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성전’에 오른 포르노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0.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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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만에 개봉하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감각의 제국>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감각의 제국>사이트(http://sense.preview.co.kr)에는 ‘이 영화를 포르노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이 올라 있다. 답변은 ‘그렇다 7%, 그렇지 않다92%’. 만약 질문을 조금 바꾸어 ‘이렇게 성 표현이 노골적인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오’라는 답이 90%를 너끈히 넘어설 것이다.

 관객 대부분이 이처럼 야한 영화를 본 적이 없으면서도 포르노라고 부르는 데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개봉판이 원작에서 16분 가량 잘려 나간 것이라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이미 이 작품이 ‘예술의 성전’에 모셔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설’이 아닌 ‘예술’ 이라는 딱지가, 표현의 자유와 통념이 부딪칠 때 그를 수용하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진 이라면 이런 현상 또한 그다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감각의 제국>(1976년)이 4월1일 개봉된다. 제작된 지 24년 만이다. 이미 당대성을 잃어버렸음직한 세월이지만, 영화사가 ‘알아서’ 16분여를 잘라내 말썽의 소지를 없앤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5년 법정 공방 뒤 1983년에야 비로소 상영
  영화는 1936년 일본에서 일어나 ‘아베사다’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아베 사다라는 여인이 남자를 교살하고, 성기를 잘라 몸에 지닌 채 나흘 동안 거리를 배회하다가 경찰에 잡힌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다. 얼개는 성에 과민한 한 여인과, 그의 가학적인 행위를 방조하고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서 표현에 관대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에서도 당시 법정 공방은 우리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오시마는 1977년 기소된 후 1982년 도쿄 도등 재판소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5년 동안 지루한 법정 싸움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1977년 1차 공판에서 도쿄 지검은 “영화의 부정과 실제 생활의 패륜을 두고 볼 수 없다”라며 그를 몰아붙였다. 오시마는, 외설은 법관의 머리 속에나 있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당시 출판사는 영화 사진이 실린 시나리오집을 출간했다가 감독과 함께 날벼락을 맞았다. 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변론을 발표해 이를 묶은 책만도 여러 권이다. 1977년 칸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을 때 일본인들이 칸으로 몰려갔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회자된다. 일본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듬해인 1983년까지 묶여 있어야 했다.

 영화는 강도가 점증하기는 하지만, 자루할 정도로 정사 장면이 반복된다. 작품에 관한 곁다리 정보 없이, 평론가들이 부여하는 의미를 수긍하기는 쉽지 않다. 거칠게 말해 오시마의 작품이기에 이러저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감각의 제국>은 그의 에너지가 내리막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까지 폄하되는 실정이다. 이듬해 만들어진 <열정의 제국>이 칸에서 감독상을 받음으로써 국제적인 거장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상품성 높은 작가에게 눈을 돌린 외국의 제작자와 손을 잡음으로써 쉽게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를 작가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은 오히려<감각의 제국>이전 영화들이다. 오시마는 이후에도 외국 자본인 영국 제작자와 손잡고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년)를 만들었다.

 외국의 평론가들은 초 ․ 중기 작품에서 자신의 신념을 영화로 녹여낸 사상가의 면모를 발견해내곤 한다. 그가 ‘일본의 고다르’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청춘 잔혹 이야기>(1960년) <태양의 묘지>(1960년) <일본의 밤과 안개>(1960년) <백주의 살인마>(1966년) <교사형>(1968년)등 이 자주 회자되는 목록이다.

 그의 작품이 ‘경향 영화’로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시마 나기사는 전학련 활동가 출신이다. 영화 평론가 홍성남씨에 따르면, 신좌파가 활발히 움직이던 1959년 말~1960년 대 초 그는 이미 영화사 직원이 되었지만, 좌파의 문제 의식에 깊게 공명하고 있음을 작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출세작인 <청춘 잔혹 이야기>에는 당시 상황이 원경으로 잡힌다. 거리에는 학생들이 한 ․ 안보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고, 여기에 한국의 4 ․ 19 소식이 곁들인다. 주인공은 ‘쓰쓰모다세(美人局:여자를 딴 남자와 통정케 하고 그것을 미끼로 남자에게 돈을 울궈내는 사기 행위)’로 연명하는 젊은 남녀다. 위선적이고 비겁한 기성 세대, 그들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한 뒤 은둔자로 살아가는 구좌파, 여기에 기성 세대를 답습하지 않으려 하나 ‘쓰쓰모다세’로 연명해야 할 만큼 나약하기 짝이 없는 젊음의 초상을 ‘청춘 잔혹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끄집어낸 것이다.

 그의 문제 의식이 더욱 솔직하게 드러난 작품은 운동권 출신 커플의 결혼식을 배경으로 삼은<일본의 밤과 안개>이다. 오시마는 10년 전 프락치 혐의를 받은 노동자를 풀어주었다는 이유로 지도부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후 자살한 동료의 죽음을 들춤으로써 일본의 군국주의뿐 아니라 ‘제도화한 좌파’의 관료성과 폭력성을 두루 고발했다. 이 영화는 개봉 나흘 만에 창고에 처박혀야 했던 운 나쁜 작품이기도 하다. 마침 사회당 당수가 극우 소년의 손에 테러를 당하자 일본의 메이저 제작사인 쇼치쿠는 부랴부랴 간판을 내렸고, 이에 격분한 오시마는 영화사를 따로 차려 독립 작가의 길을 걸었다.
魯順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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