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이름으로’ 영광을 꽂다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6.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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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프로 풋볼 선수 하인스 워드, 좌절 뚫고 미국 NFL 정상에 ‘우뚝’

 
해마다 2월 초만 되면 미국 전역은 프로 풋볼리그(NFL) 최고의 축제인 슈퍼볼, 즉 미식 축구 경기로 들썩거린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2월5일 미시건 주 디트로이트에서 벌어진 피츠버그 스틸러스와 시애틀 시호크스가 격돌한 풋볼 경기를 지켜본 시청자는 약 5천5백만명에 달했다.

이런 뜨거운 열기를 반영하듯 경기장은 6천달러가 넘는 상석은 물론 2천 달러가 넘는 말석 입장권까지 동이 났다. 30초당 텔레비전 광고료가 역대 최고가인 2백60만 달러로 치솟았다.

올해 슈퍼볼 경기에서는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주전 선수로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4쿼터 중반에 43야드짜리 터치다운을 기록해 시호크스를 21대 10으로 통쾌하게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한 선수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날 화제의 주인공은 슈퍼볼 주전 선수 치고는 ‘왜소한’ 키 183cm에 ‘86’라는 등번호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 한국계 혼혈인 하인스 워드 2세(30)였다. 더군다나 그는 이날 슈퍼볼의 최우수 선수(MVP)로 뽑혀 많은 미국인들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67년 슈퍼볼이 처음 열린 이후 올해 제40회에 이르기까지 한국계 선수가 MVP를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워드의 맹활약과 이에 따른 MVP 수상 소식만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어머니는 오늘의 나를 만들기 위해 뼈가 빠지도록 일했다.” 그의 수상 소감에서 나온 어머니 예찬론은 미국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1970년대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흑인 사병을 만나 미국에 이민 간 후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워드를 오늘과 같은 스포츠 영웅으로 키워낸 김영희씨(55). 뒤늦게나마 아들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김씨는 요즘 빗발치는 인터뷰 요청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실제로 김씨는 인터뷰하러 직접 찾아오는 것이야 막을 수 없지만, 집과 일터로 걸려오는 인터뷰 요청 전화에 지친 나머지 일일이 응답하지 않은 채 ‘메시지를 남겨 달라’는 자동 응답기로 대신하고 있다.
 
미국 주요 언론을 통해 소개된 워드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한결같이 워드보다는 어머니 김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감동한 ‘반항아’ 아들의 모범적 인생 전환에 맞추어져 있다. 알려진 대로 어머니 김씨가 남편 하인스 워드를 만난 것은 1975년 미국 제2사단이 있던 동두천의 한 야간 업소였다. 당시 20세였던 워드는 다섯 살 연상이었던 김씨를 만나 사귀게 됐다. 사귄 지 몇 달 뒤 김씨는 워드와 결혼하고 이듬해 3월 아들 워드 2세를 낳았다. 1977년 김씨는 아들과 함께 귀국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남편과 헤어졌다고 말했다. 남편과 이혼할 당시 아들은 고작 생후 14개월. 그녀는 아들을 네 살 때까지 키우다 루이지애나 주에 사는 워드의 친할머니에게 보내야 했다. 법원이 당시 그녀가 영어를 못하는 데다 아들을 부양할 경제 능력이 없다며 양육권을 친가 쪽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은 김씨와 아들이 재회하는 쪽으로 정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루이지애나 주 외가에 살던 아들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을 나와 조지아 주에 사는 김씨를 찾아왔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늘 함께 살았지만 워드는 처음에 자신처럼 흑인이 아닌 황인종 어머니에 대해 불편함과 어색함을 크게 느꼈던 것 같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흑인 동네에서만 살다가 어머니가 살던 곳으로 오니 여러 인종이 섞여 살고 있었다. 당시 혼혈인 내가 부끄러웠다”라고 털어놓았다. 동급생들마저 그를 튀기라고 놀려대고 심지어 욕까지 해대는 통에 반발심은 더욱 커졌다. 피해 의식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 예전처럼 어머니가 모는 차를 타고 학교로 가다 동급생들을 보고 차 안에서 몸을 숨겼다.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용케도 친구들의 눈은 피했으나 급히 차에서 내리면서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차 안의 어머니가 흐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워드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그때서야 자신이 한국계 혼혈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밝혔다. 부끄럽게 여겨졌던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보였고, 삐딱한 아이에서 말 잘 듣는 모범생으로 변한 것도 그때 일이 계기가 되었다. 이런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김씨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식당 종업원으로, 호텔 객실 청소원으로, 또 공항의 캐셔로 하루 평균 세 곳에서 일하는 날이 허다했다. 그러면서도 김씨는 아무리 바빠도 아침 저녁으로 아들의 끼니만큼은 꼭 챙겼으며, 학교에도 손수 운전해 등교시키곤 했다.

 어머니가 보여준 이런 희생은 워드가 불우했던 청소년기를 용케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되었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준 인생 최대의 교훈은 항상 일하고 싸우다 보면 길을 헤쳐 나가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학창 시절 괴롭힌 혼혈의 굴레

실제로 워드가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 그리고 프로로 입단한 후 어려운 시절 흔들리지 않고 뻗어나갈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의 이런 교훈이 버팀목이 되었다. 고교 시절 그는 쿼터백으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두 번씩이나 그가 살던 주의 최우수 풋볼 공격 선수로 뽑혔다. 지금도 그의 오른쪽 팔뚝을 보면 ‘하인스 워드’란 한글과 함께 그 밑에는 미키마우스 문신이 새겨져 있다. 한글은 고교 풋볼 선수 시절 어머니 나라에 대한 애정 표시였다. 또 미키마우스는 늘 인생을 기쁘게 살겠다는 다짐에서 새겼다.
 
특히 풋볼 선수로서 그의 재능은 조지아 대학에 진학하면서 활짝 꽃피었다. 대학 때 워드가 명성을 날리자 마침내 아버지가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일언지하에 내쳤다. 그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조지아 대학 불독 풋볼 팀에서 맡은 포지션은 주전 공격수라 할 수 있는 쿼터백. 그는 처음엔 쿼터백뿐 아니라 일반의 시선을 그다지 끌지 못하는 러닝백과 테일백을 맡았지만 군소리 없이 척척 소화해냈다.

당시 그를 지탱한 힘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결국 대학 시절 그가 세운 기록은 조지아 대학 풋볼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엄청났다. 대학 시절 팀 메이트였고 1998년 슈퍼볼 MVP였던 터렐 데이비스는 워드를 가리켜 “내가 본 선수 가운데 가장 엄청난 재주를 가진 선수”라고 극찬했다.

 
그런 워드도 막상 프로 관문에서는 푸대접을 감수해야 했다. 1998년 시즌의 신인 드래프트에서 워드는 1순위가 아닌 3순위로 피츠버그 스틸러스에 겨우 입단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연봉 15만 달러에 뚜렷한 포지션조차 받지 못할 만큼 대우가 형편없었다.

그러나 워드는 자신의 처지에 굴하지 않고 특유의 끈기와 혼신의 노력 덕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입단 후 최고의 와이드 리시버로 명성을 날렸다. 와이드 리시버란 팀 리더로서 결정적인 패스를 잡아내 쿼터백에게 연결해주는 핵심 포스트로 일급 선수만이 맡는다.

그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리시브 전진 1천 야드를 기록해 풋볼 올스타가 출전하는 프로볼 선수로 참가한 데다 지금까지 팀에서 슈퍼볼 최우수 선수(MVP)를 3명이나 배출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지난해 정규 시즌에서 와이드 리시버였던 그는 부상으로 한 번 결장하는 바람에 아깝게 1천 야드 전진 기록을 놓쳤다. 고작 25야드가 부족했다.

그는 프로 입문 후 지금까지 1백27경기에 출전해 모두 5백74개 리시브에 7천30야드를 전진해 스틸러스의 팀 기록을 이미 깬 상태다. 이런 기록만 가지고도 그는 스틸러스가 배출한 미식 축구 사상 최고의 풋볼 선수인 린 스완과 존 스톨워스에 견줄 만한 보물급 선수다.

“어머니의 사랑과 자신감이 나를 키운 힘”

워드가 이런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데는 자신의 기량 못지않게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겸손함도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쳐준 덕목 중 하나였다. 그는 피츠버그 포스트 가제트와의 인터뷰에서 “프로 입문 때, 3차 관문에 가서야 턱걸이로 등단한 신참이었을 때 아무도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때문에 볼을 잡는 기술도, 앞으로 나가는 기술도 모두 내 스스로 고생 끝에 터득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자신에 대한 신뢰가 온갖 역경을 뚫고 성공에 이르게 한 원천이었다고 말했다. “세상 사람 누구도 ‘넌 할 수 없어’라고 말했을 때 난 해냈다. 어린 시절 꿈은 프로 풋볼 리그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교 시절 선생님들은 그건 불가능하다며 내게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충고했다. 내가 프로에 입문했을 때도 모두들 선발 주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주전 선수로 발탁되었다. 또 주위에서는 내게 풋볼 올스타가 출전하는 프로볼 선수가 결코 못될 것이라고 떠들었지만, 난 네 번씩이나 프로볼 선수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늘 내게 ‘넌 안돼’라는 말을 해댔지만 난 결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난 오로지 자신만을 믿었다.”

 
 그의 겸손함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더 있다. 지난해 정규 시즌 개막을 앞두고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구단에 항의해 계약 체결을 미룰 때였다. 이미 소속 팀은 물론이고 프로 풋볼 리그 소속 32개 팀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와이드 리시버로 평가받고 있던 그는 마음먹기에 따라선 무한정 버티며 팀을 절단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팬들에게 자신의 정당한 행동이 행여나 ‘과욕’으로 비쳐질까봐 2주 만에 항의를 중단했다. 당시 그는 향후 5년간 계약을 연장하는 대가로 2천7백50만 달러(약 2백67억원)를 받기로 합의했다.

 유명한 스포츠 전문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평론가인 피터 킹은 워드를 가리켜 “어머니에 대한 크나큰 사랑과 효심을 가진 위대한 선수”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인 시몬느와의 사이에 제이든이란 세 살배기 아들을 둔 워드는 프로 선수로 활동하며 번 돈으로 몇 년 전 어머니에게 애틀란타 근교 스톡브리지 새 집과 은색 벤츠 승용차를 선물했다. 그러나 어머니 김씨는 혼자살기엔 새 집이 너무 크다며 일터와 가까운 맥도너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김씨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지금도 근처 고등학교의 구내 식당으로 오전 6시면 어김없이 출근한다. 한때 여생을 편히 쉬라는 아들 성화에 못 이겨 월급 6백 달러(약 58만원)짜리 식당 일을 그만두기도 했지만 그 뒤로 우울증에 걸릴 뻔한 뒤 지금은 다시 식당에 나간다.

워드는 올 봄 어머니와 함께 한 번도 못 가본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한때 먼 이방의 여인에게서 태어난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이 스포츠 영웅이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럽고 사랑한다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 조국인 한국을 찾겠다는 것이다.

 
과연 미국 스포츠계에 앞으로 제2, 제3의 ‘하인스 워드’가 출현할 수 있을까. 미국의 국민 스포츠로 각광 받아온 프로풋볼(NFL) 경기에서 한국계 혼혈인 워드가 최고의 영예인 슈퍼볼 MVP를 차지함에 따라 새삼 미국에서 활약 중인 한국계 스포츠 스타의 면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선 프로 풋볼과 함께 미국 4대 스포츠 가운데 하나인 북미 아이스하키 리그(NHL)에서 맹활약 중인 박용수(미국명 리처드 박)씨를 꼽을 수 있다. 미식 축구만큼 체력 소모가 많은 NHL은 자고로 백인들의 독무대였다는 점에서, 동양인 출신 박씨의 NHL 진출은 그 자체가 큰 이변이었다. 박씨는 초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간 뒤 1994년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피츠버그 펭귄스에 입단했다.

한때 미국 청소년 국가 대표로도 뛰었던 그는 프로 입단 후 2002~2003년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미네소타 와일드의 영웅으로 칭송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올해로 NHL 9년차인 박씨는 지난해까지도 미네소타 와일드에서 활약하다 자유 계약 선수가 된 뒤 지금은 캐나다로 건너가 밴쿠버 캐넉스에서 뛰고 있다. 박씨는 2002년과 2004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대표로 뛰기도 했는데, 특히 2004년에는 미국 내 아시아계 최대 포털 사이트인 골드시(www.goldsea.com)가 선정한 ‘아시아계 미국 이민자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60인’에 꼽히기도 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과거 한국 아이스하키계의 영웅으로 불리던 백지선(미국명 짐 팩)씨도 미국에서 이름을 날린 주인공. 한국인 최초의 NHL 진출 기록을 가진 백씨는 1990년 명문 피츠버그 펭귄스에서 수비수로 활약했으며 1991~1992년 정규 시즌 막판 경기에 출전해 맹활약을 펼쳐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특히 NHL 산하 마이너 리그인 IHL에서도 두 차례나 우승컵을 끌어온 공로를 인정받아 아이스하키 선수의 꿈인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아마도 하인스 워드만큼이나 미국 국민들에게 유명세를 톡톡히 타는 사람으로는 단연 천재 프로 골퍼인 미셸 위(한국명 위성미)를 꼽아야 할 것 같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한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녀는 2000년부터 미국 골프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004년 당시 열다섯 살이란 최연소 나이로 커티스컵에 미국 국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이어 이듬해엔 LPGA 투어에서 공동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해 대학과 프로의 갈림길에서 프로의 길을 택한 그녀는 미국 골프계에서 언젠가 타이거 우즈를 앞지를 수 있는 유망주로 떠올랐다.

1980년대 미국 대학 미식 축구에서 명성을 떨친 선수로는 존 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풋볼 팀 소속으로 1984년 대학 미식 축구 4대 대회 중 하나인 로즈볼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프로로 진출해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는 198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애리조나 카디널스에 스카우트되었으나 고작 한 시즌만 활동한 채 프로 생활을 접고 말았다. 

 
미국 피겨 스케이트 부문에서도 한국계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남나리(미국명 나오미 나리 남) 씨다. 그녀는 1999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전미 선수권 대회에서 여자 싱글 부문 2위를 차지해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요즘은 부상 탓에 성적이 다소 부진한 상태다. 그녀는 지난 2월14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전미 선수권 페어 종목에서 5위에 그쳐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한편 이들 한국계 미국인들과 달리 순수 토종파 한국인으로는 단연 ‘코리아 특급’ 박찬호 선수가 미국인에게 알려져 있다. 미식 축구 만큼이나 야구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에게 박찬호는 한국이 낳은 최고의 강속구 투수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1994년 메이저 프로야구팀인 LA 다저스의 피터 오말리 구단주의 눈에 들어 이 팀에 입단한 뒤 한때 실적 부진으로 마이너 리그로 좌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1996년 메이저 리그 재진입에 성공했다. 그는 2001년 11월 자유 계약 선수가 된 뒤 텍사스 레인저스와 총 7천1백만 달러(약 6백89억원)에 입단 계약을 맺고 이적했으나 이듬해부터 잦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난해 7월부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된 상태다. 현재 LA 다저스에는 고려대 출신인 최희섭 선수가 내야수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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