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신화'사라지는가
  • 김당 기자 ()
  • 승인 1991.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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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국민대책회의'필적 공방에 힘 소모, 투쟁 지속 불투명

 '4천만 국민여러분 ! 87년 6월의 명동성당을 기억하십니까? '독재타도, 민주쟁취'의 함성으로 4천만 국민의 기대와 뜻을 한데 모아 6월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민주의 성지 명동성당은 백주대낮에 쇠파이프로 사람을 죽인 노태우 정권하에서 다시금 민주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 5월14일 강경대군 장례식(1차)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장 김종식)에서 뿌린 한 유인물의 선전문구이다. 전대협은 또 '명동성당 구국농성단'이름으로 된 '명동성당에서 싸움은 계속됩니다'라는 글을 통해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한편으로 '시민과 손잡고 6월항쟁의 그날처럼 다시 시작할 것'을 제의했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조직적인 대오를 갖춘 것은 지난 5월18일 강군 장례식 및 2차국민대회를 마친 '공안통치 분쇄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대책회의)관계자들이 '입성'하고서부터이다. 대책회의는 이곳을 제2단계 투쟁거점으로 삼고 무기한 장기농성을 계획하고 있으나'한국 민주화의 성지'라는 과거의 영광과 6월항쟁때의 '성역 참배'라는 시민 동참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그때와는 다른 여러 변수들 말고도 일단, '6'29 항복'이라는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세력과 반대로 그때의 성취감을 잊지 못하는 세력간의 대결양상을 보이고 있는 5월투쟁에서 6월항쟁으로 옮겨가는 '징검다리'구실을 하기에는 명동성당이 이미 퇴락했기 때문이다.

  우선 성당 농성자들은 4년 전과는 달리 명동성당측으로부터 홀대를 받고 있다. 이는 6공 들어 평화신문'평화방송 사태를 겪으면서 드러난 가톨릭의 보수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87년에는 6월항쟁이 분수령이된 '6'10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언철폐 규탄 국민대회'가 당시 시위정국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국민본부 등 범야권의 공동주최로 열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명동성당에서 터졌다.

6월항쟁 이끌어낸 '민주의 성지'
  지난 87년 5월18일 밤 7시께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광주항쟁 희생자 7주기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11개 항목의 성명서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름으로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제단의 폭탄선언은 결국 황정웅 경위 등 고문관련 경관 3명과 박처원 치안감 등 치안본부 고위간부 3명의 추가구속, 노신영 국무총리를 포함한 부총리 안기부장 내무장관 법무장관 검찰총장 등 공안 관련 각료들의 경질(5'26)개각 가져왔다. 그러나 개각으로 시위가 진정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거의 격일제로 지속된 시위의 정점은 앞에 말한 6'10대회였다. 민정당 전당대회(대통령후보 지명대회) 및 축하연이 열리는 때를 택한 이날의 대회는 오후 6시 정각에 원천봉쇄된 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시작해 도심지 시위를 거쳐 명동성당에서 끝난 셈이다. 그러나 명동성당 농성은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발적 요소가 많았다.

  그날 명동성당은 한국외국어대'서울시립대 등 서울지역대학생협의회 동부지역 대학생 집결지였다. 그런데 밤 9시 이후부터 퇴계로쪽에서 시위중이던 대학생 1천여명이 경찰에 밀리면서 성당 구내의 계성여고를 통해 몰려들었고 시위대는 경찰에 의해 출구가 봉쇄된 가운데 밤 11시쯤 지도부를 급조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철야농성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낸'농성단은 밤새 5백명으로 줄었다.

  그런데 이튿날, 성당측 신부 3명이 경찰에 농성 학생들의 안전귀가 보장을 요청했으나 경찰이 '주동자는 연행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한 데다 성당에 최루탄을 쏘는 바람에 농성 분위기가 바뀌어 예정된 '하룻밤 농성'이 '5박6일'로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학생들이 각 대학 학생회에 전화를 걸어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명동성당 농성학생 구출시위'가 나중에는 '농성지지 시위'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많은 시민이 경찰의 봉쇄선을 뚫고 이들에게 빵 음료수 의약품을 등을 건네주며 농성을 지지했다. 점심을 먹으로 나온 근처의 회사원 등 이른바 '넥타이부대'1천여명이 거의 날마다 성당 진입로를 가득 메운 채 즉석 가두시위를 벌였고 상점 주인들도 이에 가담, 명동 일대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연호와 '쏘지마, 쏘지마'라는 함성과 '우'하는 야유 그리고 '아침이슬'등의 노래소리로 뒤덮였다.

  명동성당측에서도 학생들을 말 그대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농성 학생과 경찰의 접전으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성당측은 성모병원 의료진들로 성당 구내 교육관에 의무실을 설치하고 부상학생을 치료했다. 학생들이 투표를 통해 해산을 결정한 6월15일 마지막날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농성장에 들러 '우리의 투쟁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격려하면서 학생들의 손을 하나 하나 잡아주기도 했다.

성당측 냉담한 반응 보여 '노숙'
  명동성당에서 전파된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울림이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라는 구호로 바뀐 오늘, '공안통치 분쇄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계획적이고 전략적인 농성투쟁을 택한 '범국민대책회의'라는 이름으로 결집한 이른바 민족민주(민민)운동 세력은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우선 겉보기에는 민민운동세력이 고립무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성당측은 성당이 현세적 투쟁의 장이 아니라는 종교적 입장을 내세워 철수를 요구하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화관 사용도 금지해 농성자들은 성당 뒤켠에 있는 성모마리아동산 주변에 친 대형천막 6개 안에서 전기'전화도 없이 노숙하는 형편이다. 이들은 다만 5월20일부터 가톨릭회관 3층 정의구현사제단 사무실에서 무기한으로 '공안통치 종식과 민주화 실현을 위한 단식기도'를 벌이고 있는 서울대교구 사제 15명등 진보적 성향 신부들의 움직임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예전과 다른 정부당국의 이중성도 이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정부에서는 '민주화가 된 마당에 명동성당 마당은 더 이상 민주화 시위의 장이 될 수가 없다'는 자신감에서인지 4년 전과는 달리 성당 출입을 막지 않고 있다. 반면에 경찰은 이수호씨(집행위원장)과 한상렬 목사(상임대표)를 비롯한 대책회의 관계자들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을 받아놓고 있는 상태이다. 전경들이 성당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에 배치돼 있긴 하지만 드나들기는 자유로운 편이다. 그런데도 일반 시민들은 별로 이곳을 찾지 않고 농성자 또한 1백명선에서 크게 늘지 않고 있다.

  지난 5'4, 5'9 대회를 통해 고양된 반정부 시위가 5'18장례식 및 국민대회로 정점에 이르렀으나 그 이후 시위가 수그러든 이유는 그동에 수세에 몰려 있던 집권세력이 5월18일을 기점으로 공세로 전환한 데 있다. 공세의 조짐은 지난 5월8일 김기설씨(전민련 사회부장)가 분신했을 때 검찰이 언론에 흘린 이른바 '분신 배후세력'에 대한 언질과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죽음을 부추기는 배후의 검은 세력을 폭로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에서 나타났다. 특히 박총장의 발언은 범국민대책회의에 대한 범국민적 의혹을 증폭시켰다. 나중에 박총장은 배후세력이 재야운동권을 지칭한 것은 아니라는 요지의 해명을 했지만 이미 상업성이 떨어진 해명은 언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도덕성에 흠집을 입은 민민운동세력은 5월18일 검찰에서 발표한 김씨 유서의 대필 유혹이라는 공세의 신호탄과 언론의 상업적 보도라는 조명탄이 쏘아진 가운데 이른바 필적공방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5~6월 잇는 '징검다리'역할 못해
  문제는 5월18일부터 명동성당 농성을 시작한 대책회의가 일주일 동안이나 필적공방 이라는 소모전에 휩싸여 결국 5월투쟁과 6월항쟁을 잇는 징검다리 구실을 못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5월18일 이전에만 해도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노재봉 내각의 진토 여부'에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온통 '자필이냐 대필이냐'에 쏠려 있다는 지적은 필적공방의 실체를 정확이 꿰뚫고 있다. 지난 5월22일 명동성당 성모마당에서 전민련이 주최한 대책회의 가입 정당'사회단체를 대상으로 한 필적공방 설명회에서 임종철씨(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장)는 필적 공방을 둘러싼 '여론'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지적했다. 이씨에 따르면 주위의 동료 약사들조차도 어느쪽이 맞는지 반신반의하므로 '무슨 소리냐, 목사인 전민련 한상렬 의장이 신학자로서 양심을 걸고 대필은 조작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동료 또한 '그렇지만 신부인 박홍 총장이 분신 배후세력이 있다고 하는데 누구말을 믿어야 하느냐'하고 반문할 만큼 '여론조작'의 힘이 크다는 것이었다.

  농성 시작부터 필적공방을 둘러싼 소모 전에 휩쓸린 대책회의는 5'23시국대토론회, 5'24문화한마당 등으로 성당 안에서 투쟁의 불씨를 지핀 뒤에 5'23 3차국민대회로 불길을 당겨 6'10대회 때까지 장기전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대책회의 내부 조직들 간의 결속력이 약한 데다가 구호가 아닌 실현성있는 노정권 퇴진운동을 담보할 권력 대체세력 창출 문제를 놓고도 민중민주정부론과 민주연합(연립)정부론이 맞서있다. 게다가 과연 국민대중이 인정하는 대체세력을 창출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따라서 내각개편과 함께 이뤄질 정부의 개량적 민주개혁 조처와 광역의회 선거에 대한 대응방침을 둘러싸고 노선투쟁이 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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