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流 익히는 窓 평생교육 ‘문화센터’
  • 이성남 차장대우 ()
  • 승인 1991.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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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실현의 장” …수준 미흡하나 육성 필요 “부유층 여자들 떼지어 노닥거린 곳” 비판도

 한 50 남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클래식 기타반에 남자가 나 혼자밖에 없는데요. 혹시 수강신청을 취소할 수는 없을까요?

 지난 10일 진로도매센타 문화센터에서 벌어진 이같은 광경은, 다수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수 여성이 설 자리를 못 찾아 전전긍긍하는 모습과는 뚜렷이 대비된다. 멋모르고 수강신청을 했던 남자들이 자진탈퇴하는 일은 다른 문화센터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이같은 사실은 문화센터가 주부를 위한 공간으로 터잡고 있는 현실을 확인케 해주며, 또 역으로 ‘문화센터’라는 창을 통한 주부의 삶의 행태와 의식의 단면을 가늠케 해준다.

 문화센터에 비친 주부의 얼굴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하나는 일상의 짐을 둘러맨 채로 자아실현이라는 정상을 향해 힘겹게 정진하는 ‘시지프스’ 같은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신나게 기분 전환을 하려는 ‘마돈나’ 같은 유형이다.

 시지프스의 자화상은 최근 몇년 동안 각종 문학 등용문을 통해 등단한 문화센터 출신의 주부작가에서 찾을 수 있다. 동아문화센터의 경우 지난 10년 동안 1백여명의 작가를 등단시켰으며, 89년에는 5대 일간지 신춘문예를 휩쓸어 작가 수업 산실로서 문화센터의 위치를 부각시켰다. 또 미술대전 공예대전 서화대전 등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5공 언론통폐합의 산물
 그런가 하면 후자의 모습은 최근 문화센터 유행강좌인 ‘노래부르기’에 참여한 다수의 주부 군상에서 찾을 수 있다. 주부의 느닷없는 노래 열풍은 망년회와 크리스마스가 끼인 연말에 특히 고조된다. 한반에 적게는 2백명부터 많게는 5백명까지 모여 처음에는 쭈뼛거리고 망설이는 듯 하다가 이내 목청을 확 열어젖히며 마음껏 ‘자기 소리’를 내지르는 ‘노래부르기’는 자아상실감에 비틀거리는 주부의 위기 탈출의 열쇠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집에 혼자 있으면 너무 허망해서 잠시라도 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9개월째 서수남 노래교실에 나온다는 41세 주부 이상진씨는 노래를 배우는 동안은 모든 짜증스러운 것을 잊고 즐거운 마음이 된다고 말한다. 노래부르기와 차밍디스코로 주부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은 서수남씨와 구지윤씨 같은 이는 문화센터가 배출한 ‘스타강사’이다. 노래 실력뿐만 아니라 탁월한 언변과 유머감각으로 1주일에 2천~3천명의 주부를 휘어잡는 이들은 출강 섭외가 들어와도 더이상 시간을 낼 수 없는 지경이다.

 문화센터라는 거울을 통해 이 시대 주부의 ‘천의 얼굴’을 살펴보자. 홈패션 꽃꽂이 미용같은 여성강좌에서부터 대학원 수준의 학구적인 강좌까지 문화센터 개설 강좌는 수백종에 이른다. 지난 10년 동안 폐강되고 또 신설되는 강좌의 변모 과정을 살펴보면 그 시대 조류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과외 금지 조처가 내려지자 문화센터 주부반에 개설된 중학교 과정의 영어ㆍ수학반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동아ㆍ중앙문화센터에는 아직도 ‘어머니 수학’ ‘어머니 영어’ 과정이 있지만 수강자가 예전처럼 많지는 않다. 84년에 신설된 ‘증권투자’나 ‘부동산 투자’ 강좌는 경기가 활황인 동안 신청이 쇄도해서 선착순 마감을 해야 했지만 이즈음에는 관심권에서 빗겨나 있다.

 최근 경향을 보면 “머리를 안 쓰고 편하게 살려고 하는 취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초창기에 공예나 서예 교실을 찾던 발길이 요즈음에는 스트레스 해소성 강좌에, 육체적 무리가 뒤따르는 탈춤이나 민속무용보다는 차밍디스코나 볼륨댄스로 몰린다.

 문화센터는 역설적이게도 10년 전 5공의 언론사 강제통폐합이 낳은 산물이다. <동아일보>는 라디오 방송국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여의도 사옥에, <중앙일보>는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국을 다 앗긴 뒤에 운현궁 스튜디오의 ‘빈 공간’에 문화센터를 세웠다. 중앙문화센터의 신동익 차장은 “방송을 빼앗기고난 울분을 삭이기 위해 문화센터에 시조짓기반을 개설, ‘겨레시 짓기 운동’을 전개했으며 나중에는 <중앙일보>에 시조짓기 난이 마련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그때만 해도 생소한 용어인 ‘평생교육의 광장’이라는 용어를 앞세우며 81년 10월에 동아문화센터가 건립되자 잇따라 한국문화센터 중앙문화센터 기독교방송문화센터가 문을 열었다. 백화점의 경우 84년에 동방플라자가 맨처음에 문화교실을 개설한데 이어 신세계 현대 롯데월드 진로도매센타 등이 후발주자로 참여했으며 88년에는 ‘기업의 사회환원’을 내세운 계몽문화센터를 비롯, JC문화센터 등이 독자적인 운영에 나섰다. 또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MBC도 강동구에 문화원 개설을 추진 중이며 KBS도 그 타당성을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공자와 초심자 한반에서 수업하기도
 이처럼 문화센터가 수적인 팽창은 거듭하고 있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를 면치 못하고 있다. 문화센터가 부딪히는 가장 큰 한계는 아무리 그럴듯한 강좌도 수강자들이 신청하지 않으면 폐강되어야 하는 점이다. 동아문화센터의 이원용 차장은 ‘많을 때는 3백35개 강좌까지 개설되었지만 평균 폐강률이 30% 정도“에 달한다고 말한다. 88년 계몽문화센터 개관 당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아동학‘ ’가정학‘에 대한 주부의 관심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 전문강사를 초빙하여 강좌를 개설했을 때 수강자가 없어 결국 폐강했다. 중앙문화센터에서도 일반 학원에서 수강하기 쉽지 않은 러시아어강좌를 정책적으로 개설했으나 현재 4명이 수강하고 있을 뿐이다. 문화센터 관계자들은 ”인원이 적은 강좌라도 한번에 끝장을 볼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끌고나가면 모래밭에 물 퍼지듯 서서히 전파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지만, 모든 강좌에 이런 모험을 걸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같은 현실에서 각 문화센터는 저마다 독자적인 성격을 구축하지 못한 채로 비슷한 ’좌판‘을 벌여 놓는 결과를 낳고 있다.

 수강자의 수준에 따라 강좌가 세분되어 있지 않은 점도 문제이다. 미술반의 경우 해외유학을 다녀온 미술 전공자와 취미 삼아 처음 붓을 잡아보는 초심자가 한반에서 수업한다. 동아문화센터에서 10년 동안 ‘인체소묘’를 지도해온 김호걸씨는 “화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갖는 이와 여가 선용의 가벼운 기분으로 시작하는 이가 강의에 임하는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취미 차원을 넘는 진지한 분위기”라고 말한다.

 수준에 따라 다른 이론을 가르쳐야 하므로 체계적인 진도를 세우기가 어렵다는 수채화 지도강사 박상윤씨는 “대가족 제도 하에서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업어키우는 것처럼 선배 회원이 대신 가르쳐주는 부분도 많다”고 독특한 분위기를 알려준다.

 어지간히 세상물정에 밝은 40세 안팎의 주부들에게 환영받는 강사는 누구일까. 계몽문화센터의 김영미씨는 “무미건조하게 가르치는 강사는 안 좋아하고 강의 도중에 실생활과 연관된 대화거리를 제공하는 강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또 신규회원에게 좌절감을 주지 않고 가능성을 부추겨서 어떻게든 참여하게 하는 것도 강사의 중요한 자질이다.

 이 때문에 각 문화센터는 새로운 강좌의 개발못지 않게 강사 확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낮은 강사료와 오전으로 묶여 있는 주부반 시간대 때문에 유명 인사를 초빙하기가 어려우며, 간신히 성사시켜도 길게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화센터로서는 강사료가 수강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여 재정 압박의 요인이 되지만, 강사 입장에서는 ‘대학 출강’ 또는 ‘초대작가’ 이상의 자격 기준이 적용되는 이들에게 지급되는 강사료가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1주일에 2시간씩 동아문화센터 문학반에 출강하는 한 강사가 받는 한달치 월급이 10만원이 채 못된다.

“문화센터 없었으며 ‘고스톱주부’ 양산‘
 문화센터 운영 실태는 말 그대로 ‘외화내빈’이다. ‘교통 취약지구’인 여의도에 있는 동아문화센터의 경우 대규모 주거신설 지역마다 시설 좋은 사회체육센터가 건립되는 상황에서 수강자 일탈률이 높기 때문에 90년도에 3억5천만원의 적자를 냈다고 한다. 건물임대료와 시설투자 및 감가상각비를 따져볼 때 수지 타당성이 없는 사업이라고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백화점 문화센터 역시 수익성만 따지자면 목 좋은 금싸라기 땅에 굳이 문화센터를 운영할 이유가 없다. 그것보다는 문화센터 수강 주부를 고정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과 건전기업 이미지 홍보 전략 등 부차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몇백 종류에 이르는 강좌와 유행을 모방한 화려한 강좌명 등에서 오는 선입견으로 인해 문화센터 수강 주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호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문화센터를 돈 많고 시간은 남는데 할 일 없는 여자들이 떼지어 주차난이나 가중시키며 노닥거리는 장소쯤으로 인식하는 것은 ‘휘청거리는’ 중년 여성의 삶을 직시하지 못한 탓이다. 주부 수강생의 순수한 열의와 그 잠재력을 잘 알고 있는 문화센터 출강 강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남자들의 술집문화는 정당화하면서 주부들의 문화센터 수강을 사시적으로 보는 것은 말도 안된다. 문화센터가 없었다면 동창계에 나가 음식먹고 쇼핑하며 고스톱치는 주부들이 더 양산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풍속도가 미흡하다고 비판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발전시켜 그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사회교육 차원으로 확산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앙문화센터 개관 때부터 10년 동안 ‘소설’을 지도해온 작가 이호철씨. 그는 그동안 10여명의 제자를 문단에 데뷔시켰지만 ‘등단’자체의 의미보다는 “안팎으로 변해가는 세계기류 속에서 주부들이 문화센터라는 창을 통해 변화에 순응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각종 민영 문화센터가 시민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터잡이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원의 저변확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센터는 현대사회에서 소외의 골이 깊어진 노인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도 있다. 동아문화센터 개관 이래 ‘도예반’에 10년 넘게 다니고 있는 82세 김흥순 노인이나, 환갑이 지난 후 3년 전부터 중앙문화센터 한글서예반에 나간다는 이윤덕 노인이 대표적인 예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적기라는 주위의 독려고 문화센터를 찾았다”는 두 노인의 사례는  문화센터가 평생교육 실천의 즐거움으로 여생을 지피는 노인문화의 터전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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