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좋고 북한 좋은 일 당국이 망쳐버렸다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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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남한의 한 대북 사업가가 남한의 골칫덩어리인 폐비닐을 북한에서 녹여 난방용 연료를 추출하는 ‘폐비닐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폐비닐 1kg으로 혼합유 1리터를 얻어내 경제

 
지난 2001년 5월9일. 북한 평안남도 력포 지구의 황량한 벌판에서 ‘역사적인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환경 오염의 주범 중 하나인  폐비닐을 녹여 난방용 연료를 추출해 내는 실험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중국 등에서 일부 성공한 사례는 있지만, 남북한 통틀어 한반도에서는 처음 시도된 실험이었다.

이곳에 연 3천 톤급 ‘폐비닐 유화처리 파일로트 공장’이 착공에 들어간 것은 보름 전인 4월24일. 2주일 만에 공장이 완공되었고, 첫날의 시험 가동에 이어, 과연 폐비닐에서 난방 연료가 추출되는지 확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원료인 폐비닐을 투입구에 넣고, 석탄 연료로 화로를 가열하기 시작했다. 4시간쯤 지났을까. 생각보다 맑은 색깔의 혼합유가 추출되기 시작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북한 근로자 한 사람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혼합유를 듬뿍 묻혔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라이터를 켰다. 순간 불꽃이 옮겨 붙었다. “불이 붙는다!” 그의 외침에 긴장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북측 사람들이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폐비닐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실험은 이미 북측 과학자들이 세 차례나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마지막 세 번째 실험은 많은 돈을 들였건만 기름은커녕 시커먼 연기만 나와 상부로부터 ‘벼락’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과학자도 기술자도 아닌 남한의 대북 사업가가 자신이 직접 시범 공장을 지어 입증해 보이겠다고 나섰으니,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측은 일단 낙원기계에서 고급 기술자 4명, 그리고 두 군데 집단 농장에서 1백40여 명의 근로자 등을 차출해 공장 짓는 것을 지원하기는 했다. 그러나 공장을 평안남도 력포 지구의 허허벌판에 짓게 한 데서도 나타나듯, 반 정도는 못 믿는 분위기였다. 폐비닐이나 폐타이어를 처리하는 유화 처리 공장은 자칫 잘못하면 대형 폭발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북측 자체 실험 중에도 사고가 나 여러 사람이 다쳤다고 한다. 이런 안전 조처 외에도 조선과학원의 전문 과학자들이 공장 가동의 전 과정을 꼼꼼히 체크했다. 추호의 거짓이나 눈속임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당시 폐비닐 100kg에서 혼합유 1백10리터가 추출되었다. 이 혼합유는 보통 난방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벙커C유보다도 상태가 좋았다. 난방용으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날에는 혼합유에서 3대 7의 비율로 휘발유와 디젤유를 분리해 내기도 했다. 휘발유는 옥탄가 73으로 농업용 양수기를 돌릴 수 있었고, 디젤유로는 트랙터를 움직일 수 있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어쨌거나 기름이 쏟아져 나왔으니, 평양이 시끄러울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평양의 고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바다에서 기름이 나야만 산유국인가, 땅 에서 기름이 나도 산유국이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이 사건은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공장을 찾을 것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해 현장 주변에 긴장감이 흐른 적도 있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당시 평안남도 력포 지구에서 있었던 그 기적 같은 일을 아는 사람은, 남한 내에서 거의 없다. 그런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을뿐더러, 남측 대북 사업가가 목숨을 걸고 추진했던 ‘폐비닐 프로젝트’는 우여곡절 끝에 역사의 무대에 서지도 못한 채 묻혀버렸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2001년의 실험을 기억하고 있었고, 남북간 협력 사업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지난해 몇 차례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북측이 여전히 그 사업에 대해 집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경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북측은 2001년 당시 추출한 혼합유와 휘발유, 디젤유 등을 여전히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또한 력포 지구 공장은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된 고도의 보안 시설로 분류되어 있었다.

남측과 사업 추진이 이루어지지 않자 북에서는 한때 자체 기술자들로 력포 공장을 가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몇 가지 핵심 기술이 미처 전수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2001년과 같은 결과는 얻지 못했다.

북한, 지금도 ‘폐비닐 프로젝트’에 집념 보여

5년 전 일을 다시 끄집어내게 된 것은 바로 올해 발생한 두 사건 때문이다. 지난 1월 김정일 위원장 방중을 계기로 드러난 북중 협력의 실상이 준 충격이 바로 그 첫 번째 사건이다. 그리고 4월에서 6월로 미루어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의선 방북 시도는 그에 대비되는 두 번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즉 중국과 한국의 대북 접근 방식의 차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 사례들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북한의 요구와 필요에 기반한 중국식 접근 방식과 북한보다는 남한의 필요를 우선시 해온 남한식 접근 방식의 차이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북·중 협력이 본격화한 것은, 2004년 5월 김정일 위원장의 베이징 방문 이후부터이다. 중국은 북한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경공업이나 유통·건설·자원 개발 분야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갔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난해 후진타오 주석의 방북 때와 같이 대규모 지원 약속도 서슴지 않았다. 그 결과 단 2년 만에 지난 2006년 6월부터, 6년간이나 지속돼온 남북 협력을 훨씬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사실 지난 6년간 진행해온 남북 협력 사업들 중 북한이 마음으로부터 흔쾌하게 받아들인 사업이 과연 얼마나 될까 따져보면 회의적이다. 경의선이나 경원선 같은 철도 도로 연결 사업,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 등은 북의 필요보다는 남쪽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추동된 사업들이다. 그러다 보니 따로 선물을 주어야 했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본질적 협력’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의선 방북 프로젝트 역시 근본적으로는 같은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북이 기댈 곳이 남한밖에 없다면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북한 내부를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중국이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미시적 접근 방법으로 저변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측에 대한 수요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중국의 등장과 함께 남한의 일방주의적인 대북 접근 방식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편하게 수용하고 북측도 좋다고 하는 정책 아이디어를 개발합시다.” 이종석 통일부장관이 지난 2월28일 통일부 창립 37주년 기념식에서 했다는 이 말은 그런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했다. 그의 말과 함께 불현듯   5년 전 북의 한 지역에서 시도되었던 ‘남북 상생의 프로젝트’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권오홍 사장(46). 1980년대 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서 최초로 대공산권 및 북한 교역 채널을 개척했고, 그 뒤 20여 년 동안 남북 관계의 주요 현장을 지켜온 사람이다. 지난 2001년 당시 그는 (주)시스젠이라는 종합 정보통신(IT) 업체를 이끌고 대북 사업에 깊이 참여했다. 요즘은 정부의 사이트 차단 조처로 접근이 어렵지만, 북한 공식 인터넷으로 알려진 조선인포뱅크 사이트(dprkorea.com)를 현재와 같은 세련된 체제로 개편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폐비닐 프로젝트’는 그에게 여전히 안타까움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즈음에 겪어야 했던 마음의 고초 때문인지, 선뜻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사업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북측과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왜 그 뒤 추진되지 않았는지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남한의 일방주의적 북한 접근 문제 많아

어렵게 입을 연 그의 말을 종합하면, 폐비닐 프로젝트는 그 사업의 획기적인 내용과 의미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가시밭길을 걸을 운명이었다. 발단은 그 바로 한 해 전인 2000년 7월, 태양 에너지 개발 문제를 인연으로 북한 에너지 문제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로 IT 분야의 대북 사업을 추진해온 그에게 어느 날, 태양 에너지와 관련해 북측이 해외에 연구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대북 사업 초기부터 ‘북한 문제는 에너지 문제’라는 소신 속에 관련 분야의 기술을 축적해온 그였기에 즉석에서 중동과 유럽 등의 관련 기술 현황이나 북한 현실에 적용 가능한 방향 등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이것이 인연이 되어 2000년 12월 북측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북측과 ‘조선 태양 에네르기 기술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돌아오자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에너지 협력 문제는 민감한 주제였다. 통일부에서는 아예 협력 사업으로 접수하는 것조차 회피했다. 군사용이 아닌 일반 서민들의 겨울 난방용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북 사업에서는 신뢰가 중요하다. 에너지 문제로 북측과 사업 물꼬를 튼 상태에서 뚜렷한 명분 없이 방향을 전환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즉 겨울 난방용 에너지가 절실하게 필요한 북의 수요를 감안하면서도 남측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찾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폐비닐 프로젝트’가 떠오르게 됐다.

농촌에서 비닐하우스나 밭농사용으로 쓰이다가 버려진 폐비닐 문제의 심각성은 굳이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농촌을 끼고 있는 지방자치체들은 ‘폐비닐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01년 당시 자원재생공사 창고에만 폐비닐이 약 20만 톤 쌓여 있었는데, 4년이 지난 2005년 9월 말에는 41만 톤으로 늘어났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것까지 합치면 폐비닐 70만 톤이 처리 불능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여기에 매년 신규 발생분  9만 톤 중 한국환경자원공사(옛 자원재생공사)가 2만5천 톤을 재생 처리한다 해도, 6만~7만 톤이 속수무책으로 쌓여간다.

농촌에 방치된 폐비닐은 그 자체가 심각한 환경 오염 물질이다. 땅에 파묻으면 미생물이 숨을 쉴 수 없어 땅이 죽어버리고, 태우면 인체에 유해한 다이옥신이 발생한다.

남한에서는 이미 골칫덩어리 수준을 넘어 대표적인 환경 문제로 대두한 폐비닐과 폐타이어를 들여다가 북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겨울 난방용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다면, 남쪽은 환경 문제를 해결해서 좋고 북쪽은 겨울철 난방 문제를 해결해서 좋은, 그야말로 누이좋고 매부 좋은 ‘환상적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북한 주민 겨울 난방할 만큼 추출 가능

그가 구상한 사업 계획을 토대로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바람이 꿈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그는 남쪽 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북한에 연 10만 톤의 폐비닐 처리 공장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 폐비닐 1kg을 용융 분해할 경우, 난방용으로 손색이 없는 혼합유 1ℓ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10만 톤이면 1억ℓ로, 이는 북한 전체 3백만 가구(약 2천2백만명)에 약 33ℓ 씩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겨울나기에 큰 어려움이 없는 수준인 것이다.

이처럼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는 데 비해, 공장을 짓는 데 드는 비용은 상대적으로 무척 저렴하다. 전자동으로 할 경우 약 3천만 달러(약 3백억원), 수동식으로 할 경우에는 7백만 달러(70억원)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환경자원공사에서 폐비닐 재처리를 위해 한해 몇 십억원씩 쏟아 붓고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한 것에 비하면 많은 비용이라 할 수 없다.

2001년 4월부터 5월. 두 달 동안 권사장은 이 일에 거의 미쳐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다. 10년이 넘게 전세계의 유화 처리 기술 현황을 추적해왔고, 북한 현실에 가장 적합한 설계를 만드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중국 각지와 한국 등에서 구입한 70여 톤의 공장 설비와 함께 평양으로 날아갔고 자신의 확신대로 폐비닐에서 기름을 추출해 보일 수 있었다.

당시 북측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험가동의 허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우선 공장 가동 자체를 권사장의 설명에 따라 북한 기술자들이 직접 했고, 원료를 북한에서 발생한 저급 ‘파비닐’로 바꿔 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북한 과학자들도 자존심을 꺾고 권사장의 기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경 오염에 대해 남한 못지않게 예민하고 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자존심 강한 북한이 남한의 환경 쓰레기인 폐비닐을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업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의지는 바로 2001년 5월21일 북한 국토환경보호성과 무역성, 그리고 북측 사업 파트너였던 장수합영회사 등이 발행한 확인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다. 즉 남측의 ‘파비닐 20만 톤을 1차로 수입하여 소각 처리하도록 협의하였고(장수합영회사) 이를 승인(국토환경성과 무역성)하였음을 확인한다’고 한 것이다. 북측은 또한 황해도 송림 인근 지역에 공장 부지까지 마련해놓고 남측 당국의 사업 승인이 떨어지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이 두 번째 프로젝트 역시 당국의 문턱을 넘지 못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태양 에너지 문제 때 당국과 발생한 불화 때문이었는지, 폐비닐 프로젝트 역시 검토 대상에 오르지도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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