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이적’의 팽팽한 대립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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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 교양교재 파문 확산 ‘공안’대 ‘자유’싸움 비화 조짐

공안 당국이 이적성을 문제 삼아 집필자인 교수 9명과 출판인을 사법 처리하겠다고 발표한 경상대 교양과목 교재 ≪한국 사회의 이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붉은 사상’의 전파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당국의 단호한 의지는, 이번 ‘이적성 교재 수사’를 계기로 절정에 오른 느낌이다. 이에 대해 당사자들과 지식인 사회 일각은 검찰 발표를 ‘학문과 사상의 자유 침해 행위’로 규정하여 정면으로 맞설 태세여서 이적성을 둘러싼 교재 시비는 앞으로 더욱 가열될 듯하다.

 대검 공안부(부장검사 최 환)가 충격적 내용의 수사 상황을 공개한 것은 8월2일이다. ‘지방의 ㄱ대학에서 펴낸 교양 교재가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부추기는 등 이적 성향이 있다고 판단 돼 공동 저자인 교수 7∼8명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은 교수들을 소환해 혐의를 입증하는 대로 사법처리하겠다고 말했지만, 문제된 교재 이름과 관련자 명단은 밝히지 않았다. 이유는 ‘수사상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검찰의 ‘관련 정보 비 공개’ 원칙은 하루도 채 안돼 무너졌다. 검찰 발표를 단서로 가 언론사가 다투어 확인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문제의 대학 교재는 국립 경상대학교의 1∼2학년생 대상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이며, 이책의 집필자는 정진상(사회학) . 김준형(사회교육) . 이혜숙(사회학) 등 경상대 교수 9명라는 사실이 밝힌 ‘교수의 부인’ 신원도 함께 확인됐다. 8월3일 오후부터 검찰이 적시한 이적 표현 부분은 사실 입증 절차 없이 언론에 그대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또 익명이나 두문자로 처리됐던 교재 이름과 관련자 명단도 곧 실명으로 복원됐다.

“검찰‘수사전 발표’문제 있다”

 검찰이 현재 공식으로 내놓은 견해는 ‘이 책이 계급 혁명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검찰은 이 책 제1장(한국 사회의 이해의 기본 시각) 내용이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은 마르크스주의의 실패가 아니며 김영삼 정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로 무장 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석한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기본 원리로 하는 헌번 정신에 비춰볼 때 명백하게 문제된다’는 것이다.

 검찰은 또 제2장(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전개)부터 제8장(한국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까지의 내용에 대해서도 ‘좌익을 독립운동 세력으로 보고, 6 . 25를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했다’며 이적성 부분을 일일이 적시했다. 검찰은 결론으로‘≪한국 사회의 이해≫는 학생들에게 한국 사회가 모순에 가득 차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지배 계급을 타파해야 한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이르도록 구성되어 있어 북한을 이롭게 하는 책자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공안 당국의 발표는 사회 각계로부터 즉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언론은 검찰 발표를 근거로 ‘대학 구내에 좌경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큰 일’이라고 걱정하며 신속하고 단호한 조처를 촉구했다. 이에 답하듯, 8월4일 열린 국회 교육위 질의 . 답변에서는 교육부장관이 직접 문제가 된 책자를 들고 나와 ‘철저히 대처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까지 있었다.

 하지만 정작 ‘붉은 교수’로 낙인 찍힌 공동 집필자들은 검찰발표 내용을 전면 부인한다. 8월 4일 오전, 경상대 정진상 . 장상환 교수 등 공동 집필자 8명은 ‘≪한국 사회의 이해≫ 사건에 관한 우리의 견해’라는 이름으로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교수들은 “≪한국 사회의 이해≫가 적을 이롭게 하고 북한의 주장을 여과 없이 받아들었다고 주장하는 검찰의 발표는 이책을 명백하게 오독한 결과이거나, 우리 사회의 진보적 지식인을 음해하기 위한 공작의 소산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또 장상환 교수(경제학)는 기자회견 ≪시사저널≫에 보낸 글을 통해 “우리는 모든 인간 사회의 객관적 사실이라는 차원에서 계급간 대립을 인정했을 뿐, 폭력 혁명을 선동한 적은 결코 없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으므로 경상대 교수들의 이적성 혐의 여부는 사법 절차를 통해 가려지게 됐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나타난 검찰 수사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먼저, 검찰은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쳐 임명된 현직 국립대 교수들을 문제 삼았으니만큼, 발표하기 전에 관련자들을 불러 꼼꼼히 조사하는 등 좀더 신중한 자세를 보였어야 했다. 사건 당사자인 경상대 교수는 “학교 앞 서점 주인이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난 지난달 27일에야 우리책이 문제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이적 표현물’ 발가 나온것이다. 내사 단계인 사건을 서둘러 언론에 발표한 것은 공안 분위기에 편승해 여론 재판을 유도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교권 침해 . 인권 유린” 주장도

또 하나의 문제는 학문 영역에 대한 법 적용 범위의 문제이다.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교수들의 학문적 작업에 국가보안법이라는 냉전 시대의 악법을 적용해 사법 처리하려는 것은 학문 .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다”라는 주장이 나온다. 8월6일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소속 교수들은 성명을 내고 ‘교수의 고유 직무인 강의와 성적 평가에 대해 공안 당국이 간섭하고 나선 것은 민주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교권 침해이며 인권 유린’이라고 주장했다.

 경상대 교수들은 검찰 소환에 절대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검찰은 관련자들이 소환에 불응하면 강제 구인하겠다고 밝혔다. 민교협을 비롯한 몇몇 지식인 단체들은 이번 사건에 좀더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대책위원회를 결성할 움직임이다. 검찰은 곧 교수9명에 대한 강제 구인을 실시한다. ‘학문’과 ‘이적’ 사이의 싸움은 이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은 교수들의 유죄 . 무죄에 관계 없이 국가 사법체계와 대학 양쪽에 엄청난 상처를 남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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