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악마인지 밝혀내겠다”
  • 김당 기자 ()
  • 승인 1994.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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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사건’ 강기훈씨 출소…고소.고발 통해 재심 청구 나서

‘악마’가 출소했다. 전대미문의 유서 대필 사건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던 이 악마는 구속된 지 꼭 3년 54일 만인 8월17일 새벽 4시 10분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3년 전 이맘때 검찰의 한 고위 간부는, 노태우 정권의 공안 통치에 항거해 서울 서강대에서 분신후 투신 자살한 김기설씨(당시 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필해준 배후인물로 지목한 강기훈씨(당시 전민련 총무부장)를 악마로 비유했다. 그때 검찰 수사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이 간부는 내부 ‘훈시’를 통해 “이 사회에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고 있다. 검찰은 국가 최고권력 집행기관의 자격으로 이런 악마를 응징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강씨가 ‘유서를 대필한 확실한 범인’이라고 단정했다. 악마를 응징한 이 검찰 간부는 지난해 이른바 슬롯 머신 사건에 연루돼 옷을 벗었다.

“결백 증명 못하면 살아도 죽은 목숨”
유서 대필, 즉 누군가 유서를 대신 써주면서 죽으라고 부추겼다는 예단은 그의 착상이 아니었다. 김씨가 분신 자살한 직후 서강대 박 홍 총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이들은 죽음의 블랙 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다”라고 폭로함으로써 잇단 청년.학생들의 분신 자살로 불안해하는 국민에게 마치 재야 운동권이 분신 자살조 명단을 짜놓고 죽음을 정권 퇴진 운동에 이용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박총장의 발언은 즉각 ‘분신을 부추기는 조직적 세력’을 기정사실화하는 검찰 총수의 수사 지시로 이어졌다.

그뒤로 박총장은 어둠의 세력의 배후를 밝히지 않았으나, 검찰은 강씨를 배후로 지목해 이른바 자살방조죄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추가해 기소했고, 법원은 검찰 스스로 부끄러워한 대로 ‘범죄 일시와 장소도 밝혀내지 못한’ 공소장을 토대로 강시에게 징역 3년형 및 자격 정지 1년 6개월의 유죄를 선고했다. 현행 형사소송법에는 ‘공소 사실 기재는 범죄의 시일.장소와 방법을 명시하여 사실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검찰은 강시를 유서 대필자로 기소하면서도 언제.어디서.어떻게 유서를 썼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이에 대한 강씨의 답변은 일관되게 “내가 쓰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공소 미비’때문인지 검찰은 명동성당에서의 필적공방 때만 해도 ‘자살방조죄만 가지고도 공소 유지에 자신이 있다’고 공언했으나 기소 단계에서는 ‘혁노맹’ 가입(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덧붙였다. 이에 대한 강씨와 혁노맹 관계자들의 일관된 증언은 “(심사에 떨어져) 가입하지 않았다”라는 것이었으나, 법원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유죄를 선고했다.

교도소 문을 막 나선 강기훈씨의 소감 첫마디는 “나올 때나 들어갈 때나 달라진 것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소감은 △당시의 ‘분신 배후설’에서 ‘주사파 배후설’로 바뀐 박홍 총장의 주장이 여전히 검찰과 언론의 지지를 받고 있고 △당시 명지대 강경대군을 타살한 공안통치가 이른바 신공안통치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위력을 떨치는 현실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한 까닭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죄이기 때문이다. 강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의 결백을 입증하지 못하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지금, 특히 그가 기자회견에서 밝혔듯 “박 홍 총장이 공안 정국의 예광탄을 날렸지만 공안 정국으로 몰고 가려는 숨은 의도가 더 중요하다”라는 현재 상황에서 그가 기댈 언덕은 별로 많지 않다. 92년 항소심을 앞두고 결성된 ‘유서사건 강기훈씨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공대위.위원장 함세웅 신부) 자문 변호사로서 강씨의 재심 청구 관련 소송을 맡게 될 이석태 변호사에 따르면, 현재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하거나 재심을 청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법적으로 무죄임을 입증하려면 재심을 청구할 명백한 사유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러려면 자기에게 유죄를 언도.선고한 검찰과 사법부를 움직여야 한다.

“정권 바뀌어야 진실 밝혀질지도…”
상대적으로 쉬운 길은 유엔 인권위에 제소하는 것이다. 이는 판결의 오판 여부보다는 절차상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즉 △피의자에게 묵비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강요한 것 △김기설씨의 친구 홍성은씨를 상대로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강씨에게 불리한 진술을 유도해 재판 전에 법정 증거보전 신청을 한 것 △공소장에 범죄 사실을 특정하지 못한 것 등 강씨의 재판과 관련한 형사소송법상의 문제가 제소 사유로 검토되고 있다.

이석태 변호사에 따르면, 유엔 인권위의 결정은 권고사항일 뿐 실정법적으로 재심을 요하는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나 그 의미는 크다. 그러나 이변호사는 “인권위 제소는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만큼 우선 김형영씨(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를 8월중에 위증죄로 고소.고발한 뒤에 제소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강씨와 변호인단으로서는 재판 당시 유서 필적을 감정한 김형영씨를 허위 감정 또는 위증 혐의로 공대위가 고발하거나, 강씨가 직접 고소하는 방안이 현재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김씨를 고소.고발하는 것은 사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정법상 재심을 청구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1차적 관건이다.

현행 형사소송법상의 일곱 가지 재심 사유중에서 강씨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공대위는 그 중에서도 ‘원판결의 증거된 증언.감정.통역 또는 번역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허위인 것이 증명된 때’(420조 2호)를 법적으로 다툴 만한 조항으로 본다. 따라서 강씨의 재판에서 유죄 판결에 결정적 근거가 된 김형영씨의 필적 감정과 법정 증언이 허위 감정 또는 위증임을 입증하면 일단 재심 청구의 길은 열리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검찰이 김씨에 대한 고소.고발 건을 이유 있다고 판단해 김씨를 기소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공대위는 이미 과거에 검찰이 판단하고 대법원에서 확정판결한 사건을 검찰이 뒤집는 판단(기소 결정)을 할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검찰이 당연히 불기소처분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헌법소원까지 반드시 갈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공대위는 어차피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헌법재판소에서 위증의 소지가 있다는 결정(기소명령)을 내릴 가능성보다는, 다른 민감한 정치적 사건처럼 판단을 미룬 채 오랜 시간이 흐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따라서 공대위는 검찰이나 헌법재판소에서 일부라도 허위 감정 또는 위증의 소지가 있다는 결정이 내려지면 재심은 대성공이라고 본다. 물론 검찰이 김씨를 기소하더라도 법원이 국과수의 공신력을 뒤집는 판결을 내릴지 의문이다. 김형영씨는 강씨의 항소심 재판을 앞두고 다른 ‘허위 감정’건으로 기소되었으나, 법원은 ‘뇌물(사례비)은 받았으나 허위 감정은 안했다’라는 검찰과 김형영씨의 논리를 인정해 뇌물수수 부문에만 유죄를 선고했다.

김씨는 지금도 “내가 받은 1천5백만원 가운데 내가 쓴 것은 50만원밖에 안된다. 그것은 사례비이지 허위 감정에 대한 대가나 뇌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인지 피의자 처지인 김씨는 여전히 당당하다. 강씨가 출소한 직후 김씨는 자기의 문서감정원 사무실에서 당시 재판부에 서면으로 제출한 감정소견서를 보여주며 “이렇게 똑같은데 어떻게 유서 필적이 강기훈씨가 쓴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그때나 지금이나 소신 감정을 한 데는 거리낌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제 강씨는 김씨의 유죄를 이끌어내야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석태 변호사는 “재심은 아직 저 멀리 있다. 양심적인 국민과 언론의 바른 여론 조성이 되지 않는 한 어쩌면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 12년 만에 밝혀졌듯이 정권이 바뀌어야 진실이 가려질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강기훈씨는 △위증죄 고소.고발 △검찰의 불기소처분 △헌법소원 △헌법재판소의 결정(기소명령) △검찰의 기소 △위증죄 확정 판결(1심.대법원) △재심 청구 △재심(1심.대법원) △무죄 확정이라는 진실 밝히기 장정 첫발을 막 내딛은 셈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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