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꾸리는 관광열차
  • 부다페스트·김성진 통신원 ()
  • 승인 1992.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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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장승무원 등 '현장 학습' 헝가리에서 44년째

 

어린이에게는 꿈을, 어른에게는 동심의 세계를! 어린이 역장, 어린이 매표원 어린이 승무원 등 모든 것을 어린이들이 꾸려가는 파이오니어열차. 꿈과 희망의 열차 '파이오니어 호'가 내일을 향해 달린다.

파이오니어가 객차 2량을 끌고 달리는 곳은 부다페스트 근교 원시림. 전장 11.2㎞. 통과역 7개. 소요시간 45분. 최고속도 20㎞. 언뜻 초라해 보이는 이 '꿈의 열차'는 지난 1948년 선보인 이래 44년간 한번도 운행을 멈추지 않았다. 푸른색 제복에 빨간색 견장, 그리고 연초록 넥타이를 맨 어린이 승무원의 모습이 역의 곳곳에 보인다. 종착지이자 출발지인 노르마파역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이 매표소. 환한 웃음으로 손님에게 설명을 해주며 표를 파는 일디코양(14)의 모습이 보인다. 이곳에서 일한 지 2년째 되는 고참. 여객 전무를 거쳐 현재 이 일을 맡고 있는 그는 장래 여객기 스튜어디스가 되는 것이 꿈이다. 관광객들의 영어나 독일어 질문에 시원히 대답해 주지 못할 때가 안타깝다는 그는 올해를 끝으로 정든 이곳 생활을 마친다.

어린이 열차 수우원에는 국민학교(8년제) 상급생인 12~14세 어린이가 지원할 수 있다. 현재 승무원은 6백명. 일디코양은 학교 수업에 지장 없이 한달에 이틀 정도 근무하며 하루 25명이 함께 일한다고 밝혔다. 물론 승무원 근무는 수업과 동일시되며 봉급은 받지 않으나 음식 등 근무와 관련한 편의를 제공받는다.

매표구를 돌아 역무실로 들어가니 어린이 직원들이 곧 도착할 열차 문제로 다른 역들과 통화하고 있다. 헤르마니아 하슨양(14)은 지방도시인 에르드에서 사는데 이곳이 좋아 한달에 두번씩은 새벽잠을 설치며 부다페스트까지 '출근'하고 있다. 옆에서는 철도공무원인 버라시 여사가 이들을 돕고 있다. 헝가리 국립철도(MAV)에 입사했다가 어린이가 좋아 이곳 근무를 자원했다 한다.

역사를 나와 철길을 따라 50m쯤 걸어가면 선로 변경실이 2층 건물에 자리잡고 있다. 철제 간이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말쑥한 제복차림 역무원이 다른 역무원과 통화하면서 선로변경작업을 하고 있었다. 페터 베르제니군(12). 그는 '입사'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신참이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이일을 맡았다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한다"면서 세상 공부를 많이 했다고 제법 어른스럽게 웃었다. 오늘 근무는 9시부터 시작했는데 3시반에 끝난다고 했다.

낮 12시. 출발시간 5분 전이 되자 여객차장 미클로시군(12)은 주변을 살피며 아직 타지 않은 승객이 있는지 확인한다. 몸집이 작은 그는 국민학교 저학년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맡은 일을 군말없이 정성스럽게 처리하고 있다. 마침 노인 승객들이 플랫폼으로 나오자 그들의 어깨를 부축하며 열차까지 안내했다.

 

종착연엔 철도 박물관도

12시5분. 열차는 경적을 울리며 정시에 출발했다. 이곳 역장대리인 헤르마니아양이 나와 기관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승객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었다. 신참차장 미클로시군에게도 수고하라고 큰소리로 인사했다.

중간역인 야노시헤지에 도착했을 때 런던에서 온 관광객들이 길을 묻자 미클로시군은 진땀을 뺐다. 그는 "영어를 배운 지 얼마되지 않아 의사소통이 너무 어렵다"면서 열심히 공부해 외국인에게 훌륭한 서비스를 하겠다고 밝힌다. 그는 방과후에 영어 개인교습소를 찾아 공부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본래 어린이 열차는 1948년 교통부장관이던 에르너 게러(후에 공산당서기장 역임)가 주도해 개설했다. 당시 여론은 설치 장소를 놓고 다뉴브강변, 부다페스트 시내 중심가 그리고 교외 산악지역으로 삼분되었으나 어린이의 탐구심을 고취시킨다는 취지에서 현재의 숲지대로 결정했다. 파이오니어는 그 이름에 걸맞게 원시림이 울창한 4개 산악지대를 통과한다. 그 가운데 1백20m의터널이 당시 기술수준으로는 가장 난공사였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종착역에는 어린이 승객을 위한 철도박물관이 있다. 안에는 초창기부터 현재까지의 헝가리 철도현황을 한눈으로 볼 수 있게끔 사진과 모형기관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역사 옆에는 1948년에 처음으로 이 선로를 달린 증기기관차도 있다. 그때 이 열차에 탑승했던 어린이는 이제 환갑이 가까워온다.

어른 승객들은 조금씩은 서운한 표정으로 어린이 승무원들에게 깍듯이 작별인사를 했다. 그들은 어린이 승무원의 보살핌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살이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에 젖은 듯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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