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맞추어 탈바꿈하는 만화언론
  • 고명희 기자 ()
  • 승인 1990.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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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우’에서 ‘보통 고릴라’까지 … 탄압과 한계 극복, 새로운 형태로 발돋움해야

  신문을 펼쳐들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만화이다. ‘고바우 영감’에서 최근 민주만화의 새 기수로 등장한 박재동만평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면면히 전통을 이어온 신문풍자 만화가 80년대에 와서는 더욱 강렬하고 친근한 우리의 대변자로 등장했다. 행간을 읽는 것이 사실접근의 유일한 방편이었던 지난 언론탄압 시절 만화는 호흡을 멈춘 신문기사 대신 보도기능까지 도맡아 해냈었다. 80년대초에는 대학 운동권에서 만화가 이념교육의 매체로 활용됐으며, 87년 대통령선거와 88년 제 13회 국회의원총선 때는 1백번의 유세보다도 만화가 더욱 설득력있는 표밭갈이의 방법으로 열렬한 각광을 받았다.

계몽에서 출발한 시사만화의 역사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효시는 1909년 6월2일 <대한민보>의 창간호에 실린 ‘揷?’라는 제목이 붙은 단 한컷의 그림이다. 연미복에 실크했을 쓰고 단장을 든 한 신사가 연설조로 표어를 외치고 있는 것으로 <대한민보>가 사명으로 삼았던 국민의식계몽을 염두에 둔 작품이었다. 일제의 강압정치가 계속되는 동안 신문들은 풍자보다는 국민의 마음을 달랜다는 뜻에서 주로 ‘멍텅구리’식의 재미있는 만화를 게재했다. 그러던 중 해방이후 ‘고바우’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시사만화의 場이 열리게 된다.

 시사만화 하면 누구나 ‘고바우 영감’을 떠올릴 정도로 고바우는 서민의 대변자로서 몇십년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 고바우 작가 金星煥화백도 주장하듯이 6 · 25동란의 와중에서 태어난 고바우는 ‘사회의 아픈 곳을 긁어 주었던 시대의 파수꾼’이었다. 50년 12월30일 《사병만화》란 잡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고바우영감은 초기에는 진솔한 삶의 대변자로서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듯 순박한 웃음만을 전해주다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55년 2월1일자부터) 강한 시사성을 띠게 된다. 동시에 만화의 필화사건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1만회 돌파라는 기록을 세우는 동안 (<동아> <조선> 통산) 고바우 영감이 겪었던 가장 큰 필화사건은 58년의 ‘똥통사건’. 이대통령의 양아들인 이강석을 사칭, 지방도시를 돌며 경찰서장과 도지사의 향응을 받다가 검거된 ‘가짜 양아들’ 사건을 다룬 이 만화는 그 당시로서는 금단의 성역이었던 경무대를 등장시켜 관리들의 아부풍토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金화백은 “미리 삭제될까봐 마감시간 직전 바쁜 와중에 슬쩍 넘겼다”면서 즉결재판을 거쳐 4백50환 과료처분으로 가까스로 풀려났던 당시를 회고한다. 그 후 <동아일보>의 광고탄압 때 (75년)에는 비쩍 마른 고바우영감이 매일 지면에 나타나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적도 있었다.

 자유당시절 대표적인 야당지였던 <경향신문>에서 출발한 ‘두꺼비’도 빼놓을 수 없는 시사만화이다. 제1회는 왜색 일소 운동이 한참 전개되고 있던 당시 국어를 쓰자는 주제로 애국심 고취를 만화를 통해 호소했다. 또한 선거법 개정을 둘러싸고 자유당, 민주당 등 여야가 각기 다른 입장을 고수했던 57년 당시 자유당의장 이기붕, 민주당 최고위원 조병옥, 그리고 장택상 등의 3명의 협상으로써 통과시킨 선거법안이 결국 여론의 반대로 그 실현을 보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安義燮화백은 당시 <국민일보>에 ‘매사를 이렇게’라는 설명을 붙이고 ‘3영수회담’이라는 만화를 발표, 탁상 공론을 풍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5 · 16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끝났을 때 <동아일보> 사회만평에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채 ‘군사혁명 - 이제 모든 것은 백지로’라는 글귀만 적은 ‘백지만평’이 실린 일도 있었다.

젊은 세대의 만화운동
 70년대를 지나 80년대에 들어와서 정치 · 사회적 현실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시사만화는 새 국면을 맞게 된다. 80년대초부터 일부 만화운동가들이 한정된 지면을 통해 만화운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운동은 대학가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해 이제는 성숙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몇 명의 작가들은 제 5공화국의 강한 탄압을 받아야 했다. 82년 농촌문제를 다룬 만화집 《농사꾼타령》 (기독교농민회 간행)을 그렸던 김봉준과 84년 외세침탈 종속경제 제 5공화국 정권탈취과정을 그린 만화집 《세오랑캐》를 펴낸 최민화씨는 인쇄과정에서 압수당했고, 노동현장을 주제로 한 만화 《깡순이》의 작가 이은홍과 《만화정신2》를 준비하던 손기환은 86년, 87년 각각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나를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도 좋다”고 공언한 뒤부터 이들 만화운동가들은 ‘노태우풍자전’ ‘5.5공화국’ 등의 전시회를 통해 기성 만화가들을 위협할 정도로 새로운 풍자만화운동을 활발하게 펼쳐오고 있다.

 단행본으로 출판된 책으로는 許水萬의 《오! 한강》, 최정현의 《민주주의를 위해 포기하세요》(한길사)와 주완수의 《보통고릴라》(도서출판 세계), 민족미술협의회가 제작한 《오-하느님 당신의 실수이옵니다》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특히 노태우대통령의 보통사람들을 풍자한 《보통고릴라》는 3만부 이상 팔려 출판계에 작은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탈바꿈 필요한 시사만화
 그러나 시사만화라고 해서 만화가 지니는 일반적 속성까지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게 최근 이념을 앞세운 정치풍자만화를 보는 독자들의 또다른 목소리이다. 시사만화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만화의 본래적 사명인 ‘웃음의 유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5공비리를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인 심청전에 빗대어 ‘인당수시리즈’를 통해 해학적으로 묘사한 한겨레그림판의 박재동은 지나친 비장감과 투쟁적 구호로 일관했던 80년대 만화운동가들의 한계를 극복한 성공적인 예로 평가받는다.

 언론자율화시대를 맞은 90년대 시사만화에 대한 일반대중의 관심은 과거만큼 치열하지는 않다. 연극이나 영화 등 만화 이외의 세태풍자 방법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표현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확대된 마당에 80년대식 정치풍자만화는 너무 경직되어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미술평론가 廓大沅씨는 “고바우는 소시민적 발상에 의해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우리의 의식을 날카롭게 후벼파진 못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신문의 시사만화를 반전시키는 내용의 만화시리즈를 그려 《말》지 12월호에 게재한 전북대 林玉相교수의 말처럼 “시대의 민주적 흐름에 담아내지 못하는 틀은 도전받아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다.

 서독의 사회학자 프흐의 표현처럼 만화는 ‘이데올로기의 전달자’이다. 시사만화가 때로는 사설보다 더 큰 흡인력으로 독자에게 다가서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이다. ‘시대의 파수꾼’으로서 사회의 모순을 짚어나가면서도 독자에게 건강한 웃음을 가져다줄 때 시사만화는 90년대에도 독자의 사랑을 받으면서 발전해나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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