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없는 '음란죄'
  • 한승헌 (객원편집위원ㆍ변호사) ()
  • 승인 1994.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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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성ㆍ윤리성 평가에 권력이 개입하고, 현실적인 성문란엔 눈감은 채 픽션 속에 문란만 처벌하는 것은 우화나 같다"

<즐거운 사라>, <펜트하우스>, 배꼽티, <미란다>, <엠마뉴엘 부인>…. 근자에 음란성 논의를 불러일으킨 불씨들. 그때마다 '음란성'의 개념과 기준 그리고 가벌성을 놓고 입장과 견해 차이가 부각되곤 했다.

 행위나 표현물에서의 음란성은 결국 인간의 성적 본능과 얽혀 있는 문제다. 예로부터 성적 본능에 대한 억압은 성도덕 또는 성적 질서라는 이름으로 가해졌지만, 성문화가 놀랍게 변모된 이 시대에 성에 대한 논의나 묘사조차 금기할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성에 대한 탐구와 표현은 누구를 해치기는커녕 때로는 건강한 에로티시즘으로, 때로는 인간의 실존을 추구하는 문학 예술로서 우리를 즐겁고 유익하게 해주는 요소가 많은데도 난데없이 단속 대상이 되곤 했다. 풍기 문란이나 퇴폐 행위를 걱정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것은 좋지만 함부로 범죄시하거나 형벌을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

눈금 분명치 않은 '음란' 잣대
 음란성을 범죄 요건으로 삼는 형사 처벌에는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른다. 음란죄로 처벌할 대상에는 음란한 '행위'와 음란한 '표현물'이 포함되는데, 행위는 눈감아주거나 더불어 즐기는 사람들이 표현물에 대해서만은 이중적 기준을 가지고 위선적 규탄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음란'이라는 잣대는 눈금이 분명치가 않다. 개념이 흐리멍텅하여 종잡을 수가 없다. 형법에는 '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이라고만 되어 있지 무엇이 어느 정도면 음란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그래서 하급심 재판에서는 대법원의 판례를 금과옥조처럼 모셔다가 써먹는다.

 대법원은 형법상 음란의 개념을 '사람의 성욕을 자극 또는 흥분시켜 정상인의 성적 수치심을 해치며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거듭 판시해 왔다. 말이 대법원의 판례이지, 51년에 나온 일본 최고재판소 판례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이 판례는 18년 다이쇼(大正) 시대의 판결과 근본을 같이하는 것이고 보면, 우리 대법원의 음란죄 판례는 지금 75세 되는 할머니가 태어나던 때의 성 풍속에 적용하던 판례의 복사판이라 할 수 있다.

 위의 판례를 분석하자면 우선 성욕을 자극 또는 흥분시키는 것을 음란죄의 첫번째 요소로 보고 있는데, 성욕을 자극ㆍ흥분시키는 것이 어찌하여 나쁘며, 더구나 범죄가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성욕을 유발하는 최음제의 제조ㆍ판매를 허가하는 정부가, 성적 흥분 유발을 범죄 요건의 하나로 보아 응징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1910년대 장치로 오늘의 성 풍조를 단속하다니?
 또한 '정상인의 성적 수치심'이라든가 '선량한 성도의 관념'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다. 이렇게 개념과 기준이 종잡기 어려울 때는 수사 당국이나 법원의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유죄 판결이 나올 위험이 잇다.

 <즐거운 사라> 재판 때에 나는 "이 소설이 성적 자극ㆍ흥분을 일으키는지 여부를 재판부가 판단할 사항이고 보면, 단상의 여러분께서 이 소설을 읽고 성적으로 흥분하면 유죄가 되고 반대의 경우엔 무죄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방청석에서는 폭소가 터지고 재판부의 법관들도 웃음을 숨기지 않았지만,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던 것이다.

 흔히 형법에서는 보호법익을 따지는데, 음란죄는 '풍속을 해하는 죄'에 속해 있는 점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사회 풍속'을 보호법익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10년대의 사회 풍속을 보호하려던 군국주의적 장치를 가지고 80년이나 지난 오늘의 자유분방한 성 풍조를 다스리겠다는 것은 얼마나 시대착오이며 관료적 독선인가, 아니, 성적 풍속을 법과 법관의 힘으로 수호하겠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음란죄는 피해자 없는 범죄라고 한다. 보는 사람, 사는 사람, 읽는 사람의 선택 행위나 동의가 있는데도 굳이 범죄라고 하니까. 그런 표현이 나왔다. 거기에는 개인 아닌 사회가 피해자라는 의미도 물론 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데도 처벌하는 허구적 범죄성을 꿰뚫은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음란죄에 대한 입법론 내지 위헌론이 제기된다. 범죄 요건이 분명치 못한 것은 죄형법정주의 위반이요, 성 표현을 문제삼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적 판단에서는 기본권의 한계라든가 공공복리라는 모호한 개념을 남용하는 일이 배격되어야 한다. 하물며 문학성이나 윤리성을 평가하는 일에 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다. 현실 속에 넘쳐나는 성 문란은 눈감아 두고 픽션 속의 문란만 처벌하려는 것은 우화(寓話)나 다름 없다.

 모름지기 성 표현의 법적 한계는 헌법상 기본권의 본질을 분모로 삼아서 따져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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