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협력과 민주화로 ‘태평양’하나돼야
  • 편집국 ()
  • 승인 1991.05.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저널》초청으로 내한한 미국의 세계적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우 교수는 13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신세계질서 속의 한국’이라는 제목의 특별강연을 했다. 경제발전 과정을 전통사회→도약준비사회→도약사회→성숙사회→대중적 고소비사회 5단계로 나눈 발전단계설로 유명한 그는 현재 텍사스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날 오전에는 ‘이륙으로부터 세계무대의 단계로’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강연과 심포지엄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1965년 5월3일,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강연할 기회를 가졌다. 내게 주어진 주제는 ‘한국은 경제발전 단계상 어디에 서있는가’였다. 나는 한국이 이륙단계의 초기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6년 뒤 나는 서울에서 ‘신세계질서 속의 한국’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한국은 65년 이래 1인당 국민총생산의 연평균 성장률 7%를 유지하고, 고도 대중소비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기술적으로도 첨단에 급격히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가올 세대에 지구촌이 새로운 세계질서를 이룩하는 데 한국이 수행해야 할 중요하고도, 책임있는 역할이 있다.

 냉전이 갑작스럽게 끝나자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됐다. 그 다음엔 무엇이 있나. 어떠한 넓은 테두리 안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우리의 목표를 세워야 할까.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모스크바와 워싱턴으로부터 권력과 기술력이 점차 분산되었다는 점이다.

 40년대 말 모스크바의 관심은 개발도상국에 대한 소련의 힘과 영향력을 팽창하는 쪽으로 옮아갔다. 그러한 목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면서 모스크바는 몇가지 전술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중국과 결별하게 되고 중남미·아프리카·중동·아시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민족주의가 점점 더 크게 자라나자 실망도 커졌다. 고르바초프는 40년 전에 영국의 클레먼트 애틀리 총리가 인도의 독립을 허용해주었던 것처럼 소련과 동유럽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한편 기술적 능력의 분산은 핵무기나 다른 대량파괴의 수단을 제조하는 능력을 개발도상 지역으로 확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개도국들은 모스크바에게 걱정거리의 근원으로 변했다. 소련은 70년대 중반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라든가 유전공학·레이저 그리고 신소재 개발 같은 거대한 기술혁명에 불안을 느꼈다. 중앙 집권적인 계획경제로는 그같은 기술혁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소련은 서유럽·일본·미국 그리고 심지어는 한국과 같이 앞서가는 개발도상국에도 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많은 소련 지도자들로 하여금, 만일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소련은 고립되고 기술적 침체에 빠질 것이고, 과거에 사로잡힐 것이라는 점을 극적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배경을 놓고 나는 걸프전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교훈 가운데 두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걸프전은 신세계질서의 기초로서 유엔의 잠재력과 한계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둘째 중동에서 전후의 여러 현안이 드러남에 따라 신세계질서에서 지역주의 역할의 중요성이 점차 명백해지고 있다.

 89년 11월9일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는 12개국이 모여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기구(APEC)를 출범시켰다. 그날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이었다. 아·태 경제협력기구의 조용한 탄생이야말로 긴 역사 속에서 볼 때 베를린 장벽의 붕괴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아·태 경제협력기구는 태평양 연안국의 정부와 국민이 “국제적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며 … 선린으로서 관용을 실천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해결을 향한 최초의 집단적이고 공식적인 걸음이었다.

 인구, 경제·기술적 힘, 그리고 군사적 잠재력의 측면에서 태평양연안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공동체로서 지속될 것이다. 태평양 연안은 중국과 일본, 소련과 미국을 포함할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남아시아와 연결돼 있다.

 이제 우리는 오는 11월 서울에서 제3차 회의가 열릴 아·태 경제협력기구를 실질적 기구로 만들 수 있는 호기를 맞게 되었다. 캄보디아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며 베트남은 재능있는 국민들이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개화되고 효과적인 근대화의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남북한의 통일문제는 앞으로 남북한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소 간에는 공식적인 평화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정세로 보아 지금은 비교적 평온하며, 바야흐로 우리의 공동 현안이 될 경제·기술적 협력을 증진시키기에 적절한 시기이다.

 이 지역 여러 나라의 안보에 대한 관심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내가 각국 정부에 충고를 한다면 그것은 현재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현재의 안보체제는 어려웠던 지난 40년을 지나 좀더 나은 시대로 오는 동안 그 역할을 해냈다. 최근의 안보체제를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일반적인 위협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우리의 힘을 태평양 공동체의 안보적 기반을 뒤흔들지 않고 건설적인 수단을 만드는 데 집중할 시기이다. 동·서 유럽이 나토의 해체가 아니라 동유럽 경제의 부흥과 그밖의 다른 건설적인 계획에 힘을 집중해야 할 시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강력한 지역 조직체들에 의해 지원받는 탈냉전 시대에 유엔의 강화된 모습이 신세계질서의 근사치라고 가정해보자. 즉 부분적으로라도 유엔헌장 전문에 명시된 꿈의 현실화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한국은 이러한 구상의 어디에 해당되는가.

 이것은 26년 전 한국의 성장단계를 평가해달라던 주문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다. 명백히, 한국인만이 결정할 수 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발전을 지켜보고 상당 부분 공감하는 특권을 누렸던 나로서는 몇가지 가설을 제안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에 있어서 첫째 목표는 평화적인 통일국가의 성취이다. 거기에는 풀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엄밀히 말해 한국인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져야 풀 수 있는 문제이다.

 두번째 과제는 아·태 경제협력기구의 기초 위에 굳건하고 활동적이며 건설적이고 포괄적인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한국은 태평양 강대국인 중국 소련 일본 3개국의 연결점에 놓여 있다. 한국은 거의 반세기 동안 미국과 고락을 같이 해왔다. 상호방위협정의 틀 안에 있는 서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사람들이 미국에 대한 의존을 줄여나가기를 희망해온 것은 이해할 만하다. 나는 이것이 60년대 이래 한국이 아시아의 지역적 협력을 추진해온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지금도 태평양 국가 중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진 중진국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든 것이 잘되면 모든 나라는 중진국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량파괴 무기의 보유와 군사력 그 자체가 점차적으로 덜 중요하게 평가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만 홍콩과 마찬가지로 소련과 중국도 아·태 경제협력기구에 가입하리라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해결해야 할 몇가지 문제가 있다. 아·태 경제협력기구는 조직의 확대를 이루어야 비로소 완전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태 경제협력기구가 처음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보다는 경제협력에서 잠재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분야가 훨씬 많다는 것은 명백하다.

 발전경제학자로서 나는 상이한 발전단계에 있는 국가들 사이에 공동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아주 적절한 한 분야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선진국은 정교한 현대적 기술을 효과적으로 흡수하고자 노력하는 개발도상국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강력한 기술혁명이 급속하게 진행된 분야에서 특히 중요하다. 이러한 분야에서 개발도상국들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선진국들은 세계의 첨단기술 확장에 창조적으로 공헌하려 애쓴다.

 미국과 다른 선진국들은 45년 이래 무역과 경제기술 원조로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나는 최근 〈코리안 비즈니스 월드〉에 실린 기사에서 한국의 최근 해외원조계획이 인상적인 규모에 달한 것을 보고 기뻤다.

 결론적으로 나는 신국제질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유엔헌장 전문에 기초하여 다음 5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첫째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특히 상임이사국들로 신뢰할 만한 ‘평화를 위한 단결’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둘째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해당 지역 밖 이해당사국들의 역할을 포함한 체계적·조직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셋째는 후진국의 사회·경제적 진보를 위해 선전국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등 세계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적 차원에서도 경제·기술적 협력을 계속하는 것이다.

 넷째 ‘인간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존중, 그리고 민주화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정부와 국민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다섯째 사회 각 영역에서 우리의 고귀한 문화와 종교를 고양시킴으로써 문명화하고 인간적인 세계질서를 이룩하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이 앞으로 신국제질서의 모든 차원에서 주요한 기여를 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말할 때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한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불가피한 일이란 없다. 항상 예상밖의 일이 일어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5년 5월 한국의 경제적 미래를 분홍빛으로 예견할 당시 나는 확신에 가득차 있었다. 오늘 나는 신국제질서의 가능성과 그 속에서 한국이 담당하게 될 중요한 역할에 대해 당시와 비슷한 정도의 확신을 갖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