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 言語수출 대성공
  • 박중희(객원편집위원) ()
  • 승인 1990.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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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는 정말 역사적인 인물인가? 이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하는 까닭이라는 것도 듣고 보니 여러 가지다. “아무리 봐도 될 성싶지 않은 일을 해냈다”는 것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이를테면 ‘페레스트로이카’ 같은 거다. 도대체 이런 말이 세계의 공통어가 될 만한 소지란 적다. ‘글라스노스트’도 마찬가지다.

 우선 길이가 너무 길다. ‘하라키리’ ‘햄버거’ ‘트럭’ ‘빵’…. 많아도 넉자 정도로 해둬야 낯선 말이라 해도 혀가 돌아가준다. 페레스트로이카? 길이도 그렇고 어감도 그렇고 이모저모 따져봐도 세계공통어감으론 낙제다. 그런데도 어디 시골 수리조합 같은 데서도 “그눔들을 싹 페레스트로이카로 그냥…” 하는 게 아주 어색치 않아진 세상인 게 요즈음이다. 그건 기적에 가깝대도 좋다.

 그리고 한 나라 말이 세계공통어가 된다는 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하라키리’만을 놓고 봐도 그렇다. 그건 수없이 많은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오랜 세월 ‘꾸준히’ 배들을 갈라온 끝에 겨우 세계 사람들에 의해 외래공통어로 받아 들여졌다. ‘코카콜라’ 역시 그게 세계공통어로 되기까진 얼마나 많은 달러뭉치들이 광고선전매체들 목구멍으로 넘어가야 했으며 세계 사람들이 마시고 버린 콜라병과 깡통더미는 또 얼마나 컸어야 했었느냐!

 그런 것에 비하면 ‘페레스…’ ‘글라스…’ 하는 따위는 고르바초프가 혼자 만들어낸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게 세계로 번져나간 품도 ‘하라키리’에 비하면 공짜로 하루아침에 된거라고 해도 에누리가 아니다. 알아주지 않기 어렵게 됐다.

 
◆…그리고 무엇에서건 때를 타는 ‘타이밍’이라는 게 중요하다. 사실, 그동안 앵글로색슨족들 위세 앞에 슬라브족들이 얼굴엔 주눅이 어지간히 들어왔었다. ‘펩시콜라’ ‘로큰롤’ ‘캠핑’ 따위는 벌써부터고 최근에 와선 세계 최대의 ‘맥도널드 햄버거’집이 모스크바 한복판에 생긴 것을 계기로 ‘버거’니 ‘빅 맥’(Big Mac)이니 하는 것까지 판을 치게 됐다. 이런 英語族말이 신성 러시아제국의 공기를 탁하게 흐려놓는 동안에도 그들은 기껏 ‘버거’나 씹으면서 금이 가는 슬라브적 자존심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세계시장으로의 언어의 수출량은 그 나라, 그 문화의 힘과 정비례한다고 했다. 러시아인민들이 ‘영광스런 볼셰비키 혁명’에 승리한 지도 이제 70년이 넘었다. 그런데 빵조각 하나를 씹더라도 그 이름이, 그래, ‘버거 킹’ ‘빅 맥’… 이래야만 된다는 것인가.

 
◆…그런 기분은 ‘맥도널드’ 대만도 아니었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고르바초프의 제의대로 헌법 제6조의 레닌주의적 독재조항을 없애버리기로 한 때에도 그랬다. 예를 들어 자기들 말엔 그런 게 없어서 다원주의 · 복수주의를 ‘플류러리즘’, 선택할 수 있는 代案은 ‘알터나티바’(Alternatiba) 하는 식으로 영어를 露語化한 소위 ‘잉글루스키’를 만들어 써야 했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이란 오래 살고 볼 일이긴 한 건가 보다. 머리 벗어진 사람이 서기장 자리에 오르더니 얼핏 그럴 듯하지도 않은 러시아말들이 5대양 6대주에서 햄버거 먹듯 쓰여지게 되는 게 아닌가. 게다가 ‘페레스트로이카’는 그 길이로 쳐서도 ‘햄버거’의 곱쟁이가 넘는다.


 ◆…또 있다. 인물이 크면 클수록 그의 말엔 알 듯 모를 듯 신비한 맛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걸 솔직하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말하기 어렵게 하는 마력도 있다. 아울러 그것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넓은 폭과 여지를 갖는다. 햄버거나 하라키리엔 그런 게 없다. 페레스트로이카엔 그런 게 많다.

 우리가 봐온대로 페레스트로이카가 부채질해온 혁명의 거센 물결로 동유럽의 일당독재체제는 무너지거나 치명상을 입었다. 거꾸로 페레스트로이카의 의미를 공산주의자들의 ‘自殺’로보다는 再生을 위한 개혁적 몸부림으로 보는 눈이 없지도 않고 그게 아주 엉뚱만 하지도 않다.

 ‘혁명’이라는 말 그 자체가 다수의 동유럽 사람들에겐 실감나는 것일 게 틀림없다. 그러나 소위 보수파들에겐 그것은 쉽게 ‘反혁명’일 수 있고 실제 많이들 그렇게 본다.

 혁명이건, 반혁명이건 페레스트로이카가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는 죽기 직전 그것을 ‘에니그마’(Enigma · 모를일)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쯤이면 인물 소릴 듣게도 되긴 됐다.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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