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 송환 ‘맞교환’이 묘수
  • 김당 기자 ()
  • 승인 199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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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고상문씨 등과 ‘비전향 장기수’ 부분타결 모색중

북한 당국이 최근 김국홍(69ㆍ본명 김인서)ㆍ함세환(63)씨 등 이른바 비전향 장기복역 출소자들의 즉각 송환을 거듭 요구하고 나서 관심을 끌고 있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정부 기관지〈민주조선〉8월19일자 논평을 통해 환북을 요구하는 김인서ㆍ함세환 두 사람이 전쟁 포로라면서, 이들을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고 있는 것은 ‘국제법도 적십자 인도주의도 안중에 없는 범죄 행위’라고 주장했다.

 북한 당국이 두 사람을 포함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을 주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시사저널〉은 지난해 4월1일자와 6월10일자에서 이들의 송환 문제를 맨 처음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최근 한승주 외무부장관이, 79년 4월 노르웨이에서 실종되었다가 지난 7월 말 국제사면위원회의 발표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것이 확인된 고상문씨(46ㆍ전 수도여고 교사)의 송환 협조를 위해 노르웨이 등 북유럽 3국을 순방중인 시점에 나온 ‘맞대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납북자 4백명 전원 송환 요구는 ‘무리’
 현재 겉으로 드러난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노 코멘트’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92년 7월 이인모씨 등 비전향 장기수와 납북자 문제를 일괄 타결하자고 제안한 바 있고, 그 이후 새로운 제안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는 지금까지 유효한 공식 입장인 셈이다. 일괄타결은 한마디로 납북 어부 등 억류자들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한꺼번에 풀자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이인모 노인과 동진호 선원의 송환을 연계했던 것도 그런 연유이다.

 따라서 정부의 공식 입장은 비전향 장기수와 납북 억류자 들을 상호주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해 일괄 타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원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통일원이 실태를 파악한 방북 희망 비전향 장기복역 출소자는 3명 정도(북한이 석방 및 송환을 요구하는 비전향 장기 복역수 2명을 보태도 5명 수준)인 데 비추어, 정부가 공식 발표한 납북자는 55~87년 총 4백명이 넘는다는 점에서 ‘솔직히 말해 무리한 요구’이다. 따라서 정부도 우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것은 비전향 장기수와 동진호 선원 및 고상문씨를 맞교환하는 것이다.

 사실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지난 7월까지만 해도 납북 억류자와 비전향 장기수 문제는, 김영삼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 반드시 거론하겠다고 천명한 이산가족 문제와 함께 중요한 정상회담 의제 중의 하나였다. 통일원의 한 관계자도 “당시 정상회담을 앞두고 주무 부처인 통일원을 중심으로 예상되는 의제를 개발했다. 그 중 하나가 저쪽에서 비전향 장기수 송환 문제를 거론할 경우 이쪽에서 자연스럽게 동진호 선원 송환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정부는 한국에 연고가 없고 방북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이산가족 재결합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정상회담이 열렸을 경우 이는 회담 결과를 기대하는 양쪽 모두에게 눈에 보이는 선물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동진호 선원 12명 송환 문제와 함께 정부가 현재 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것은 국제사면위원회의 발표와 언론의 대대적 보도로 널리 여론화한 고상문씨 송환 문제이다. 한국 정부는 고씨가 억류(북한은 의거 입북을 주장)된 것을 확인하자 이를 계기로 북한의 인권현실에 대한 공세를 펼쳤으나, 고씨의 생존이 확인됨으로써 고씨의 송환을 요구할 권리와 함께 고씨를 데려올 책임을 동시에 떠맡게 되었다. 특히 김대통령은 국제사면위원회의 발표 직후에 북한의 인권 현실을 우려하면서 고씨를 포함한 납북 억류자들이 조속히 송환될 수 있도록 통일원ㆍ외무부ㆍ안기부로 하여금 대북 채널과 우방의 협력을 총동원시키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지난 8월4일 납북자 송환 대책을 협의하는 관계부처 장관회의가 처음 열리고, 그 이후 한승주 장관이 급히 북유럽 3국 순방길에 오른 것도 이같은 ‘지시’에 따른 것이다.

“실무 준비 완료…문제는 북한 태도”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국제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핵카드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북한이 외교 압력에 굴복해 선뜻 고씨를 송환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외무부 관련 부서의 한 관계자도 “외교 압력이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고씨 문제가 통일안보 정책조정회의 의제로 상정돼 있으니만큼 교섭 협상은 통일원 몫이고, 외무부는 남북이 직접 대화해 해결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치중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북 채널’을 통한 해결 모색도 진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남북 적십자회담을 열어 이산가족 문제와 납북자 송환문제를 논의하자는 한국측 제안을 거부한 상태이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8월15일〈노동신문〉논평을 통해 ‘남조선 적십자사가 당장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할 인도주의 문제, 인권 문제는 남조선 안에 있다’고 일축했다. 납북자 송환을 주장하기 전에 한국에 억류중인 ‘전쟁 포로’와 40년 넘게 수감중인 비전향 장기수부터 송환하라는 요구였다.

 현재 북한측이 당ㆍ정부 기관지 및 대남 방송 등을 통해 공식으로 송환을 주장하는 ‘비전향 장기수’는 5명 정도이다. 그 중 빨치산 출신으로 만기 출소한 비전향 장기복역 출소자는 3명이다. 이 가운데 평남 덕천 출신인 김국홍(김인서)씨는 51년 12월 군경합동 대공세(공비 토벌) 때 지리산에서 체포돼 20년형을 마치고 나와 반공법 위반으로 재구속돼 89년 10월 사회안전법 폐지를 앞두고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출소해 현재 광주에 살고 있다. 황해도 웅진 출신인 함세환씨 역시 53년 속리산에서 체포돼 20년형을 마치고 나왔으나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75년 보안감호소에 재수감되었다가 89년 출소해 대전에서 살고 있다. 이 두 사람 외에 북한 당국이 석방 및 송환을 요구해온 대표적 비전향 장기수로는 현재 세계 최고 장기수로서 해마다 기네스북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김선명씨(68ㆍ44년째 복역중인 무기수)와 안학섭씨(64ㆍ42년째 복역중인 무기수)를 들 수 있다.

 정기적으로 이들을 면회하고 있는 민주화 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따르면, 서울 출신으로 51년 전쟁중 간첩혐의로 체포돼 ‘사상 전향’을 거부하고 44년째 대전교소도에 복역중인 김씨는, 오랜 독방 수형 생활로 인한 위장병ㆍ고혈압ㆍ백내장 등으로 시력을 잃어 더는 감옥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김씨는 현재 유엔 인권위원회에 간첩 혐의에 대한 무죄를 탄원하고,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해 양심수로 선정된 바 있다. 강화도 출신으로 53년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42년째 대전교도소에 복역중인 안학섭씨 또한 오랜 수형 생활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통일원의 한 관계자는 비전향 장기수와 고상문씨의 맞교환 가능성에 대해 “협상을 통한 해결 방안은 실무적으로는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북한의 태도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권리와 책임을 모두 안은 김대통령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기대된다.
김 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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