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의 수모와 90년대의 선택
  • 주학중 (ADB 경제연구센터 소장) ()
  • 승인 199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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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후반에 학보병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4 · 19를 겪은 후 60년대초 외화를 바꿔주지 않아 고학의 유학길에 올랐던 경제학도도들은 여러가지 곤욕스런 경험을 겪었다. 특히 당시 경제학분야의 인기과목인 경제발전론 시간에 담당교수가 구제불능의 대표적 후진경제 사례로 한국경제를 지적할 때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비민주적 군사정권아래 놓여 있고, 사회적으로 절대빈곤과 비리가 팽배하며, 경제적으로는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아왔으나 낮은 생산성과 기술수준으로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혹독하게 깎아내렸다.

 그당시 우리나라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처참한 현실은 오랜 식민지 통치와 수탈, 남북분단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파탄, 6 · 25로 인한 막대한 인명 및 재산상의 손실 등 연속된 시련에 기인한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어했으나 영어가 서툴고 교수의 권위에 눌려 벙어리 냉가슴 앓듯 그 수모를 당하기만 하였다.

 그 이후 불과 한 세대라는 짧은 기간에 우리나라는 모범 개발도상국으로 솟아올라 ‘작은 호랑이’ 또는 ‘昇龍’으로 예찬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선 · 후진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누구나 한국경제의 발전과정을 배우고 모델로 삼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는 동 · 서진영의 대립관계에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사례로서, 또한 주변국은 중심국으로의 이행이 불가능하다는 종속이론에 대해 주변국의 숙명론을 반증하는 실증적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근래에 정책연구에 종사하는 한국학자가 외국에서 겪는 새로운 곤욕스러움은 우리의 분명한 시행착오까지 외국학자가 성공적이었다고 할 때 이를 바로잡아주는 일이다. 그러나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경제는 대외경제여건의 악화에 현명하게 대응하기보다는 봇물같이 터지는 욕구의 분출과 극심한 내부적 갈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의 이목은 이른바 ‘2세대 신흥공업국’인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쏠리고, 한국경제는 일본에 위협이 될 수 없다느니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렸다느니 하는 비아냥거림을 받기에 이르렀다.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할 시기

 분명한 것은 대내외 여건변화에 고루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자생적 대응능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경제가 이제 내우외환에 처해 선택해야 할 갈랫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는 급변하는 대외여건에 우선적으로 대응하여 선진국의 견제와 후진국의 추격사이에 우리가 설 땅을 먼저 넓히면서 내부적 갈등과 욕구분출을 우리 역량에 걸맞게 장기적이고 단계적으로 충족시키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내부적 갈등과 욕구분출을 먼저 해결한 후 국민적 합의가 뒷받침된 큰 응집력으로 악화된 대외여건을 타개하는 길이다. 근년에 나타나고 있는 빈번한 노사분규와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선택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두번째 길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러한 선택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고 또 언젠가는 만족할 만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순위와 시기를 가려야 하는 전략적 선택이므로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중진국인 우리의 경제적 역량을 갖고 선진국도 해결 못한 상대적 빈곤과 주택문제 등 분출하는 사회적 욕구를 단기간에 수용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의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대부분의 원자재를 수입해 쓰기 위하여 앞으로도 외화가득을 위한 수출은 계속 우리의 소중한 젖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끼리 제몫 찾기에 급급하여 국제경쟁력을 잃고 나아가 경제성장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까지 희생시켜야 하는가 숙고해보아야 한다.

제몫 찾기와 제몫 하기

 여기서 우리는 제몫찾기로 기운 우리의 선택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배분적 정의의 의미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데 있어서 소외된 계층으로 일반적으로 영세농과 저임근로자를 지목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경제사회발전과정이 함축하고 있는 시간, 나아가 역사의 영속성을 무시하는 단견이다. 우리경제의 놀라운 위상 변화에 대한 세대별 기여도를 구태여 가린다면 오늘날 배분적 정의에 대하여 목소리가 큰 40대 이하보다는 50대의 기여도가 더 크고, 50대보다는 60대가, 60대보다는 정년으로 은퇴하였거나 유명을 달리한 우리 어버이들의 기여가 더컸다. 이들은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저임에 대한 불만도 없이 일자리만 있으면 부지런히 일함으로써 우리경제의 고도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른 제몫 찾기라면 先代에 먼저 큰 몫을 돌려 주는 것이다. 오늘의 세대도 선대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여 후대에 유산을 남겨주도록 제몫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제몫찾기가 아닐까?

 세계는 우리가 어떤 진로를 선택하고 우리경제의 위상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우리가 각별히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끼리 自中之亂으로 60년대 이후의 필리핀, 파키스탄, 남미제국과 같이 이른바 ‘발전적 낭패’(development disasters)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오늘에 사는 우리가 제몫을 다해야 훗날 우리의 후손이 60년대의 우리 경제학도가 선진국에서 겪은 수모를 다시 겪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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