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수배자의 고통스럼 삶 공감했다”
  • 이성남 문화부차장대우 ()
  • 승인 1990.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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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꼴찌…><그들도 우리처럼> 주연 文盛瑾씨 - ‘운동권 단골’ 탈피가 과제

 “연기는 양파껍질과도 같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는 답답함 속에서 연기하다보면 어느 한순간 껍질이 확 벗겨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 상태에서 연기하다 보면 다시 또 이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또 한거풀 벗겨지고….” 독립영화사 ‘물결’이 제작한 황규덕 감독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와 탄광촌을 무대로 한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주연을 맡은 문성근씨의 연기관이다. “전체 흐름이 물흐르듯 이어지게” 연기해야 하는 연극과는 달리 영화는 “장면마다 농축된 감정표현이 필요하다”고 연기의 차이점을 알려준다.

 남자고등학교 2학년 교실을 무대로 한 <꼴찌부터…>에서 음악교사역을 맡은 그는 입시경쟁하에서 작자생존을 주장하는 수학·영어교사와는 다른 교사상을 제시하는데 그 모습이 실제인물을 보는 것처럼 편안하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맡은 수배 대학생 김기영역은 달랐다. “뭔가 고통스러워하면서 80년대를 살았고, 90년대를 향하여 어딘가로 가고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연기하면서 그는 “그토록 괴로운 삶”이 진실로 “고통스러웠다”. 고심 끝에 그가 그려낸 김기영은 “연민이든 사랑이든 한 가련한 여자를 인간으로 안아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보통인간”이었다.

 촬영 당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다방에서 박중훈과 싸울 때 격분하여 의자를 집어드는 장면”이었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김기영으로서는 아주 격앙된 감정상태를 표출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만 자그마치 10번을 찍었는데 나중엔 “눈이 확 돌다 못해 얼굴까지 하얘지니까” 도리어 연출부가 걱정하더란다. 상대역인 박중훈씨도 연습할 때는 있는 힘을 다 쏟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반복연습으로 감정선을 익혀야만 안심이 되는” 연극배우 출신이라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영화배우로서 요령부득인 탓이었다.

 문성근은 서강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양행 한라건설 등에서 근무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표를 쓰고 연극계에 출현했던 일화로 유명하다. 연극을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의 인간관계가 직급과 직급의 만남이고 그런 가운데 층층시하의 조직화된 인간이 되는 게 싫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후 그는 연극 <한씨연대기> <철수와 만수> <4월9일> <늙은 도둑 이야기>에 출현했고 텔레비전 드라마 <천사의 선택>에도 출현했다. 앞으로 방영될 주간시추에이션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 출연할 예정. 제적되었다가 복학한 대학원생 역이다.

 “외모와 가정환경 때문에” 그에게 맡겨지는 일련의 ‘운동권’ 배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연기자로서 그의 당면과제이다. 원하는 배역은 뜻밖에도 집단탈주범 지강헌역. 지방신문의 신춘문예 시부문 가작 당선자이면서 경찰과 대치하는 극한상황에서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듣고 싶다고 요청하고, 자신이 “이 시대 마지막 시인”이라는 말을 남기며 자결한 지강헌은 대단히 흥미로운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는 설명이다.

 좋아하는 배우는 피터 오툴과 알 파치노. 피터 오툴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는 날렵한 몸매와 각진 얼굴, 그리고 광적인 눈매가 그를 사로잡고 알 파치노는 내면에서 뿜어져나오는 힘의 연기가 마음에 든다. 가수로는 “광대로서 즐거움을 선사하는” 나미와 “병적일 만큼 인생과 사랑의 괴로움을 아는 여자, 그래서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사람 심정이 와닿는” 심수봉을 좋아한다.

 그는 꼭 필요한 말만 차분하게 한다. 그러나 일단 말문이 터지면 화제가 무궁무진하다. 이땅의 정치가를 거론할 때도 비분강개조가 아니다. “정치가들은 그들이 민중의 바다에 떠있는 돛단배인데도 마치 일정한 방향으로 민중을 이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설사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해도 그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집념은 큰 흐름을 그르치고 맙니다.”

 보안사 민간인 사찰 대상자 중의 한명으로 들어가 있는 소감을 묻자 “칠순이 넘은 아버님께서 수감되어 계신 데 비하면 사찰 정도는 하찮은 일”이라고 대답한다. 보안사 명단작성 시기가 89년 봄인데 당시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이 “방북의의나 목적, 성과에 대한 검토없이 개인을 매도하는 데만 급급한 데에 흥분하여” 전 언론사로 뛰어다녔다. 아마 그 때문에 보안사 감시 대상자에 들게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때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2년만 두고 보자”고 벼르며 훗날 ‘역사의 기록’으로 증언하겠다는 생각에서 각 일간지의 사설과 칼럼을 보아두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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