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법 속으로 ‘귀환’한 어부들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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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사건’ 5공때 집중…‘고문.조작’ 논란

통일원은 최근 남북 어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납북자 현황을 발표했다. 아울러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이들의 송환을 위해 적극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대다수 국민은 정부 방침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하지만 이같은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도 한서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납북된 뒤 귀환했다가 ‘간첩죄’로 복역하고 있는 이부들이다.

복역중인 어부 3명 수사관들 고소

이들 가운데 몇몇은 돌아온 뒤 실제 간첩 행위를 시인했다. 또 몇몇은 이미 만기 출소하거나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나 귀환 어부사례에서 한결같은 점은, 한번 간첩으로 의심받은 사람은 좀처럼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법원에서 간첩임이 입증된 어부들은 복역중에도 유죄를 부인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은 현재 북한에 억류된 사람들과 똑같이 ‘불가항력’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갔는데도,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간첩으로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올 7월, 김정묵.정 영.이상철 씨 3명은, 자기네를 수사했던 수사관들을 불법 체포.감금, 폭행.가혹행위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3명은 모두 간첩죄로 복역하고 있는 귀환 어부들이다.

고소장에 따르면, 이들은 무사히 송환된 뒤 한참 지나 갑자기 조사를 받았으며,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유죄로 판결받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귀환 어부들은 한결같이 수사 받는 과정에서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간첩 행위의 증거로 ‘없는 사실’까지 지어냈다는 것이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도움을 받아 검찰에 고소장을 낸 김정묵씨(60)도 그 중한 사람이다. 그는 납북되어 4박5일간 북한에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간첩으로 잡혀갔다. 김씨가 납북됐던 것은 58년 5월게, 조기를 사려고 연평도로 가다가 안개가 많이 낀 탓에 항로를 이탈해 북한 경비정에 붙잡혀 끌려간 것이다. 북에서 5일간 체류하다 귀환한 그는 당국의 처벌이 무서워 납북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김씨는 납북됐다가 돌아온 다른 어부들이 수사기관에서 당하는 고충을 익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 체류 사실을 신고하지 않은 점은 그의 결정적인 과오였다. 그는 다만 그 기간에 ‘표류중이었다’고 허위 신고했다.

그의 범법이 밝혀진 것은 귀환한 지 24년이 흐른 82년 8월이다. 그해 7월 7일 새벽, 수사관 2명이 찾아와 “잠깐 물어볼 것이 있으니 가자”라며 느닷없이 김씨를 연행해 간 것이다. 그가 끌려간 곳은 서울 서부경찰서. 김씨는 거기에서 다시 서울시경 대공분실로 옮겨져 구타는 물론, 겨잣물 고문 등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고소장에서 주장했다. 고문한 이유는 물론 간첩 행위를 낱낱이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연행된 지 38일 만에 검찰에 송치된 김씨는, 6개월 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김씨는 최근에 낸 고소장에서 자기의 죄를 “1심 재판이 끝날 때까지 가족과 변호인 그 누구의 조력도 차단된 상태에서, 폭력과 협박에 못이겨 자백한 거짓 사실이다”라고 주장한다.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된 정삼근씨952)도 간첩 행위를 부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68년 6월 조기잡이를 나갔다가 연평도 근해에서 납북된 정씨는, 귀환 직후 사법 당국에서 모든 조사를 받고 생업에 복귀했다. 그런데 17년이 지난 85년 느닷없이 다시 연행된 것이다. 하지만 근 두달 간의 수사 끝에 정씨는 간첩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정씨 말에 따르면, 수사관이 베껴 쓰라고 건네준 종이뭉치에는 ‘남들은 고기잡이에 열중하고 있는데, 나는 고기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탐지 활동을 했다’ 식구들이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뒤 이북방송을 청취했다‘는 등 날조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씨는 못쓰겠다고 버티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모진 고문과 매타작이었다고 말한다. 정씨는 실형 7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91년 초파일 특사로 풀려났다. 정씨도 최근 고소에 관심을 보인다. 자기 결백과 수사 중 고문 받은 사실을 밝혀내겠다는 것이다.

자백에 의한 유죄 증명은 인권 침해 소지

민가협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분단 이후 납북됐다가 돌아와 간첩으로 검거된 귀환 어부는 모두 16명이다(오른쪽 명단 참조). 물론 국가보안법에 걸려들었다가 무죄가 입증되어 풀려나나 사람도 있다. 93년 2월 항소심선고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받은 안무희씨(48)가 그 사람이다(<시사저널> 제 175호 참조). 하지만 이씨처럼 간첩 혐의가 무죄로 입증되어 풀려난 사례는 문민 정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 민가협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귀환 어부 수가 실제로는 훨씬 많은 것으로 추측된다. 민가협 남규선간사는 “귀환 어부 간첩사건은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5공 대 집중 발생했다. 조작 피해를 당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은 조사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국가보안법 사범을 오랫동안 변론해온 변호사들에 따르면, 귀환어부 간첩사건의 가장 큰 특징은 피의자를 증거 없이 수사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한 사건에 관련된 여러 피고인들이 서로 상대편의 간첩 행위를 시인하면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로 되었던 셈이다. 자백에 의한 유죄 증명은 일반 형사 사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수사 방식이지만, 피의자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어 논란이 된다.

하지만 바로 이같은 ‘증거 불충분’ 때문에 문제는 더욱 꼬인다. 귀환 어부나 그 가족들이 아무리 무죄를 입증하려고 해도 유죄 사실과 반대되는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정 영씨는 83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 복역중인 귀환 어부 간첩이다. 그의 딸 정상숙씨는 “증거란 주변 사람들이 피해볼까 무서워 시키는 대로 증언한 것말고는 없다. 지금 헌법에 보장된 재심을 청구하려면 위증 확정 판결을 받아야 가능한데, 친척들을 상대로 위증죄를 물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귀환어부 간첩사건은 지난날 군사 독재의 유물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김정묵씨의 맏딸은 처지를 비관해 방황하다가 80년대 말 끝내 자취를 감췄다. 정삼근씨의 딸은 수사관이 들이닥쳐 압수 수색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충격을 받았는데 아직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이다.

납북 어부 가족들 중 일부는 고소장을 냈지만 고소 내용은 이미 공소 시효를 넘겼다. 그럼에도 이들은 항고.재항고 심지어 공소 시효를 인정받기 위해 헌법소원에까지 매달릴 결심이다. 이들은 비록 유죄 판결을 뒤집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하소연할 기회라도 얻기를 기대하고 있다. 귀환 어부들의 사례는, 보안법 위반에 대한 법 적용도 철저한 증거 수사와 변호인.친지 접견 등 적법한 절차를 존중하지 않으면 보안법 자체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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