 본격화하면서 일각에서는 위폐 문제로 6자회담 재개가 물건너가는 것이 아니냐는 회의적 관측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6자회담과 별도로 북한의 불법 위폐 활동만큼은 차제에 발본 색원하겠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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