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과 보안법 ‘진검 승부’
  • 서명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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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법 위반’ 공판 재개…정치 생명.법률 운명 ‘좌우’할 듯

재야 운동가에서 야당내 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차세대 유망주로 떠오른 한 정치인이 실정법의 벽 앞에서 끝내 금배지를 떼게 될 것인가. 아니면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요구받아온 법률이 현실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인가.

 8월17일 재개된 민주당 이부영 최고위원에 대한 국가보안법 관련 재판(서울형사지법 형사3부)이 법조계와 정치권의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최고위원이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된 것은 89년 4월. 당시 이씨는 제도권 정치인이 아닌, 대표적인 재야 운동조직인 전민련의 상임 공동의장이었다.

 5년에 걸쳐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사건일지 참조) 세월만큼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우선 당사자인 이씨는 재야 운동가에서 국회의원으로 신분이 바뀌었고, 현재 제1야당의 최고위원이다.

공판 일자 확정에‘정치 의도’ 개입됐나
 당시 쟁쟁한 재야 변호사들로 구성됐던 변호인단 12명 가운데 조영래.황인철 변호사는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정성철 변호사는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정무제1장관 보좌관을 거쳐 현재는 민자당 서울 강남 을 지구당 위원장으로 여권에 몸담고 있다. 이번 재판에서는 나머지 9명과 함께, 홍영기 장기욱 박상천 강철선 허경만 이원형 신기하 노무현 강수림 장석화 정기호 오 탄 등 민주당의 율사출신 정치인이 총동원될 예정이다.

 야권에서는 대법원의 원심 일부 부분 파기환송(사건 일지 참조) 이후 1년 7개월 만에 재개된 이번 공판을 ‘국보법 재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만큼 공판 재개 시기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최고위원에 대한 공소 사실은 △국가보안법 관련 3개 항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노동쟁의조정법 △정기간행물법 등 모두 6개 항이다. 이 가운데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혐의는 지난해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 취지로 파기됐지만, 나머지 5개 항은 유죄로 인정됐다.

 그런데도 변호인단과 야권이 유독 국보법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 법이야말로 이최고위원의 정치 생명을 좌우하는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집시법이나 정기간행물법을 적용하면 유죄가 인정되더라도 소액의 벌금형이나 과태료 정도가 부과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법조계의 판단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경우는 다르다. 국보법에는 벌금형이 없기 때문에 유죄 판결은 곧 의원 배지를 떼야 하는 상황과 직결된다. 일반 형사 사건으로 기소된 이최고위원은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의원 직을 상실하게 된다.

 야권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시기 문제이다. 야권은 대법원이 파기 환송한 뒤 지난 3월 형사 3부에 배당된 이 재판이 하필이면 왜 지금 열리는가에 대해 강력히 의문을 제기한다. 이최고위원의 발언으로 시작된 김일성 조문 파동이후 ‘신공안정국’이 가파르게 조성되고, 이창복.황인성 씨 등 재야 인사들에게 국보법이 무차별 적용되는 상황에서, 이최고위원 관련 공판을 새삼 재개한 배경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야권은 오랫동안 잠자던 이의원 관련 사건이 법정에 다시 오르게 된 배경에는 이최고위원이 폭로한 ‘훈령조작 사건’으로 말미암아 물러났던 이동복 전 안기부장 특보가 간접적으로 일선에 복귀하는 등 최근의 보수 강경 흐름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조문 파동 직후 정보.경찰 기구를 중심으로 한 보수 강경 세력들 사이에서는 ‘이의원 같은 인물이 국회내 정보위원회에 있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꼴’이라는 반발론이 거세게 일었고, 심지어 이의원을 정치 일선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극단적인 정서까지 형성돼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미묘한 시기를 선택한데에 법조계 바깥의 시각과 정서가 작용했으리라는 관측을 강력히 부인했다. 청와대의 한고위 관계자는 “검찰조차도 공판 재개 일자를 사전에 몰랐다. 재판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은 사법부를 모독하는 행위다”라고 못박았다. 이 사건을 맡은 형사3부 변동걸 부장판사는 “재판 기일 선정은 전적으로 내가 한 것이다. 재판 날짜를 잡는 것부터가 사법적 판단의 시작이다. 하필 지금이냐는 시각도 있을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오히려 너무 늦었다는 비판론도 나올 수 있다.‘사건이 있기 때문에 재판을 한다’는 것 외에는 어떤 정치적 고려도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민주당, 강공.지연 전술 동시에 펼쳐
 재판이 재개된 배경이야 어떻든, 이의원 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정치적 파장에 휩쓸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변호인단 가운데 한 사람인 장기욱 의원(민주)은 “국가보안법은 근본 성격상 정치관계법이며, 정치범에 관한 사건은 규범과 사실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으므로 기소에서부터 판결에 이르기까지 정치 상황과 무관할 수 없다. 이는 숙명적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법률 사건’에 대처하는 민주당 변호인단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재판 연기를 요청하고 정기국회 기간에 국보법 개폐를 관철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판을 강행할 경우 국보법 적용의 타당성에 대해 강력히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최고위원이 의장으로 있는 민주당 개혁모임측은 11일 긴급 의원회의를 열어 재판연기를 주장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개혁모임은 성명을 통해 이최고위원에게 적용된 법이 ‘대표적인 악법’으로 개폐 대상에 올라 있는 것이며, 그동안 보류해온 공판을 재개한 시점도 적절치 않으므로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17일 첫 공판에서 재판부의 인정심문에만 응한 뒤 증인 채택과 자료 보완의 필요성을 들어 재판부에 추후 지정을 요구했다. 변호인단은 이렇게 재판을 끌다가 9월 정기국회가 열리면 현역 국회의원이 의정 활동에 전념해야 한다는 현실론과 ‘회기중 현역 의원은 현행법이 아닌 한 불체포 특권을 누린다’는 법조항을 내세워 회기 동안 재판 중지를 요구할 예정이다. 만일 변호인단의 요구대로 재판이 지연되고 그동안 정기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이 개폐되면, 그뒤 재판이 진행되더라도 면소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변호인단의 판단이다.

 민주당 역시 어떻게 해서든지 시대 흐름에 걸맞지 않는 국보법을 개폐하는 것을 정기국회 전략의 최우선 목표로 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 이기택 대표는 12일 기자 간담회를 갖고 신공안정국을 강력히 비판하며 “국가보안법을 개폐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지난해 정기국회 예산 파동 때 양당 총무가 연초 임시국회에서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를 다시 논의한다고 합의했고, 지난 5월 여야 영수회담에서 김대통령이 “국보법 개폐는 국회에서 논의하는 대로 따르겠다”라고 약속한 점을 들어 총공세를 펼칠 예정이다. 신민당 역시 정기국회에서 ‘국시 논쟁’을 벌여서라도 국보법 개폐를 이뤄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민주당은 가파른 공안 정국이 조성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정기국회야말로 국보법 개폐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다. 최근 미국 국무부가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이 남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국보법을 폐지 또는 개정해야 한다고 밝힌 데 이어, 미.북한 고위급 회담이 타결됨으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 기류가 걷힐 수밖에 없는 ‘대세’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판 지연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변호인단은 국보법과 일전을 불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즉 증인과 관련 자료를 동원해 국보법을 탄생시킨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적법성에서부터 당시 전민련 의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최고위원에게 지나치게 확대 적용된 국보법 적용의 타당성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어떻든 이최고위원에 대한 국보법 관련 공판은 작게는 한 정치인의 장래, 크게는 국보법이라는 시대적 민감성을 띤 법률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건이 될 것 같다.
徐明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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