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문 뚫기 경쟁 再修에 三修까지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0.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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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수업 뒷전, 영어·상식 공부에 몰두

컴퓨터·고시학원 문전성시 … 고시촌도 초만원

지난 가을에 시작된 한차례의 구직전쟁은 이제 대충 마감되었다. 이 전쟁에서 낙오병으로 처진 취업재수생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재도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까. 또 새학기를 맞은 졸업반 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어떤 임전태세를 다지고 있을까. ‘취업비상’ 기류가 대학가의 숨통을 조일수록 오히려 장사 재미를 보는 곳이 있다는데 대체 그런 곳은 어떤 곳들일까. 학사취업의 현황과 관련해 이같은 몇가지 궁금증을 알아보았다.

지나 5일 서울 정릉의 국민대학교를 찾았을 때 교문 옆엔 ‘취업을 위한 토플강좌’의 현수막이 심란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학생회관내 취업정보실에서 만난 4학년 학생들의 표정 역시 개강의 술렁임과는 거리가 먼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다.


지방대 출신 푸대접 심해

“지난 학기에는 기본한자 1천8백자를 떼고 고문부터 시작해 속담, 순우리말 등 국어시험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상식과목과《타임》번역연습을 하고 가을엔 총정리에 들어가야죠.”

이른바 ‘언론고시 준비생인 영문과 4년 金應泰(26)군의 수험계획이다. 담요 2장에 책보따리, 여름옷가지들을 채운 베개 대용 여행 가방 하나를 전재산으로 학교앞 고시촌에 머물고 있는 그의 처지로서는 당연한 각오인 듯 했다. 학과수업과 입사시험 준비해 두는 비중에 대해서는 김씨를 비롯해 무작위로 만나본 대부분의 4학년생들이 ’웬만하면 수업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공통된 대답이었다.

이 학교 학생주임 禹永泰(44)씨도 교수들이 ‘기업순방’ 등 졸업생의 취업률 향상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펴주어야 한다며 현재와 같은 취업률 60%의 저조한 수준에서는 비싼 등록금을 들였음에도 전공을 공부하는 것이 도리아 성가신 장애물이 되는 기현상을 탈피하기 힘들다고 역설한다.

서울 시내 ㅇ통역관광학원 수강생인 방모(23)군의 경우는 ‘실리’를 위해 편법을 쓰고 잇는 대표적 사례. 대구 ㄱ대 4년생인 그는 교수의 배려로 몸은 서울에 둔 채 ‘적’만 걸어놓고 이번 학기 과정을 밟고 있는데 불안하긴 하지만 관광안내원 시험준비를 포기할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

부산 경성대 취업보도실의 가라앉은 분위기 역시 지방대 취업난의 절박함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89년 이 대학 졸업생의 순수취업률은 51%의 저조한 수준. 올해는 취업문이 더욱 좁아졌다고 취업담당자 孫熙坤(30)씨는 호소한다. “응시원서 교부조차 꺼리는 서울의 일류기업들, 정말 야박하더군요. 서울 지역 중심으로 사원 30%를 특채해버리는 ‘인턴사원제’ 때문에 우리 지방대 출신들은 더욱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간혹 自社 신규채용 때 ‘구호의 손길’을 뻗쳐주는 선배동문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혜택을 기대하기란 요행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얘기다.


“쯩, 쯩, 쯩을 따라!”

결국 자기PR의 신상명세서를 달고 취업정보지(혹은 취업정보센터)의 구직란 위에서 초조함을 달랠 수밖에 없는 이들 고학력실업자군의 양상은 품을 팔기 위해 인력시장에 나선 막노동자들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취업정보를 제공하고 구직광고를 내주는 등 대졸 실업자들을 상대로 연회비 4만원에 회원제 운영을 하고 있는 월간 리쿠르트사의 관계자들은 특히 “인문계·비인기학과·지방대 출신의 경우 자격증이 없으면 취업이 힘들다”고 말한다.

서울 종로 2가의 ㄷ컴퓨터학원을 찾았을 때 학원은 마침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몰려든 취업예비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7개월간의 컴퓨터프로그래머 과정을 이수하고 수료증을 받으러왔다는 세종대 체육학과 졸업생 金京善(28)군을 만나보았다. “운동장에서 뛰던 몸을 컴퓨터 앞에 고정시키자니 오죽했겠습니까. 첫달에 체중이 6킬로나 빠졌고 한동안 두통약을 먹어야 했지요.” 언제 발령날지 모르는 중등교사자격증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오랜 체육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진로의 ‘대전환’을 꾀했다는 사연이다.

컴퓨터학원과 더불어 우후죽순격으로 신설되고 있는 고시학원 역시 취업난에 편승해 호황을 누리고 잇는 예이다. 한국학원총연합회는 89년 12월 현재 서울에만 1백30개의 고시학원이 잇는 것으로 집계하고 잇는데 이는 지난 1년 사이 곱절로 불어난 숫자다. 공무원, 주택관리사, 중개사 등 수강생들의 희망직종도 다양하며 수험준비기간은 보통 6개월~2년이다. 최근에는 직업관의 변화에 취업난까지 겹쳐 학사출신의 공무원 선호도가 매우 높아졌다고 서울 노량진 ㄴ고시학원 朴永春(40)상담실장은 말한다. “두번 떨어지고 세 번 떨어져도 성적이 크게 모자라서 떨어졌다고는 생각들을 안하지요. ‘시험’이란 낙방생에게는 ‘아편’과 같은 겁니다.”


‘시험’에 인이 박힌 취업재수생

시험에 인이 박힌 취업재수생들이 모여든다는 신림동 서울대 인근의 고시촌 현황은 어떠할까. 깍아지른 듯 가파른 산비탈 골목마다 대부분 가정집을 개축한 고시원들이 난립해 있는데 한낮의 봄볕이 무색할만치 인적이 뜸하다. 1백50~1백60개로 추산되는 이 일대 고시원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신림고시원(방90개)을 찾았다.

“근년 들어 지방대 출신 입주생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고시생들만으로야 고시촌이 이렇게 번창하겠습니까. 아무래도 취업난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주인 金相淳(59)씨는 고시생과 취업재수생의 비율을 6대4 정도로 파악한다. 비좁은 통로 양편으로 1평 남짓한 방들이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이런 고시원에서 입주생들은 하루 세끼 식사시간에나 잠깐 바깥바람을 쏘일 뿐 종일 독방에 박혀 책과 씨름한다. 움집에 혈거하는 구도자들처럼 그들의 밥상 위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젓가락질 소리만이 달그락 거린다. 평균 취침시간은 새벽 3시, 옆방 입주생과 안면이 생기면 공부에 방해가 되므로 일체의 친교를 기피하며 두어달에 한번씩 거처를 옮기는 것이 상례라 한다. 월13만원 정도의 방값이 부담스러워 사설독서실의 허름한 간이방으로 옮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4전5기, 7전8기… 고시촌에 입주해 있다가 구직에 성공해 박차듯 고시촌을 떠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빠끔히 방문이 열리고 신경질적인 항의가 들어온다.

“아까 오전에 뚜닥뚜닥한 것 아줌마가 시켜서 한 겁니까. 요전에도 사흘 공쳤잖습니까.”

빈 방이 난 김에 못을 좀 쳤었다고 해명하며 주인은 과민해진 입주생을 달래 보낸다.

신상 노출을 꺼리는 잠입자가 되어 ‘시험’에 합격하는 그날까지 삶의 모든 욕망을 죽이고 사는 사람들. 외부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는 고시학원에 나가거나 구직정보를 얻는 일등 오로지 취업과 연관된 것뿐이다. 처절한 인간소외를 자초하는 취업재수생들의 실상을 목격하고 내려오면서 취업시험 역시 입학시험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지옥’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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