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김씨, 북방경주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 이흥환 기자 ()
  • 승인 1990.09.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안정국· 3당통합 거치면서 金泳三대표가 선두 나서

남북총리회담 북측 기자단은 金大中총재에 큰 관심

지난 9월6일 저녁, 朴浚圭 국회의장이 남북고위급회담 참석 인사들을 초청한 만찬장의 한 장면이 유달리 눈길을 끌었다. 그 자리에는 ‘영원한 맞수’로 일컬어지는 金泳三 민자당 대표최고위원과 金大中 평민당 총재가 나란히 참석, 북한측 延亨默 정무원총리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 대목까지는 여느 만찬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이다.

잠시 후 북한 기자들이 김대중총재 주위로 몰려들어 갖가지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남북한의 유엔가입 문제에서부터 통일방안에 이르기까지 미묘하고 까다로운 질문일색이었다. 김총재는 당혹해하는 기색없이 차분하게 답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북한 기자들이 집권여당의 대표최고위원인 김영삼씨보다 야당 총재인 김대중씨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이색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金泳三대표가 평양행 의사 먼저 밝혀

그날 만찬장에서 연총리는 양 김씨에게 평양 초청 의사를 밝혔고, 두 김씨는 모두 ‘평양行’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튿날인 7일, 박의장은 평민당 의원의 사퇴불허 의사를 전하기 위해 평민당으로 김총재를 방문한 자리에서, 전날 만찬장에서 있었던 김총재와 연총리의 만남을 화제에 올렸다. “김총재가 연총리에게 설명한 유엔가입 문제는 설득력이 탁월했다. 역시 당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論客이다.” 적어도 언변에 관해서라면 역시 ‘당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박의장이 김총재를 추켜세운 것이다.

본인들이 아무리 부인하더라도 김영삼 김대중 두 김씨는 경쟁관계다. 적대관계라는 評도 이젠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민주당 李哲의원의 말대로라면 두사람은 ‘상호의존적 적대관계’다. 비단 국내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외교 분야를 둘러싼 두사람간의 ‘신경전’ 역시 ‘砲聲없는 전쟁’을 연상케 할 정도다. 특히 두사람이 펼치는 ‘북방을 향한 경주’는 자못 흥미로운 구석까지 있다. 두 김씨는 서로 다른 코스에서 뛰고 있지만 ‘평양’이라는 동일한 종착점을 향하고 있다. 兩金 나름의 ‘북방정책’이 존재하는 것이다.

최근 1~2년 사이에 두 김씨는 북방경주에서 매우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한마디로 ‘화려한 외출’과 ‘공경’으로 상징될 수 있다. 잡음이 뒤따르긴 했지만 김대표가 연이은 소련행으로 화려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데 비해, 김총재는 국내에 칩거하면서도 ‘北’이라는 말만 거론되면 어김없이 구설수에 올랐다. 그가 지난 해 여름 공안정국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양 김씨의 북방행 경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지난해 1월부터다. 먼저 운을 뗀 것은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씨. 신년 기자회견에서 그는 남북관계와 북방정책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초당적 문제라면서 “기회가 오면 金日成주석과 만나 격의없이 논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평양행’ 의사를 밝혔다. 김일성주석과 만나 남북문제를 논의하겠다는 것은 1974년 이래 자신이 꾸준히 지켜온 기본 자세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의 평양행 구상은 한달 후 일본에서 보다 구체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본 사회당 초청으로 滯日중이던 그는 2월1일 일본 기자클럽에서 “일본 사회당이 북한 로동당과 한국의 민주당 사이에 가교역할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함으로써 일본 사회당이 대북 접촉창구임을 시사했다.

이틀 후인 3일에는 당시 민주당 정책심의회 의장이었던 黃秉泰의원이 김영삼 구상을 뒷받침했다. 황의원은 “김총재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주석과 만나는 일이 상당히 진전됐다”면서 “도쿄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서 흐멜리예프 참사관을 만나 김총재의 訪蘇문제도 일단락지었다”고 밝혀, 김총재가 모스크바와 평양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쫓고 있음을 알렸다. 황의원은 또 민주당이 로동당과 교류할 경우, 해방 이후 44년만에 처음으로 정당차원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셈이라고 친절하게 해설까지 붙여 김총재의 평양행이 조만간에 성사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4개월 후인 6월2일 김영삼의 ‘북방 정책’은 모스크바 입성으로 구체화되었다. 김총재는 소련의 세계경제 및 국제문제연구소(IMEMO) 초청으로 여야의 정치지도자 중 최초로 공식적으로 소련땅을 밟은 역사적 인물이 되었지만 국내에서는 뉴스의 초점이 되지 못했다. 4당체제하에서 제3당의 당수라는 점과, 한 정당인의 소련행이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김영삼총재의 방소 기간중 연일 국내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것은 오히려 평민당 김대중총재였다. 김영삼총재가 북방으로 떠난 다음날 김대중총재는 남방을 택했다. 2박3일간 일정으로 광주 및 전주를 방문한 것이다. 김대중총재의 호남 나들이는 정치적인 의미가 듬뿍 담긴 것으로, 당시의 시점이 청와대회담을 앞둔 데다 정호용씨 등 5공핵심인사 처리와 광주문제로 국내가 시끌벅적하던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호남 땅을 밟고 선 김대중총재의 입에서 소련에 가 있는 김영삼총재의 북방행보 소식을 잠재울 만한 굵직굵직한 발언이 연타로 터져나왔다. “광주문제가 해결 안되고 5공청산이 안되면 노정권 종식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그의 발언은 그대로 신문 1면의 머리기사가 됐다. 김총재가 故 李哲揆군의 어머니와 만나 오열하는 모습을 담은 한장의 사진은 모스크바에서 소련인사들과 악수를 나누는 김영삼총재의 동정사진보다 더 크게 자리잡았다.

정가 일부에서는 김대중총재의 호남 나들이가 김영삼총재의 소련행을 염두에 둔 치밀한 계산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냐 하는 그럴듯한 분석이 뒤따랐다. 김대중총재의 ‘南風’이 김영삼총재의 ‘北風’을 잠재웠다고 할까.

 

올해에는 金大中총재가 기선 제압

상황은 그러나 며칠만에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6월6일 김영삼총재가 모스크바에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許錟과 극비리에 만난 사실이 요란하게 알려진 것이다. 허위원장이 평양에서 모스크바까지 날아와 김영삼총재를 만났다는 것은 김일성주석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영삼총재의 우울했던 모스크바 나들이가 한순간에 ‘화려한 외출’로 바뀐 것이다.

김영삼총재는 소련 ‘보따리’를 들고 돌아와 잠시 침묵에 잠긴다. 또 그 침묵 속에서 89년 여름의 공안정국을 조용하게 치러낸다. 그에 반해 김대중총재는 공안정국의 세찬 한파에 시달린다. ‘친서전달설’의 파장은 끝내 김총제 拘引에까지 이어진다. 김총재는 나중에 당시를 돌이켜보면서 “내 생애 최고의 위기였다”고 술회했다.

올해에 들어와 두 김씨의 북방 경주는 새해 벽두인 1월12일 평민당 대표단의 방북계획이 발표됨으로써 일단은 김대중총재의 기선제압쪽으로 방향을 튼다. 김총재는 평민당 대표단을 먼저 북한에 보내고 그 결과에 따라 자신이 직접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주석을 만나는 문제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정부의 승인과 남북 당국자간의 협의를 전제로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지만, 김총재가 북쪽을 향해 다시 한번 손을 뻗은 것은 대단한 모험으로 평가되었다. 불과 몇달 전의 밀입북 파동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총재의 평양행 구상 발표는, 하루 전인 11일 盧대통령과의 청와대회담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평민당 내에서는 ㄱ, ㅇ의원 등 방북 대표가 될 당내 인사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기도 해, 평민당 대표의 방북이 가시권에 들어온 것처럼 비쳤다.

그러나 김대중총재의 방북 계획은 3당합당으로 물거품이 됐고 두달 후인 3월에는 김영삼씨가 집권여당의 최고위원 자격으로 다시 한번 소련 땅을 밟아 전세가 역전된다. 두번째의 화려한 외출에서 김영삼 최고위원은 마침내 고르바초프 상면을 따냈고, 그 시각에 김대중총재는 왜소한 야당을 이끄는 당수로서의 비애를 씹고 있었다.

지금의 전황으로 미루어 평민당 김총재가 북방 문제에 관한 그동안의 ‘실점’을 만회하기 위해 우회로를 거치지 않은 채 직접 평양을 노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상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여건을 감안할 때 그런 일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와는 반대로 김영삼대표의 경우 집권여당의 대표최고위원이라는 위상을 최대한 활용해서 김대중총재보다는 평양에 훨씬 더 가까이 접근해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