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상아탑에서 추락하다
  • 워싱턴 · 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6.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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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스 하버드 대학 총장 ‘자진 사퇴’ 전말 / ‘재승박덕’이 낙마 원인

 
미국의 하버드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면서 또한 가장 부유한 대학이다. 지난해 말 현재 6천6백여 명의 재학생에 2천5백명의 교수진(의과대학 제외), 28억 달러의 예산에 지난 5년간 기부금 총액만 무려 2백60억 달러에 달한다. 이런 하버드 대학을 이끌어가는 총장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만큼이나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1991년 취임한 닐 루덴스타인 총장이 10년 만에 총장 직에서 물러난 것도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2001년 7월 루덴스타인의 뒤를 이었던 래리 서머스 총장(51)이 재임 5년만인 오는 6월 말 중도 하차한다. 그런데 그의 퇴임 이유는 스트레스가 아닌 외부의 압력이다.

서머스 총장은 취임 직후부터 오만한 업무 스타일과 교과 과정 개편에 따른 잡음, 교수단과의 마찰, 나아가 여성 비하 발언 등으로 끝없는 구설에 올랐으나 그런대로 버텨왔다. 그러나 최근 하버드 내 최대 파벌을 자랑하는 인문사회과학대 교수진이 불신임 투표로 위협했고 총장의 거취를 좌우하는 이 대학 이사회도 압력을 가했다. 이처럼 기류가 심상치 않자 서머스가 자진 사임의 길을 택한 것이다.

 불과 28세에 하버드 대학 역사상 최연소 종신 교수직(경제학과)을 따냈고, 고위 경제 관료 직을 두루 거친 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는 미국 재무장관까지 지낸 서머스 총장이 전격 사임을 발표한 뒤 하버드 대학 캠퍼스에는 희비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개혁 총장 퇴진에 교수는 환영, 학생은 반발

그의 결정에 대해 그간 불만을 가져온 교수들, 특히 인문사회과학대의 많은 교수들은 잘 된 처사라며 반기고 있다. 하지만 막상 학생들 대다수는 ‘개혁적인’ 총장이 외부 압력에 의해 강제로 물러났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신문인 <하버드 크림슨>은 사설까지 게재하며 서머스 퇴임의 부당성을 알렸다. 

사실 서머스는 취임 직후부터 ‘하버드가 지금의 자만에 빠져 있어서는 안된다’면서 특유의 직설적 화법과 저돌적 업무 스타일을 보여 학생들과 교수 모두로부터 큰 반발을 받았다. 이를테면 그는 취임하자마자 재학생의 반 이상이 A학점 수혜자이고, 또 졸업생의 90% 이상이 우등 졸업생이라며 ‘학점 인플레’를 맹공격해 학생과 교수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샀다. 또 2001년 9월11일 테러 발생 직후 전통적으로 학내 ROTC(학도군사훈련단) 제도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온 학내 분위기를 비판하며, 이 제도의 재도입을 밀어붙여 파장을 일으켰다.

이처럼 시작부터 삐걱거렸던 서머스는 그 뒤 하버드 대학이 자랑하는 인기 최고의 흑인학과 교수들과 정면 충돌을 빚어 또다시 구설에 올랐다. 서머스가 이 대학의 손꼽히는 흑인학과 교수이자 명망이 자자하던 코넬 웨스트 교수를 자신의 집무실로 부른 것이 화근이었다. 웨스트 교수는 서머스 총장 취임 3년 전인 1998년 하버드 대학이 최고의 실력파 교수에게만 부여하는 ‘대학 교수’(University Professor) 직함을 가진 17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런 그에게 서머스는 정치 활동을 자제하고 연구 활동에 좀더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말이 ‘당부’이지 ‘질책’을 한 셈이다. 서머스 총장은 특히 그가 연구 시간을 할애하면서까지 만든 ‘내 문화 생활 스케치(Sketches of My Culture)'라는 힙합 CD 앨범도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면담 직후 웨스트는 총장으로부터 ‘인격적인 모욕'을 당했다며, 이듬해 하버드 대학의 경쟁 대학인 프린스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웨스트가 떠난 뒤 동료 교수인 앤서니 아피아 교수마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프린스턴으로 적을 옮기자 미국 내에서 최고로 꼽히던 하버드 대학 흑인학과는 최대 위기에 빠졌다. 

 
서머스는 지난해 3월에는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가 학내외 교수 사회에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한 학술회의에 참석해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 걸출한 여성 인재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로 ‘여성의 능력 부족’을 들며 일종의 ‘남성 우위론’을 펼쳤다. 서머스는 그 이유로 자녀가 있는 여성의 경우 가사와 연구 업무를 제대로 병행하기 힘들며, 고교의 남녀 학생을 테스트해도 과학과 수학 분야 최고 우등생 가운데는 남학생이 더 많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그의 발언을 듣고 있던 낸시 홉킨스 MIT 대학 교수를 비롯해 대여섯 명의 여성 교수들이 자리를 박차고 퇴장해버리는 바람에, 이 문제는 즉각 파문을 일으켰다. 게다가 바로 전해인 2004년 하버드 대학이 무려 34명에게 종신 교수직을 부여하면서, 여성은 고작 네명만 선정한 적이 있어 서머스 총장의 해당 발언을 이와 연계해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결국 이 발언을 문제 삼아 하버드 대학 인문사회과학 교수진은 서머스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강행해 ‘찬성 218 대 반대 185표’로 가결한 바 있다. 이후 서머스는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머스의 사임 선언을 불러온 직접적인 계기는 최근 있었던 윌리엄 커비 인문사회과학대 학장의 전격 사임 사건이었다. 이 대학 중국사 교수인 커비는 지난 2002년 서머스 총장이 80명의 학장 후보군 가운데 심혈을 기울여 골랐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최근 몇주 전 “총장과 협의 후 학장 직을 사임하기로 했다”라고 밝히자, 인문사회과학대 교수들이 즉각 들고 일어났다.

민주당 대선 후보 참모로 변신할 수도

이들은 커비가 사임한 것은 자의가 아니라 총장의 강권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급기야 이들 교수진은 지난해 3월에 이어 또 다시 서머스 총장에 대해 불신임 투표를 강행하기로 결의했다. 지난해 불신임 당시 유야무야 넘어갔던 하버드 대학 이사회도 이번에는 태도를 달리 했다. 대학 내에서 최대 파워를 자랑하는 인문사회과학대 교수진이 총장에 대해 또다시 불신임 투표안을 내자 일곱명의 사회 저명 인사로 이루어진 이사진은 교수들을 대상으로 총장의 거취 문제에 대해 직접 의견 수렴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총장이 물러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버드 대학 이사진은 그의 사임에 즈음해 발표한 성명에서 “서머스 총장은 취임 5년간 하버드에 뛰어난 비전을 심었고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라며 나름으로 그의 ‘성과’를 평가했다.

실제로 서머스가 잘못한 일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역대 하버드 대학 총장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룬 경우가 적지 않다는 평가도 많다. 이를테면 연소득 4만 달러 이하의 저소득층 출신 학생들에게 학비를 전액 면제한 것이나 재학생 교과 과정을 대폭 손질하도록 한 것을 들 수 있다. 재임 5년간 기부금을 무려 2백60억 달러나 끌어들인 것도 서머스 총장의 손꼽히는 치적이다.
 
서머스는 퇴임사에서 “오늘날 자만이야말로 하버드가 직면한 최대 위험 요인이란 점을 깊이 믿기에 지난 5년간 창조적인 방법으로 가장 야심적 목표를 이뤄보고자 노력했다”라면서 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일부 전문가들은 서머스가 풍부한 관료 경험을 통해 체득한 저돌적인 업무 스타일로 하버드를 개혁하려다, 어떨 때는 총장보다 훨씬 더 권한이 센 교수진의 반발이라는 암초에 부딪쳐 결국 좌초한 것으로 파악한다.

서머스는 오는 6월 총장 직을 그만두고 1년간 휴식을 취한 뒤 내년 여름 이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복귀할 계획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그가 고리타분한 하버드로 복귀하는 대신, 오는 2008년 민주당 대선 유력 후보의 자문역으로 변신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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