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프로, 주부 사회와 ‘옹아리’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1.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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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라디오 <여성시대> 정치·경제로 영역 확장…방향 정립 위한 비평작업 필요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근 10년간 여성 프로그램을 맡았던 한 제작자는 당시 라디오의 주부 대상 프로그램들이 음악으로 쳐서 고전이었다면 80년대 후반은 팝송,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하드록으로 흐르고 있다고 평한다.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듯 점점 표피적이 되어간다는 혹평이다. 반면 여성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은 주부 대상 프로그램은 예나 지금이나 ‘그 밥에 그 나물’이지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도토리 키재기식 프로그램들이라고 비난한다. 부부간·고부간의 가족심리적 갈등이나 신변잡기에 관한 화제에서 맴돌며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눈가림으로 여성문제의 본질을 희석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그러나 주부 대상 프로그램들만큼 확실한 청취층을 확보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을까. 서민층 주부들의 진솔한 목소리를 담아주는 그릇으로서 재택 주부·근로여성 뿐 아니라 기사·승객 등 많은 남성들로부터도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신생 방송사들의 설립으로 채널의 다원화가 이루어지면서 라디오 6개사가 일제히 오전시간대에 주부프로그램을 편성, 인기 연예인을 진행자로 기용하며 청취율 경쟁을 벌이고 있다(표참조).

세상 돌아가는 얘기 전하려 애쓴다
 또한 내용면에서도 현모양처 여성상을 이상형으로 제시하던 종래의 경향이 근자에 와서 주부들의 사회화를 염두에 둔 기획으로 바뀌는 등 긍정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다. 관심의 영역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의 문제로 확장시켜 여성들의 의식변화를 선도하려는 이같은 노력은 주부를 탈정치적·비사회적 존재로만 여겨온 이제까지의 선입견에 비추어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기도 하다.

 오는 30일로 1천회를 맞는 MBC라디오의 <여성시대>는 가정소사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전하려 애쓰는 프로그램의 하나이다. 지난 4월 개편 이후 ‘토요칼럼’ 코너를 마련, 다양한 주제를 깊이있게 소화해내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최근 다루어진 사회성 주제들로는 △쌀 수입개방 및 수입 바나나 등 농산물 수입문제 △세제 사용 등 가정내에서의 환경문제 △북한 여성 등에 관한 것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쌀 수입개방 문제는 지난달 미국측 압력으로 북한에 쌀을 보내지 못한다는 보도가 나온 민감한 시점에서 세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다뤄지며 수입개방 반대를 역설한 의미있는 기획이었다고 담당 이학규 프로듀서는 말한다.

 5월20일자 첫방송에서 경제학자가 출연, 쌀 수입개방을 강력히 반대하는 이유를 내보내자 정부측에서 즉각 우루과이라운드 관련 정부시책에 대한 해명을 요청해왔고 일주일 후에는 농림수산부 차관보가 출연해 “쌀 수입개방은 하지 않겠다”는 정부측 공식입장을 밝혔다. 제작팀은 다시 이 여세를 몰아 이틑날 주부 3백명이 참여한 벽제 모내기행사에 농협 부회장을 초청하는 등 쌀 수입개방에 대한 반대여론을 조성했다고 털어놓는다.

 손숙(48)·정한용(38) 콤비의 개인적 인기도 이 프로그램의 청취율 상승에 큰 몫을 하지만 간혹 시사문제에 대한 언급과 관련해 청취자들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는 경우도 있다. 정한용씨는 최근 정총리서리에게 달걀세례를 퍼부은 학생들에게 “그런 철부지들은 혼구멍을 내야 한다”고 비판했다가 방송 후 즉각 거센 항의전화를 받았다고 전한다. “강경대군사건 이후의 숱한 분신들이 그냥 묻혀져 버리는가싶은 안타까움에서 한 말이 이처럼 즉각적이고 민감한 반향을 일으키는 구나 싶어 어깨가 새삼 무거워지더라”는 것이다. 이 프로듀서도 특정사안에 대한 사회의 다양한 시각을 전달하기 위해 출연자 섭외 등으로 고심하고 있다고 토론한다.

 12년 장수프로를 이끌고 있는 KBS2라디오의 <황인용·강부자입니다>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그동안 약 1백명의 프로듀서가 거쳐가며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으나 외견상 뚜렷한 변화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두 진행자의 너무나도 확고한 개성 탓 외에도 KBS 내부의 체질문제, 방송의 구조적 흐름 등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고 담당 프로듀서들은 말한다. 지난해 4월 'KBS 사태‘ 이후 민주적 합의도출에 껄끄러움을 갖고 있는 사내구조 속에서 프로그램의 핵심인 진행자와 관련 간부진을 포함한 제작자들이 인식변화에 동참하지 않는 한 프로그램의 변모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작자 여성관이 프로그램의 성격 좌우
 이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박인규 프로듀서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제작자의 여성관”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 많은 제작자들이 여성들의 의식변화와는 무관하게 생활 주변의 작은 행복을 전하는 것이 여성 프로그램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으며, 여기서 ‘바구니 속의 행복’을 줄 것인가, 보다 진보적 가치관을 심어줄 것인가 하는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다양한 의견들이 발전적으로 수렴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프로듀서 연합회 등 관련단체들에 여성 프로그램 분과가 설치되어 지속적 연구와 심포지엄 개최 등을 통한 진지한 모색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한다.

 아울러 비평기능의 활성화도 주부 대상 프로그램의 방향 정립을 위해 시급한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그나마 부족한 비평작업의 대부분이 텔레비전 쪽에만 쏠려 있어 라디오의 여성 프로그램은 비평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여성 프로그램은 여성의 총체적 삶을 대변하고 ‘지금·여기’의 여성상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요청이 높다. 그런 점에서 그 위력에 걸맞는 여성 言路로서의 방향모색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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