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재산 공개 . 선거 혁명
  • 김재일 차장 ()
  • 승인 199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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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판갈이 신호탄 올랐다

 정치 대변혁이 시작됐다. 두차례 재산 공개로 적지 않은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했고 또 사퇴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라 기존 정치 환경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와 함께 정치 개혁이 본격 추진되면서 결국은 정치판 자체가 새롭게 짜여질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치켜든 사정의 칼은 6개월 동안 개혁 분위기를 잡아 왔다. 그것이 개혁 1단계였다면,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는 본격적으로 제도를 개혁하는 신호탄이라고 할 만하다. 김대통령은 지금 정치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민자당은 울며 겨자 먹기로 청와대에서 마련한 ‘혁명적인’선거법 개정안의 골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새 선거법안의 골자는 한마디로 ‘돈 안드는 선거’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야당이 마련한 선거법안보다 ‘훨씬 개혁적인’ 청와대 안에 대해 민자당내 다수 의원들은 불만이 없을 수 없으나 누구도 드러내 놓고 반대할 분위기가 아니다. 명분과 여론은 현재 청와대 편이기 때문이다.

 한 민자당 당직자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야당측과 협상해야 하므로 올 정기국회에서 통과될는지는 속단할 수 없으나 곧 공청회와 텔레비전 토론을 통해 여론화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 개혁 관련 법안 중 당정이 합의한 선거법 개정안의 핵심은 영국식 선거제도를 기초로 해 ‘돈 선거’를 치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법정 선거비용을 대폭 줄일 뿐 아니라, 선거법 위반자에 대한 연좌제·쌍벌죄·당선무효 등 혹독한 벌칙조항을 포함한다. 한 민자당 당직자는 “이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은 선거에서 누렸던 여당 프리미엄을 버리겠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유권자 성향 변화 겨냥한 ‘선거 혁명’
 한 관측통은 이같은 선거 제도를 도입한다는 전제하에, 이는 광복후 처음 실시한 선거에 견줄 만한 정치 개혁 조처로서 혁신적인 변혁의 기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집권자가 여소야대 상황까지 감수할 수 있는 강력한 의지가 없는 한 시행하기가 어려운 모험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김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 민자당 소식통은 청와대가 추진하는 ‘선거 혁명’이 유권자 성향 변화를 겨냥한 전략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현재 유권자는 20~30대가 58%를 차지하는 반면 국회는 50대 중반 이후의 인사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같은 정치권 구조는 다수 유권자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할 뿐 아니라 결국 사회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고학력·연소자일수록 투표율이 낮고, 시골보다 도시의 투표율이 낮다는 것은 새로운 세대의 정서에 맞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기권하는 사람이 많은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15대 총선 때는 20~30대가 유권자의 60%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선거 혁명은 바로 이같은 추세에 맞춰 신진의 정치권 진출을 겨냥한 개혁 조처라는 것이다.

 그의 말은 곧 15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에서 새로운 인물의 충원으로 대폭적인 물갈이가 이뤄질 것임을 시사한다. 민자당의 한 당무위원은 그동안 공천 물갈이 폭이 30%였던데 비해 15대 때는 50%를 넘을 잣으로 내다봤다. 물갈이 대상이 주로 민정·공화계가 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민정·공화계가 상대적으로 돈 쓰는 선거 관행에 익숙해 있고, 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민자당의 구조가 공천 물갈이를 통해 바뀌지 않고서는 선거 혁명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인 것이다.

15대 공천 때는 신진으로 대폭 교체
 이제까지 우리나라 선거는 지방의회 의원 선거에서 대통령선거에 이르기까지 자본 대 자본의 싸움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 구민 수에 따라 현행 법정 선거 비용이 6천만~7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까지로 제한돼 있으나, 말뿐이지 실제로 수십억원이 들어간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이런 정치 풍토 아래서는 ‘이순신 장군이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 해도 돈 없이는 당선될 순 없다’는 인식이 일반화한 실정이다.

 청와대 안대로 선거법이 개정되면 기성 정치인이나 신진 정치 지망생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게 된다. 돈에 여유가 있는 기성 정치인이 돈 쓰는 것을 규제 받는다면 신진은 상대적으로 덜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큰 폭의 공천 물갈이는 개혁 차원에서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것일 뿐 아니라 권력 기반 강화를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 민주계 핵심 당직자는 “정치 개혁은 공천을 통해서 마무리될 것”이라고 말한다. 제도 자체가 변형됨에 따라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하지 않더라도 자동적으로 정치 판갈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김대통령의 정치판 뒤엎기는 의도한 대로 성공할 것인가. 대폭 물갈이 공천을 통한 정치판 새로 짜기가 실패할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법정 선거 비용이 4천만~5천만원 선으로 엄격하게 제한된다면 선거운동을 거의 못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이 후보 스스로를 알릴 기회가 현격하게 제한된다. 어차피 ‘동토 선거’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지명도가 놓은 기성 정치인이 단연 유리하다는 것이다. 현역 의원은 귀향 보고회를 통해 지역구민과 부단히 접촉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돼 있으나, 다른 사람은 ‘사전 선거 운동’조항에 걸린다는 점도 신진의 정치권 진입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더구나 민정·공화계 의원과 원외 지구당위원장들은 공천 탈락에 대비해 지역구 관리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제도가 정착한다면 모를까, 최소한 15대 선거 때는 설사 공천을 못받는다 해도 현역 의원이 훨씬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주요 정당의 공천을 받은 신진들이 공천에서 탈락한 기성 정치인보다 당선할 공산이 높다는 관측이 더 우세하다. 혁명적으로 바뀐 선거 제도하에서 정치의 흐름 자체가 바뀔 것이며, 국민의 의식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사실로 미루어 그 때쯤에는 유권자의 투표 성향 역시 혁명적으로 변하리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지명도가 높은 사람이 일단 유리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없다. 지명도가 높은 대신 약점이 많을 뿐 아니라 과거 관행에 대해 비판받을 소지가 크다. 게다가 김대통령의 인기가 지속된다고 가정할 때 이른바 인기있는 지도자의 코트 뒷자락을 잡고 당선되는 ‘코트 테일링(coat tailing)' 현상이 일 수 있다. 한 민주계 핵심 당직자는 “기성 정치인의 경우 의식을 1백80도 바꾸지 않으면 급변하는 정치 환경 속에서 생존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해 정치 환경이 기성 정치인에게 유리하게 형성되지 않을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했다.

실명제·숙정 통해 권력기반 강화
 한편 민정·공화계가 공천에서 탈락할 경우 민자당을 탈당해 제3당을 만든다고 생각해 볼  도 있다. 그러나 제3당은 정계 재편의 큰 변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신진 인사를 대폭 영입하되 과반수 의석 확보를 전제로 하여 공천이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개혁성과 당선 가능성이 함께 고려될 것이란 말이다. 이와 함께 인위적인 정계 개편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김대통령의 한 측근은 원내 안정 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돌발 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한 “그럴 가능성은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인위적인 정계 개편은 종속 변수라는 것이다. 그는 김대통령이 그런 무리수를 두지 않을 뿐더러, 그것은 정국 안정에 도움이 안된다고 말한다. 김대통령의 일부 측근은 정권 출범초 인위적인 개편을 통한 ‘개혁 신당’을 적극 구상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하면 모두 죽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인위적인 정계 개편 대신 제도 개혁과 공천을 통한 정치 판갈이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정치의 흐름이 이같은 방향으로 잡힐 경우 우선 여권 판도에 지각 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민자당의 구조를 뜯어고치기 위해 최형우 전 사무총장을 내세울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와 관련해 최 전총장이 차기 민자당 대표로 복귀할 것이라는 설이 심심치 않게 나도는 것과 함께 김종필 대표와의 갈등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정치권 물갈이와 관련해 재산 공개 진행 상황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재산 공개후 특히 민자당의 ‘문제’ 의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선 1차와 2차 재산 공개 차액이 10억원 이상인 의원이 40명 선에 가깝다. 한 민자당당직자에 따르면 그 중 5~6명 정도가 의원직 사퇴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여권 소식통은 김대통령의 결심 여하에 따라 그 폭은 훨씬 커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통령이 재산 문제로 물의를 빚은 의원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내리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말한다.

 재산 공개와 관련해 공직 사회에도 한바탕 숙정 바람이 휘몰아칠 것 같다. 그 시점은 공개된 재산에 대한 실사가 끝나는 연말쯤이 될 것이다. 관료 사회 숙정이 불가피한 이유는 공직자의 의식 개혁이야말로 개혁 전반을 주도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한 민자당 관계자는, 과거에는 각 부처마다 할당량을 정해 무자비한 방법으로 숙정했으나 이제 재산 공개를 통해 숙정의 근거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됐다고 말한다. 재산 공개에 따른 관료 사회 숙정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권력 기반 강화와 연결된다.

 이와 관련해 연말 개각설이 그럴 듯하게 떠돈다. 이미 안전기획부가 개각과 숙정에 따른 인사에 대비해 면밀한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여권 소식통에 따르면, 첫 조각에서 문제가 있었던 점을 십분 감안해 이번에는 개인 신상을 철두철미하게 파악할 뿐 아니라 재산 형성 과정에 의심이 갈 만한 사람은 철저하게 배제할 것이라고 한다.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김대통령의 측근 서석재씨를 복권해 주고 야권의 양순직 의원과 김광일 전 의원을 중용한다는 설도 있다.

 금융실명제는 정치권 물갈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실명제는 정치자금을 투명화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기존 정치 풍토와 정치인의 행태를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그래서 핵폭탄에 비유되는 경제 개혁 조처인 금융실명제 조차도 실물 경제 진단을 바탕으로 삼았다기보다는 정치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는 시각이 있다. 권력 기반 강화를 겨냥한 정치적 동기에 비중을 두었다는 것이다.

 여권 핵심부는, 민자당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민정·공화계의 배경이 막강한 자본과 정보력을 가진 재벌인데, 기득권 세력을 장악하지 않고는 정치를 개혁할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묘수가 금융실명제 실시였다. 기득권 세력을 어느 정도 약화시킨 다음 여론의 지지를 업고 본격적으로 정치 개혁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야당측도 정치환경 변화 실감
 한 민주계 인사는 김대통령의 정치 개혁에서 핵심은 문민성 강화라고 말한다. 김대통령은 과거 군사정권과의 단절을 원할 뿐 아니라 ‘최초의 문민 정부’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금의 정부가 “최초의 민간 정부”라고 언급해 ‘6.29 선언’의 기초 위에 세워진 자신의 정부가 민간 정부였다는 입장을 철회한 바 있다. 김대통령은 자신의 정권에서 군사 색채를 배제하려는 방침이어서 군 출신 의원의 상당수는 15대 공천을 통해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대신 문민성와 도덕성을 한껏 뒷받침할 수 있는 재야 인사들이 많이 충원될 전망이다.

 야당측도 정치 환경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민주당 개혁정치모임의 일원인 이석현 의원은 “앞으로 선거에서는 지역구민 애경사를 얼마나 챙기느냐가 당락을 결정하지 않고, 누가 깨끗하고 개혁적인 정치인인가가 유권자의 선택 기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야당이 참신한 인물을 공천한다면 조직의 열세를 극복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제도 개혁을 통한 정치 대변혁을 기도하고 있다. 이는 김대통령에게 크나큰 모험일 수 있다. 그는 모험 자체를 즐기는 형이다. 관측통들은 그 성패 여부가 경제적 성과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재산 공개, 금융실명제 실시, 그리고 선거 혁명은 모두 개혁 차원에서 이뤄지는 조처들이다. 이는 곧 정치판 새로 짜기를 통한 권력 기반 강화와 연결된다. 큰 틀 안에서 정치 대변혁과 정계 재편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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