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阿共 흑인들의 ‘희망봉’
  • 김현숙 기자 ()
  • 승인 1990.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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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민권운동의 代父 넬슨 만델라는 누군인가

넬슨 만델라(72)는 남아프리카공화국 2천8백만 흑인들의 희망이다. 그는 무려 4반세기 이상이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왔으나 마침내 남아공의 ‘대변혁’을 이루어낸 원동력이 되었다.

케이프타운 동부지방의 템부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의 위트워터스런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여기서 그는 평생동지인 올리버 탐보(현 ANC의장)를 만나 이후 모든 행동과 이념의 동반자가 된다. 그들은 44년 청년동맹을 조직해 파업ㆍ불매운동, 시민불복종운동 등 비폭력 흑인인권운동을 펼쳐나갔다. 55년에는 경제개혁을 주장하는 ‘자유헌장’ 제정에 참여하여 사회주의자로 몰리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온건한 개혁주의자였으나 60년 흑인시위대가 무차별 발포를 당해 69명이 학살된 사건에 충격을 받고 이전까지의 비폭력저항운동에서 급선회, 폭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탐보는  ANC망명본부를 조직하기 위해 국외로 탈출하고 그는 국내에 남아 지하 무장투쟁조직인 ‘민족의 槍’을 결성한다.

그러나 무기를 든 지 17개월만인 62년 8월 체포되어 64년 국가전복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법정에서 그가 남긴 최후진술 가운데 “나는 백인에 의한 지배도, 흑인에 이한 지배도 원치 않는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나의 희망이며 이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은 지금도 모든 흑인들의 가슴에 복음처럼 남아 있다.

그가 교도소의 어둠속으로 사라진 뒤에도 그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감옥밖의 흑인혁명가들은 끊임없이 폭력투쟁을 전개했으며 흑인시위대의 손에 들린 피킷에는 어김없이 투옥되기전 청년 만델라의 사진이 붙어 있게 되었다. 지난 88년에는 감옥에서 70회 생일을 맞은 만델라가 폐결핵으로 생명이 위독해지자 부인인 위니 만델라를 중심으로 구명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를 석방하라는 시위는 남아공의 대통령선거를 전후해 극렬해졌으며 세계의 여론도 들끓었다.

이후 남아공 정부는 그를 교도소의 방갈로형 독방으로 옮겨주는 등 유화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피터 보타 당시 남아공 대통령은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집무실에서 만델라와 단독 회동해 “폭력투쟁을 포기하면 석방시켜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감옥에서의 타협이란 어불성설”이라며 정부측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보타에 이어 지난해 9월 출범한 드 클레르크 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對흑인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만델라의 무조건석방’이라는 조치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정은 고령의 만델라가 옥사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만델라의 정치적 도덕성을 이용해 남아공의 혼란을 수습해보자는 계산이 작용된 것이기도 하다.

이제 28년만에 공식적으로 흑백갈등의 현장에 재등장하게 된 그가 상징적 존재가 아닌 현실적 지도자로서 최근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흑인운동을 어떻게 이끌어가느냐에 따라 남아공의 숙제인 흑백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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