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칼럼
  • (본지 칼럼니스트 · 소설가) ()
  • 승인 1990.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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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혁구도’발상에 대한 질문

 우리 사회의 생활양식이나 그와 연관된 유행성 경향은, 대개 20년 내지 30년의 차이를 두고 일본 것을 복사하는 모양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이런 인식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므로 다소 무책임하달 수도 있으며, 그만큼 근거가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느낄 따름인데,  거기에는 매우 언짢고 불쾌한 심정이 첨가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가령 ‘아파트 단지’의 생성도 그렇다. 전후의 건설 붐을 타고 등장했던 8톤트럭 행렬이 일본 교통질서의 무법자로 설치고 다닌대서 ‘가미가제(神風)트럭’의 이름을 얻더니, 요새는 한국서도 덤프차가 곧잘 비난의 대상이 된다. 기업체 신입사원 연수를 위한 ‘지옥훈련’의 모델도 그쪽이다. 안내원의 깃발을 따라 세계 각지로 몰려 다니던 관광풍조가 이제는 한국에도 번져, 방콕 등지에서는 ‘섹스 쇼핑’을 일삼는다고 신문이 꼬집는다.


한국과 일본의 정계개편론 안팎
 그런데 신통하게도(?) 한일 양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상황이 있다. 다름아닌 정계개편론이다. 이른바 보혁구도를 골격으로 전개되고 있는 모양새마저 비슷하다. 물론 전개 방식이나 계기 자체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35년 동안 집권해온 일본 자민당이 개편의 주체로 나선 데 반해 한국은 두 양당이 이를 추진하고 있다. 저쪽은 총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불확실한 승패를 염려하여 이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데 비해, 이쪽은 4당체제의 정치운영에 일단 실패했다고 보고, 색깔있는 정당끼리 ‘헤쳐 모여’의 방식으로 나가겠다다는 낌새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일본의 정치구조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조짐을 더러 읽는다. 이런 움직임을 두고 심사가 고르지 못할 게 뻔한 평민당측에선, “노대통령의 영향력이 떨어지기 전에 일본의 자민당식 연합을 꾀하려는 일부 세력이 그런 발상을 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속셈이야 따로 있겠지만, 그 말이 나온 배경에다 일본의 젼례와 관련시킨 점을 덧붙여 생각하면 퍽 흥미있다.

 좋다. 일본을 떠올리건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합당후 신당을 출범시키건 간에, 정치인들이 숙련된 안목으로 정치를 요리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유권자는 표로써 그들에게 대답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무엇이 보수고 무엇이 혁신이냐는 것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면 큰 일이다. 그런데도 벌써 그와 같은 싹을 발견한다. 공화당 종합기획실이 정리하여 당무회의에서 보고했다는 보혁개념 내용은 기가 막힌다. 웃기지 말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 해석에 의하면 보수는 이런 것이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존중하고 대한민국의 건국과정과 그 뒤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 종교적 신앙과 전통적 윤리도덕을 존중하는 것. 자유진영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국제화에 동조하는 것, 자유경쟁체제에 바탕한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신봉하는 것.’

 이번엔 혁신에 대한 정의를 보자.
 ‘민족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의 건국과정과 그 뒤 발전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 종교적 신앙과 전통적 윤리도덕에 대한 회의적 태도, 현재의 체제가 노동자 · 농민 · 소시민의 희생으로 유지된다고 보는 시각. 미국 · 일본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자유경쟁의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부정하는 것.’

박제된 발상이 차라리 무섭다
 좋은 것은 전부 보수가 차지하고 나쁜 것은 죄다 혁신 쪽에 떠넘겼다. 뿐만이 아니다. 후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통적 윤리도덕마저 회의적으로 보는 불한당이나 망나니 쯤으로 다루고 있다. ‘종교적 신앙을 회의적으로 본다’는 지적대로라면, 불교 개신교 가톨릭 신자들은 혁신을 주장 할 수 없다는 ‘회의’의 탄생마저 가능케 한다. 그들이 질타해 마지 않는 흑백논리의 정형화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이땅에 숨쉬고 사는 사람들을 모조리 보수와 혁신으로 가르고, 누구나가 지닌 생각의 다양성을 유치한 수준의 ‘공화당 사전’에 묶는 ‘박제된 발상’이 차라리 무섭다. 표현이 점잖기 망정이지 그사이 많이 경험했던 용공 좌경의 수사기록을 기억해내지 말란 법이 없다. 일본과 미국까지 끄집어내어 불문곡직 ‘제국주의로 규정한다’고 단정하는 전거는 무엇인가. 65년 6월에 맺은 한일기본조약을 ‘굴욕외교’라고 규탄한 데 대한 반감과 소신을 여전히 안고, 일본의 번영과 자민당정권을 연계시켜 꼭 그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믿는가.

 존재조차 미미한 ‘혁신’을 기존 정당의 필요에 따라 상대적으로 과대 포장하는 것은 허구라는 반론이 있었다. 혁신이든 진보든 정치를 통해 현실 개혁을 원하는 조직들은 체제 속으로 들어와 함께 뛸 무대를 갖는 게 마땅하다면서도, 기득권을 확보한 측에선 좀처럼 그만한 소지조차 내주지 않았다. 인권이나 올바른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싸잡아 ‘좋은 의미’의 혁신으로 가정하고, 그 기초위에서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취한 감이 짙다. 또 그들에 대한 탄압의 역사는 길고 탄생의 역사는 짧았다, 이승만대통령이 “한국의 호랑이는 가등청정이 다 잡아 먹어 없다”고 했을 때, 진보당 사건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혁신정당도 이미 씨를 말린 셈이었다. 누가 잡아 먹었으며 그후로는 어땠느냐고 물을 건 없다. 하여간 맥을 못추고 기신거리다가 6 · 29 다음에야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보혁구도’의 바람을 타고 ‘말의 서리’를 맞고 있는 꼴이다. 이 아니 우스운가. 따라서 혁신을 자기 보신의 연장선상에서만 이용하는 위선은 참아주기 어렵다. 그것은 깨어있는 국민을 무시한 당리당략의 표본이다. 일본도 그렇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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