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는 ‘民主主義의 꽃’ 지방자치 시대가 열린다
  • 박준웅 편집위원대리 ()
  • 승인 1990.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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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곳곳에서 열기 조기 점화 … 공정선거가 ‘정착’의 열쇠

 90년은 ‘지방화시대’의 元年으로 기록될 것이다. 새해들어 분출되는 민주화의 국민적 욕구와 고조되는 지역자치의 주민여망을 반영하듯 전국 곳곳에서 지방자치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 중앙집권문화만이 압도적이었던 우리 정치사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구랍 12월19일 정기국회에서 지방자치제법안이 통과됨으로써 지역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방자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5 · 16 쿠데타로 중단된 지 29년만에 개막되는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지망생들은 벌써부터 각종 모임을 통해 얼굴을 알리고 기반다지기에 저마다 열을 올리고 있다. 다방가, 요식업소, 마을회관 등에서도 출마여부 및 당선가능성을 놓고 자천타천의 여러 인사들 이름이 들먹여지고 있다. 이같은 열기는 구정인 1월27일이 지나고 2월 정기국회에서 지자제 관련 선거법안이 확정되면서부터 더욱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연말연시 때맞춰 ‘얼굴 알리기’ 부산
 대구시의 尹碩遠(52)씨는 “연말연시에 인사장이나 캘린더를 보내는 사람이 부쩍 늘었고 동문회나 친목회 등 사조직을 가동하는 인사들도 눈에 띈다”면서 “최근에는 밤12시가 넘었는데도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대로 가다가 자칫 과열 · 타락선거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전남 순천시의 韓利春(44)씨는 “연말들어서부터 자천타천의 인사들이 시의원후보로 거명되기 시작했다”며 구정이 지나면 대충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내다봤다.

 정치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데다 의중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충청도 기질’에 배어 있는 충북 괴산군의 증평읍에도 지방자치의 움직임은 ‘微動’으로나마 다가와 있다. 증평읍은 시 승격을 숙원으로 삼고 있어 상수도 · 교육 등 지역사업을 속시원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ㄱ씨, 또다른 ㄱ씨, ㄹ씨가 나서야 한다는 얘기들이 다방가의 큰 화제이다.

 이처럼 정치지망생들의 바쁜 행보에 맞춰 행정관서에서는 지자제에 대비, 언제라도 실시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고 있다. 시 · 도 · 군 등 단위단체별로 ‘자치준비기획단’을 구성, 의회사무실의 마련 및 조례나 규칙 등의 법규개정 등을 마무리했고 선거비용과 의회운영에 관한 예산도 확보해놓았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날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던 태평로의 시민회관별관을 시의회 의사당으로 정해놓고 이에 필요한 여러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자유당시대와 민주당을 거쳐 제3공화국 시절 유신초기까지 민의의 산실로서 숱한 영욕을 함께 했던 옛 의사당이 이제 지자제시대의 개막과 함께 또다시 시민민주주의의 전당으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됐다.

 지방자치란 무엇인가? 일정한 지역을 기초로 하는 단체(지방자치단체)가 그 지역의 일(지방행정)을 주민들이 낸 세금으로 주민의 의사와 책임(지방정치) 아래 선출한 대표자(자방의회 의원)를 통해 자율처리하는 자치행정제도로 요약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지역일을 그 지역 주민 스스로 결정, 처리하는 제도인 것이다. 지방자치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하며 ‘풀뿌리 민주주의’, ‘민주주의 훈련장’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인적자원의 부족이나 지방재정의 취약점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미 52년부터61년까지 지방자치를 실시한 경험을 갖고 있다.

 4 · 19 이후 민주당정권 때는 시 · 도의회와 시 · 읍 · 면의회 의원은 물론 시장 · 도지사까지도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했었다. 그리고는 61년5월16일 군사쿠데타의 계엄령 포고문에 의해 제3대 지방의회가 해산됨으로써 힘겹게 솟아나던 지방자치의 싹이 군화에 짓밟혀졌던 것.

 새롭게 시작되는 지자제에는 어떤 인물이 바람직할까. 현재 지역마다 거론되는 인물들은 각 정당의 당료들. 전 · 현직 국회의원들의 보좌관이나 비서진, 정치에 뜻을 두어온 소장 실업인, 과거 통일주체대의원이나 대통령선거인단 출신, 단위조합장, 면장 · 예비군중대장 등 지역 유지, 전 · 현직 공직자, 각종 사회단체 인사, 재야운동권 인사들이다.

 이들 중에는 나름대로 오래전부터 지역연고에 바탕을 두어 공을 들여온 사람도 많다. 지역 주민들의 애경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틈틈이 인사장이나 유인물을 돌려 지면을 넓히고 동창회 · 친목회 · 사회사업단체 등을 통해 대인관계를 굳히는 등 조직을 다져온 사람도 있다.

“정치철새는 이제 그만” 이구동성
 그러나 이들 중 과거 독재정권에 빌붙어 사리사욕을 꾀했거나 명예욕 또는 권력지향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자제를 이용하려는 해바라기성 인사는 배제되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의원직을 악용하여 시 · 군민을 괴롭혀 온 사람이나 때만 되면 연고지에 얼굴을 들이미는 ‘정치철새’들도 새로운 지방화시대에는 걸러져야 한다는 중론도 일고 있다.
 한 여론조사(아주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결과는 지방의회 의원의 자격요건으로 지역사회에의 기여도 68.1%, 인품 16.0%, 정치경험 8.1%, 소속정당 4.0%, 학력 및 기타 각각 1.4%를 꼽고 있다.

 이 결과는 후보자의 소속정당이나 정치경험 · 학력 등을 중시하던 종래의 고정관념에서 크게 벗어나 지역사회에 앞장서서 일해왔거나,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일꾼을 뽑겠다는 새로운 의지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지방의회의 지망생중에는 비교적 젊은 계층이 나서려 하고 있고 여성도 뜻을 펴고 있어 주목된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했다는 李모(36)씨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온 서울 도봉구에서 출마의사를 굳히고 “중고등학교의 동문회 조직과 기독교청년회 친지들과 접촉을 계속하고 있다”며 자신을 알리는 유인물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정부시의 明正蘭양은 “각자 연고를 찾아 몇몇 사람들이 조직을 다지고 있는 것 같다”면서 “여성으로서 지역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시의원에 나설 것을 생각중”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문제가 지방자치의 성패에 달려 있다면 지자제의 성공여부는 그 선거의 공정성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방자치에 있어 선거는 지방자치단체의 살림을 맡을 대표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절차이므로 공정하고 적법하게 치러져야만 지방주민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지자제 선거가 지난해 실시된 동해시나 영등포을구 국회의원 재선거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우려의 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충남 ㄱ군에서 지자제 의원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ㄱ(35)씨는 “우리 고장은 전통적으로 먹어야 찍어주는 곳으로 돼 있어 참신한 인물이나 뚜렷한 후보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곳”이라며 “우선 당장엔 물질로 통하는 선거 풍토와 싸워야 할 판”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지자제 선거와 관련해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정당추천제가 어떻게 운용되느냐는 점이다. 의원들이 소속정당의 이해관계에 얽매어 자칫 중앙정치 풍토의 축소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공천권이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창구로 악용되거나 당리당략으로 흐를 경우 지역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참신하고 유능한 인사가 배제되어 오히려 지역사회의 분열과 갈등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많다.

 이와 함께 지난번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처럼 지역당의 현상이 더욱 심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벌써부터 일부지역에서는 이러한 지역편향의 바람이 일고 있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대구의 尹碩遠씨는 “여당세가 가장 강한 이곳에서는 친여권의 인사들이 민정당 공천만 받으면 당선된다는 판단 아래 움직이고 있고 공천 탈락자들은 친여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전남 순천시의 韓利春씨는 “호남지역 · 영남지역 · 호서지역이 지난 대선 · 총선 때 지역당 구조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방의회에까지 그런 바람이 몰아친다면 지방자치의 의미는 사라지고 또다시 중앙정치권의 시녀역할밖에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지방자치제가 민주정치의 훈련장이니 만큼 지자제의 수준에서부터 정당정치가 제대로 뿌리내려야 하며 ‘지역성’은 연합공천제와 중선거구제를 통해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자치의식 성숙이 가장 큰 과제
 지자제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한 전제조건의 하나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찰중립화이다. 경찰력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할 때 경찰조직은 마땅히 정치로부터 독립하여 중앙행정 권력의 ‘전위대’라는 오명을 벗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여야는 경찰중립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으나, 야3당의 단일안과 정부 · 여당안이 세부사항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정기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경찰중립화 법안은 올 2월의 임시국회로 넘겨졌고, 지방의회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이 법안을 둘러싼 여야의 격돌이 예상된다. 경찰중립화의 당위론은 인정하지만 행정부의 견제장치를 마련하려는 정부 · 여당의 입장과 행정부의 입김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제도적 정치를 마련하려는 야당의 의도가 상충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자치제도 지자제가 바람직하게 운영되기 위한 필수조건 중의 하나다. 교육자치제를 규정한 개정 교육법안은 이미 지난 88년 4월에 문교부안으로 국회를 통과해 지방자치제 실시와 더불어 시 · 군 · 구 단위부터 단계적으로 실시키로 되어 있으나, 2월 임시국회에서 세부적인 손질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다.

 이 자치제안은 지방의회와 별도로 시 · 도 교육위원회를 두도록 되어있는데, 이 교육자치제가 실시되면 문교부에 집중돼 있는 권한이 지방단위 교육위원회에 분산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각 단위 학교장의 재량권도 커진다.

 앞으로 지방자치제의 정착에는 넘겨야 할 고비가 많다. 혈연이나 지연 · 학연 등 지역계층간의 대립, 중앙행정부와 지방 사이의 불협화, 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의 갈등, 지역내 이익집단이나 특정인들 사이의 불화 등 당장 예상되는 여러 문제점들을 극복해야 한다. 당면한 민주화의 과제 중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며 실시 그 자체만으로도 민주화의 상징적 의미로 인식되어왔던 지방자치가 이제 눈앞에 다가와 있다. 지자제가 뿌리를 내리고 민주화의 꽃을 피울 수 있는 토양은 지역 주민들의 참여와 지지일 수밖에 없다. 90년대는 온 국민의 고조된 민주화 열기 못지 않게 성숙된 자치의식과 자율의식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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