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안되면 유럽통합도 대결종식도 불가능”
  • 편집국 ()
  • 승인 1990.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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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 다쉬체프교수의 정책건의서

“베를린장벽 개방, 그리고 독일 통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소련에 의해 준비된 것이다.” 최근 서독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이같은 충격적인 내용을 전하는 소련측 자료를 실어 주목을 받고 있다. 소련 ‘사회주의세계체제경제연구소’의 W. 다쉬체프 교수가 지난해 4월18일 소련 지도층에 제출한 정책 건의서가 그것으로, 여기에는 독일의 통일에서부터 고르바초프가 주장하는 ‘유럽 一家’의 실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치밀하게 서술돼 있다. 중요내용을 발췌하여 싣는다.

유럽대륙을 두개의 적대적 국가群으로 분할시켰던 전후 유럽의 냉전체제가 종국에 가까워오고 있다. 미 · 소 두 초강대국도 이러한 급격한 변혁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국가이익에서 볼 때 더이상 기존 현상에 만족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소련에게 있어서 기존현상은 무엇보다도 서방과의 40년간의 대결이 가져다준 엄청난 정치 · 경제 · 군사 · 도덕적인 부담으로 인해 지극히 불리한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이와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소련은 국가생활의 토대가 파괴되어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 소련에서 기반을 굳혀 전후 동유럽국가들에게로 확대된 스탈린식 관료주의체제는 이미 50년대말부터 심각한 결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이 체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대내적 안정 및 상호협력과 통합뿐 아니라 소련의 외교정책적 이익을 확보하는 데 있어 완전히 비효율적임이 드러난 것이다. 제한주권론인 ‘브레즈네프독트린’으로 상징되는 소련의 對동유럽정책은 80년대에 동유럽국가들을 휩쓴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으나 이제 소련은 이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념적 지렛대를 상실했다. 군사력 또한 그 의미를 잃었다. 왜냐하면 군사력 투입은 전반적인 동 · 서관계, 나아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파국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동유럽은 소련에게 있어 안보지대에서 위험 · 불안지대로 발전해갔다.


1952년까지 소련은 독일분단이 소련에 위험하다고 여겨

이에 소련지도층은 소련의 對동유럽정책을 근본적으로 재평가하고 소련의 안보이익을 보전하며, 동유럽에서의 사회주의의 계속적 전진을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1985년 4월 이래 소련 지도층이 새로운 현실과 과거의 경험에 대한 재평가에서 도출한 결론은 정치적 ‘신사고’로 등장, 동 · 서관계의 근본적 문제점 및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이전에 없던 가능성을 열었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변화와 함께 스탈린 이래 소련이 당면해온 서방과의 대결이라는 끔찍한 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소련외교정책의 중심과제 해결의 길이 열렸다.

소련 및 동유럽국가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 스탈린식 관료주의체제가 한가닥 희망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로 볼 때 유럽 분단극복의 최대 장애는 사회 · 정치적 체제문제가 아니라 유럽국가사회 전체구성원의 안전보장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대결극복의 최대 어려움은 독일문제 해결과 연관되어 있다.

소련의 독일문제에 대한 정책은 전후 수십년간 매우 모순적이었다. 1952년까지 소련은 독일분단이 소련에 위험하다고 계산, 독일의 단일성 회복을 옹호했다. 이 방향으로의 최후의 시도는 독일민족의 자결권에 입각한 중립화통일을 제안한 1952년 3월의 스탈린각서이다. 소련의 동유럽지배확립에 직면한 서방측은 독일중립화 통일안이 위험하다고 판단, 독일분단정책을 계속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에 충격을 입은 서방측은 무력사용으로 시도된 한국식 통일모델이 독일에도 적용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에 독일분단은 동 · 서간의 군사 · 정치적 대결의 전초가 되었으며 거꾸로 동 · 서대결은 독일분단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생겨났다.

서독의 서유럽통합이 아데나워가 의도한 바와 달리 동 · 서독간의 거리를 점점 더 크게 하고 민족단일성 회복 목표와 배치되는 모순에 빠지게 되자 서독의 엘리트들은 독일문제는 소련의 안보이익에 반하여 해결될 수 없으며 바로 소련이 독일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양독영토가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무기 및 핵전쟁으로 변화할 위험성이 커지자 서독내 정치세력들은 일치 단결하여 민족적 저항운동을 펼쳤으며 서독정부도 미국의 對소대결정책에 저행했다. 서독외교정책은 점점 더 독일문제해결을 전쟁 위험성 제거 및 동 · 서대결 극복과 밀접한 연관성속에서 보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서독의 외교정책은 전후 전체주의로부터의 해방과정속에서 사회적 의식과 사회 · 정치 · 경제질서의 근본적 변혁이라는 서독식 ‘페레스트로이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서독에는 내용에 있어서 동독에서 보다 훨씬 더 사회주의적인 제도, 즉 조합운동, 지방자치 등이 발달해 있으며 서유럽 국가들 중 최강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있다. 민주주의, 자율성, 개방 등을 목표로 하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서독의 정치적 흐름에 기가 막히게 부합함으로써 서유럽국가들 중 서독에서 가장 열광적 호응을 얻고 있으며 상상할 수 없었던 서독과 소련의 협력 가능성마저 생겼다. 그러나 이 협력은 서독으로서는 나토와의 관계 때문에, 그리고 소련으로서는 동독이라는 요소 때문에 심히 제약을 받고 있다. 소련과 동 · 서독의 뒤엉킨 삼각관계는 소련의 국익을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지난 80년대 중반 이래 소련과 동독지도층은 국내외정책을 둘러싸고 공공연한 대립관계에 들어갔다.

‘유럽공동의 집’, 대외개방, 개인의 권리 및 자유의 이념은 기존 동독 권력구조에 어색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다. 동독정권에게는 서독과의 분리 및 고립정책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동 · 서긴장이 필요하다. 상황이 호전될 전망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동 · 서독간의 경제, 과학기술 격차는 서독에 유리한 방향으로 점점 더 벌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독 정세를 복잡하게 하고 독일문제를 첨예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물과 불의 관계” 라는 이론하에 베를린장벽이 앞으로도 1백년은 더 존속할 것이라는 선언은 비이성적이며 동 · 서독 국민의 불만만 심화시킬 뿐이었다. 따라서 현 상태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는 소련, 중국, 헝가리 및 기타 사회주의국가들에서 추진되고 있는 근본적 사회변혁밖에 없다는 현실인식에 도달했다. 이에 이르러 동독의 단계적 개혁은 동 · 서독 및 그들의 정치 · 경제구조간의 점진적 접근을 가져와 독일문제의 뇌관을 빼고, 모든 유럽국가들의 안전보장이라는 조건하에 양독이 연합 또는 기타 형태로 통합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와 같은 과정과 전망을 통해 볼 때 독일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은 결코 이단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현재와 같은 독일분단의 극복없이는 ‘유럽공동의 집’도, 유럽통합도, 블록구조의 제거도, 동 · 서대결의 종식도, 군축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분단상태 극복이라는 도덕적 고려뿐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철한 외교정책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방어체제로의 전환 필요

이제 동독 또는 여타국가들의 이익에서가 아니라 전유럽의 안보 및 협력을 위해 전유럽국가가 독일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왔다. 이 방향으로 진전되어 블록간의 대결구조가 사라지면 양독 또는 통일독일의 중립화문제는 그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과도적으로 양독의 군사동맹 불참여 원칙을 가상할 수도 있는데 어떠한 경우에도 전유럽안보체제의 구축은 독일문제의 긴급성을 덜어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가능한 한 최저수준의 군사력을 토대로 한 비공격 방어체제로의 전환, 외국군의 감축내지 철수, 나토와 바르샤바간의 비무장지대 설치, 궁극적으로는 양독의 비무장화가 필요하며 이 모든 조치에는 양 진영의 주도세력인 미 · 소의 군사잠재력의 감축이 요구된다.

독일민족분단의 극복은 반드시 양독의 통합이라는 형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제1단계에서는 동독의 점진적 국경개방 및 서독과의 협력강화가 보다 더 현실적이다. 이 단계에서는 양독의 상호불간섭원칙이 절대 존중되어야 한다. 제2단계, 즉 동 · 서대결이 점차 전유럽 차원의 협력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패권주의, 팽창주의, 군사적 위협 등에 관한 우려가 사라졌을 때 양독은 연방이나 기타의 통합형태를 형성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점은 이 통합과정이 적대적 블록에서 공생 · 공영하는 정유럽 조직으로의 점진적 전환과정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문제해결은 소련의 본질적 국익에 부합하는 ‘유럽공동의 집’ 이념의 실현에 있어 그 중심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의 분단극복은 유럽대륙에서의 정치 · 군사적 대립의 주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된다. 그렇게 되면 유럽국민들은 더이상 위험한 대결을 위해 물질적, 정신적 재원을 소모하지 않을 것이며, 양 진영으로의 분할이 종식되면 미군이 서유럽에, 소련군이 동유럽에 주둔할 필요성이 사라질 것이다. 유럽국민들은 그들을 짓눌러왔던 불만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침내 자유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소련은 서방과의 대결이 가져다 준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역사적 해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한 대안은 유럽에서의 무의미하고 위험한 대결의 지속밖에 없다. 건전한 상식에 입각하여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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