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자의 새로운 시작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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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인 박노해 시인(34)이 최근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냈다. 시집 표지에 실린 그의 얼굴은 밝게 웃고 있지만, 사진 자체는 안개 속처럼 뿌옇게 처리되어 있다. 편집자의 이같은 의도는 어렵지 않게 읽힌다. 시인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간격에 대한 판단이 사진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자칭 사회주의 혁명가’인 박노해 시인의 이번 시집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집 가운데 하나로 꼽히던 《노동의 새벽》(1984)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지식인으로 하여금 선뜻 그 문을 열지 못하게 한다. 이 시집은 시집 자체로서 ‘지금·여기에서 박노해는 무엇인가’를 캐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반응이 좋아도 이상하고, 반응이 없어도 또 이상할 것이 분명한, 난감한 시점에서 독자 앞에 던져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집은 발간 한달 만에 6만부를 찍었고 그 가운데 4만부가 팔렸다. 출판인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사상 최악의 출판계 불황’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박노해인가’라는 반문이 공개적으로 발언되는 시절에, 발간 즉시 서울 대형 서점의 시집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모두 4부로 엮어진 이번 시집은 《노동의 새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급진적인 ‘노동 해방문학’이 모인 3·4부와,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이후, 그리고 구속된 뒤로 감옥에서 일어난 심경 변화를 담아낸 1·2부로 크게 대별된다. 구속 이후와 이전 사이의 격차는 매우 큰 것이어서, 그 차이는 ‘감옥 속의 노오란 민들레’와 ‘진군의 북소리’만큼이나 다르다. 그러나 민들레와 북소리는 단절되어 있지 않다. 그 둘은 시 <징역에서들 보면>의 ‘교조주위를 비판하면서도 전형적인 교조주 의자에 다름 아니었던 나’ 또는 시 <겨울나무>의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와 같은 치열한 반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난 한달 동안 출판사에 우송된 4백여통의 엽서를 보내면 이번 시집의 주요 독자층은 대학생이다. 창작과비평사 이시영 주간(시인)은 “투사 개인의 내면적인 드라마가 잘 전달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시집을 ‘깃발을 내린 깃대의 풍경’이라고 평가하는 홍사단 도산아카데미연구원 간사 이권우씨는 “아직도 가야 할 곳이 있다고 믿는 80년대 세대가 이 시집을 읽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영씨는 이 시집의 1·2부만을, 또는 3·4부만을 편애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시읽기가 아니라면서 “이 시집은 시인의 전향이 아니라 역사를 보는 시각의 심화, 확대를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이 시집 발문에서 국내외 정치 여건과 후기산업사회의 비인간화를 강조하면서, 박노해와 같은 이상주의 전망은 주변적 사유로 밀려날 것이라고 분석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진보주의에 대한 꿈은 더욱 절실하고 그것의 미덕이 존중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깃발을 내린 깃대는 밤의 존재이지만, 그래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만큼 아침은 가까운 것이라고 박노해의 옥중시집 《참된 시작》은 말하는 듯하다.
李文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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