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남북회담 ‘실세’
  • 한종호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3.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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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급회담 대표로 발탁된 이동복씨,감각 탁월 ‘강경’비난도

 李東馥씨(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보.57)가 결국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합류하게 됐다.  그동안 남북회담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온 그가 고위급회담 대표로 중용되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92년 10월 국회에서 터진 ‘훈련 무시 사건’이나 최근 단행된 안기부 특보실 축소를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이 그의 정치적 몰락을 점쳤기 때문이다.  회담 대표 복귀를 통해 이특보는 ‘건재’를 증명해 보인 셈이다.    

북한에 대한 정책 대립의 뿌리를 파고들어가다 보면 결국은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라는 정세판단 문제에 도달한다.  전자의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온건파로, 후자의 입장을 강경파로 분류한다.  이 특보를 강경파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대북한정책을 놓고 정부 내에서 일관되게 강경론을 대변해 온 인물이다.  따라서 북한은 변하고 있고 또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새 정부의 통일팀에게 그는 아마도 친근감을 주는 인물이 아닐 것이다.  이인모씨 송환문제가 나왔을 때도 그는 “나는 북한을 잘 안다.  북한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를 보내는 것은 바보짓이다”라는 논리로 끝까지 반대했다고 한다.

73년부터 남북대화와 인연
 이특보만큼 북한을 잘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재기를 가능케 한 원동력은 바로 그같은 남다른 능력이라는 점에도 별다른 이견이 없다.  통일원의 한 중간 간부는 “이동복씨만큼 남북관계의 판세를 잘 읽고 북한의 공세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대북정책 감각은 오랜 현장 경험에서 나오는 것 같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경기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니던 중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71년 <한국일보>외신부 차장을 끝으로 기자 생활을 마쳤다.  73년 그는 당시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부대표로 일한<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의 추천으로 남북조절위 대변인으로 남북대화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0년간 그는 남북대화 업무를 도맡아왔다. 

 70년대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특보(당시는 1급)로 일할 때는 여의도에 초대형 한국전쟁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당시 안기부의 해외정보망을 통해 수집한 전쟁 관련 자료들은 지금 육군사관학교 軍史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10.26으로 김재규씨가 체포된 뒤 그도 합수부의 조사를 받았지만 워낙 정치색 없이 대북관계 실무에만 전념해온 관계로 별 탈없이 풀려났다고 한다.  중앙정보부 남북대화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를 약화시키는 차원에서 대화사무국(현 남북회담사무국)을 통일원으로 편입시키자 초대 국장을 맡았다.  그러나 당시 이범석 국토통일원장관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그는 보따리를 싸서 나와버렸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그를 찾아온 사람은 당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었다.  이회장은 영어를 잘하고 기획력과 추진력이 강한 이씨를 그룹회장 고문으로 앉혔다.  이후 그는 삼성항공 부사장, 삼성의료기 사장을 역임했다.  그러난 기업인으로 지내는 동안에도 남북회담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삼성에 있으면서도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 쪽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88년 13대 총선에서 서초을구에 출마했다가 김덕룡 후보에게 패한 이씨는 기자시절부터 잘알고 지내던 김재순 당시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안기부장 특보를 맡으면서 다시 꿈에 그리던 남북회담 일을 시작했다.  그의 직책으로 민족통일연구원장, 통일원 차관, 안기부장 특보가 거론됐는데 처음에는 민족통일연구원장으로 내정됐다가 막판에 안기부장 특보로 낙착됐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씨는 본격적으로 대북정책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특보실은 40여 명으로 인원이 확대되어 대북전략의 중추역할을 하게 됐다. 

 그러나 이씨는 지지자보다 훨씬 많은 반대자를 갖고 있다.  이씨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가장 문제삼는 것은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적대적 힘의 우위노선을 펴는 ’그의 시각이다.  기독교권에서 진보적 통일운동을 하는 한 목사는 “이씨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우리에게 ”당신들은 성직자이기 때문에 남북대화가 화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북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씨야말로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자이다“라고 주장했다.

타격 준 훈령 무시 사건
 그의 행동 양식을 문제삼는 시각도 있다.  안기부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 한 인사는 “그는 어디서나 자기가 아니면 대북정책이 안 굴러간다고 큰소리친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92년 10월 22일 국회 외무통일위 국정감사에서 이부영의원(민주)이 폭로한 이른바 훈령 무시 사건이다.  당시 공개된 사건 개요는 이렇다.  정부는 그 해 9월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총리회담중 반드시 노부모 고향방문단 교환이 성사되도록 평양에 가있는 회담 대표단에 ‘동진호 선원 송환 요구’를 철회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대표는 이 훈령을 무시하고 대표단장인 정원식 총리 및 다른 대표들에게 이를 전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주도한 협상에서 선원 송환 요구를 끝까지 주장해 결국 회담을 결렬시켰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평양으로 보내는 훈령은 암호전문으로 만들어지는데 이는 수행한 안기부 요원만이 해독할 수 있다.  해독된 훈령은 메모형식으로 작성되어 협상 테이블에 앉은 회담대표의 호주머니에 넣어진다.  그런데 그 시점이 회담이 이미 결판이 나버렸거나 입장을 번복하기 어려운 상황일 경우에는 메모지에 씌어있는 훈령을 펴보지도 못한 채 의자에서 일어나야 한다.  실제로 이같은 ‘기술적 이유’로 인한 문제들이 간혹 생겨난다고 한다. 

 당시 이대표가 청와대의 훈령을 무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기술적 이유로 인한 결과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단, 인도주의에 따른 이산가족 교환이라는 낭만적대북전략을 ‘미필적 고의’로 거부하고 나섰을 가능성은 있다. 

 당시 이대표의 행동은 정부내에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야나 야당측에서는 그를 ‘남북대화를 좌초시킨 장본인’이라고 낙인찍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 정부 내에서는 고위급호담 대표 선임과정에서 이특보를 포함시킬 것인지를 놓고 심각한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고위 관리는 “이번 대표단이 약체라는 지적이 있었다.  황총리는 남북회담이 처음이고 송영대 통일원 차관도 적십자회담 전문이지 정치. 군사쪽은 아무래도 약하다.  그래서 실무진이 이동복씨를 강력히 밀었고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한 황총리가 이특보를 회담대표에 포함시킨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반대의 이야기도 들린다.  정부 사정에 밝은 한 교수는 “청와대 개혁팀이 그를 회담대표에 포함시킨 이유는 그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밖으로 끌어낸 뒤 흠집내기로 그를 완전히 패배시키려는 의도에서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표 복귀가 그에게는 새로운 시련의 서막이 될 수도 있다. 

 이특보를 잘 아는 한 학자는 “이동복씨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이론가인 동시에 탁월한 테크너크랫이라는 그의 이중성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씨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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