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치고 장고두드리며 “도망치면 될 줄 알았나”
  • 미리버풀·이석렬 특파원 ()
  • 승인 1990.05.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美원정 피코노조원 2주째 시위…회사측과 보상액수 이견

미국 뉴욕州 리버풀市의 한적한 공장지대. 이따금씩 질주하는 자동차가 아슬아슬하게 사람을 피해 지나가는 도로변에서 징치고 장고치는 이색 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공장과 사무실로 들어가는 주차장 입구를 막고 있는 경찰 백차들이 이곳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돋보이게 해주는 가운데 50명에 가까운 시위대들이 한국의 농악에 맞춰 구호를 외치며 주먹을 흔들고 있었다.

 공장 문을 닫고 남몰래 살짝 한국을 빠져나온 미국회사 주인을 찾아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받으려고 지난 4월12일 미국에 온 한국 피코주식회사의 노조대표들이다. 노조위원장 柳點順(37)씨와 사무장 洪聖禮(46)씨 그리고 노조원 方榮孝(30)씨는 이곳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피코 노동자 후원회’ 사람들과 함께 피코본사가 있는 뉴욕주 리버풀市 회사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밀린 임금과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악을 쓰고 있다.

캐나다 · 미국인 동조자도 시위에 합세

 뉴욕 청년학교 풍물패 ‘비나리’회원들이 하얀 광목 바지저고리를 입고 농악을 연주하여 기세를 올린 시위는 이들의 구호가 영어가 아니었다면 서울의 구로공단이나 인천의 어느 공장지대에서 벌어진 노사분규의 열띤 현장으로 착각하기 안성맞춤이었다.

 한국피코는 지난 85년 3월 자본금 30만달러로 설립된 유선텔레비전 안테나 생산업체로 부천공장에서 생산된 제품 전량을 해외에 수출, 그동안 짭짤한 재미를 보아왔다. 그러나 저임금 등으로 인한 노사관계 악화로 89년 3월 하루아침에 문을 닫고 관계자들이 미국으로 도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위 나흘째인 4월25일 현장에는 리버풀시 인근은 물론 멀리 캐나다에서까지 지원나온 동조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남녀 청년들이었으며 미국인도 8명이나 있어 한 · 미 합동 시위의 분위기까지 엿보였다.

 “사장 히치코크는 나와서 대화에 응하라” “몰래 도망쳐 나오다니 창피한 줄 알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보상이다” 등등의 구호가 적힌 피킷을 들고 “당장 돈을 내놓으라”는 글이 적힌 흰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의 요란한 구호에도 당사자인 히치코크 사장은 두문불출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시위가 진행되는 며칠 동안 회사는 정문을 굳게 잠근 채 방문자를 일일이 ‘검문’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회사대표와 회견을 요청한 기자에게 정문 경비는 “전화로 비서실을 통해 요구하라”고 한발자욱도 회사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가로 막았다. 전화로 몇번씩 이야기를 했지만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장은 통화를 거절했다.

 기자의 경우뿐만 아니라 히치코크 사장은 이곳 가톨릭교구장 대리 코스텔로 주교가 중재역할을 자청하고 나서 면담을 요청했는데도 이를 거절할 만큼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두고 있었다.

 끈질기게 회견을 요청하자 히치코크 사장은 직원을 시켜 자기 입장을 밝힌 성명서 2부를 기자에게 내주었다. 성명서 내용은 ①노조가 경영진을 납치하여 수주일 동안 인질로 삼았다 ②노사분쟁중 생산이 절반으로 줄어 어쩔수 없이 공장 문을 닫고 한국의 법률사무소를 선정, 회사를 정리하려 하자 노조가 법률회사를 위협하여 결국 법률회사가 손을 떼고 말았다 ③노동법이 보장하는 최저임금보다는 더 줬다 ④한국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회사는 2백만달러의 손실을 보았다는 것 등 자기 변명 일색이었다.

 그러면서도 히치코크 사장은 성명서에서 “한국피코회사는 노조원들에게 밀린 임금과 퇴직금이 있다”고 시인하고 있지만 그 금액이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노조위원장 유점순씨 말로는 대충 50만달러 정도라고 하지만 회사측은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하면서 고작 10만달러 이내일 것이라고 딴소리를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노조측으로부터 정식으로 위임을 받고 지난 10개월간 히치코크 사장측과 대화를 해온 뉴욕에 사는 변호사 林炳圭박사의 말을 들어보니 비교적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林변호사는 이 문제 해결에 두가지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보상금 총액과 방법을 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첫째 문제가 된 보상금 총액에 대해서는 柳위원장 일행이 뉴욕에 도착한 다음날인 4월13일 맨하탄에 있는 林변호사 사무실에서 그의 입회하에 노조대표 세사람과 히치코크 사장이 만나 일단 42만달라선에서 해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불방법에 있어 히치코크 사장은 노조가 한국피코회사를 양도받아 이를 되파는 형식을 취하든가(이 경우 자산뿐 아니라 부채까지 양도받게 됨) 노조측이 한국의 법원에 강제파산신고를 해서 판결을 받아내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으나 이 두가지가 한국법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법률문제로 옥신각신했고 나중에 히치코크 사장이 “한국피코회사의 주식을 무조건 노조에게 양도”하되 부채 부분은 떼어내기로 제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으나 이번에는 노조대표쪽에서 금액에 대해 이의를 제기, 42만달러 이상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당신이 한국에 있으면 위법으로 감옥에 갈 사람”이라고 따졌다. “우리가 정당한 돈을 받으려는 것이지 아쉬운 소리하러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고 노조측이 추궁하자 히치코크 사장은 얼굴을 붉히면서 “내게 위협을 하려는 모양인데 처음부터 사람을 인질로 잡고 불법 행위를 한 것은 노조가 아니었느냐. 당신들이야말로 범죄자들”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사장은 이윤만 추구하는 전형적 자본가”

 5시간15분 동안 양쪽을 살피면서 특히 회사측 대표가 법률상으로는 물론 도덕적인 면에서 큰 잘못이 있음을 시인하도록 대화의 분위기를 잡는 데 노력한 임변호사는 “손안에 들어온 새를 놓친 것 같은”섭섭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히치코크 사장쪽에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불법철수에 대한 법률적 · 도덕적 책임을 느끼지 않고서는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도덕성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기업의 이윤만을 위해 뛰는 전형적인 자본가라고 히치코크의 인상을 말한 임변호사는 “해결의 문은 현재 닫혀 있고 가까운 시일안에 풀릴 전망은 없다”고 말했다.

 지난 두주일 동안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東家食 西家宿 피곤한 생활을 하면서 매일 시위를 벌이고 있는 노조 대표들의 딱한 모습은 보기 안타깝지만, 조용한 동네에서 징치고 장고치며 때로는 돼지머리를 상에 올려놓고 고사도 지내는 이 별난 데모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지방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시위 시작부터 시라큐스市에서 발간되는 석간신문 〈헤럴드 저널〉(발행부수 9만3천부)과 조간신문 〈포스트 스탠다드〉(발행부수 8만5천부)가 지금까지 3차례 시위 관계기사를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했고 지방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도 뉴스로 보도해서 온통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피코 본사가 있는 리버풀(시라큐스市에서 서북방으로 약 8㎞)의 상공회의소 대변인 매릴린 쿨리 여사는 “임원회의에서 아직 이 문제를 거론한 일은 없지만 성격상 누군가가 한번 문제제기를 할 만도 한 일”이라고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미국내의 인권관계단체를 비롯해서 평화운동, 환경보호, 국제연대 및 노동단체와 교회 등 65개 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피코 노동자 후원회’는 미국에 온 한국피코 노조대표들의 활동을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알려서 히치코크가 손을 들도록 할 방침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미국 헌법권리센터 같은 기관의 도움을 받아 미국 법원으로 문제를 끌고갈 채비를 갖추고 있다.

 후원회 관계자들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이 문제만은 해결하고야 말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그들은 지난 3월20일 미국 상 · 하원 현역 의원 50명이 연서하여 히치코크 앞으로 공한을 보내 회사측에 서둘러 잘못을 시정할 것을 촉구한 사실에 그게 고무되어 있다.

 후원자의 집에 머물면서 새벽2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시위현장에 나가는 유위원장은 안테나 만드는 납땜질 일을 3년 한 주부로서 국민학교 6학년 된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어서 문제가 해결돼 빨리 집에 가야지 살림이 엉망일텐데…”라고 집걱정을 했고, 신혼생활 넉달만에 왔다는 방씨는 회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1년 남짓 운전기사로 일했는데 “미국 각처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힘이 생긴다”고 다소 여유를 보였다.

 “지옥의 불이 꺼지고 식어서 얼음천지가 된다 해도 노조대표들과는 절대로 만나지 않을꺼야…죽어도 안만나지….” 지방신문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한 히치코크의 마음이 징소리 장고소리에 바뀔 수 있을 것인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