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진실'이 내린 무죄 판결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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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살인으로 사형 구형된 서보원씨 재판서 '무혐의' /경찰 증거조작 의혹 등 기소 편의주의 폐단 드러내

최근 부산에서는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돼 사형이 구형된 피고인 서보원씨(27)에 대해 부산지방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사건을 두고 큰 파문이 일고 있다. 12. 12 사건에 대한 불기소처분이 검찰이 기소권을 발동하지 않아 발생한 기소권 남용이라면 부산지법 사건은 기소권을 전횡하여 발동한 남용 사례이다. 이 두 사건은 검찰 기소편의주의의 폐단을 양극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사형 구형에서 무죄 판결로 뒤바뀐 사건의 발단은 부산 북구 덕천동에서 한 시민이 강도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해 숨진 지난 1월10일로 거슬로올라간다. 피해자는 부산 북구 덕천1동 한효맨션 403호에 살던 가정주부 정혜실씨(37). 경찰 수사에 따르면, 피해자 정씨는 가족이 모두 나가 집에 혼자 있던 오후3시께, 열려 있는 대문을 통해 침입한 강도에게 온몸을 찔려 숨졌다.

"물증용 칼 경찰이 사갔다" 결정적 증언
 관할 부산 북구경찰서 수사관들은 보름 남짓 탐문에 끝에 용의자를 붙잡았다. 살인 사건 직후 주거를 옮겼고, 92년과 93년 절도미수와 절도죄를 저질러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던 서보원씨였다.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서씨가 살던 곳은 현장에서 멀지 않은 남산동의 한 자취방이었다. 서씨는 지난해 역시 덕천동 아파트에 있는 본가에서 따로 나와 자취를 하다가 사건이 난 직후 주거지를 떠났다.

 경찰은 1월23일께 서씨를 붙잡아 죄를 물은 끝에 범행 자백을 받아냈다. 또 경찰은 피해자 가족과 서씨 주변 인물, 목격자 진술을 통해서 서씨에 대한 증거를 보강했다. 물론 경찰은 결정적인 물증도 확보했다. 서씨가 범행에 사용했다는 과일칼을 사건 현장 뒤편 덕천천에서 찾아낸 것이다. 검찰은 경찰의 수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피고인을 강도살인죄로 기소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쉽게 매듭지어질 듯이 보이던 이 사건은, 서씨가 검찰로 넘어간 뒤 자백 내용을 전면 부인하면서부터 꼬여들기 시작했다. 서씨는 자기가 살인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며 알리바이를 완벽히 제시했다.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직장에서 정상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고 애초 진술을 번복한 것이다. 게다가 서씨는 경찰서에서 구타와 함께 잠을 못자게 하는 고문까지 당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은 모조리 강압에 못이겨 행한 거짓 자백이라는 얘기였다.

 첫 공판이 열린 날짜는 6월28일. 당시 상황은 재판부조차 사태를 부정적으로 보리만큼 서씨에게 불리했다. 심리를 지휘한 부산지법 제3형사부 박태범 부장판사도 "처음 공소장만 훑어봤을 때는 대뜸 안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인 동기로 보나, 살인 방법의 잔혹함으로 보나 피고인은 사형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죄질이 무거워 보였다"고 그 때를 돌이킨다.

 하지만 심리를 거듭할수록 법원측 시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씨 주장의 진실성을 뒷받침할 증언이 잇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변호인측 증인으로 나온 김대섭씨의 법원 증언은 재판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뒤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증인 김씨는 서씨가 경찰에게 '범행에 사용한 칼을 구입한 곳'이라고 밝힌 가게의 주인었다.

 그런 김씨가 '서씨에게 칼을 판 기억이 없다'고 증언한 것이다. 김씨는 칼을 사간 쪽은 오히려 경찰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경찰에게 칼을 판때는, 서씨가 경찰에 검거된 직후인 1월25일. 김씨 진술에 따르면, 경찰은 이 날 서씨를 데리고 가게로 찾아와 범인이 사용한 과도의 크기와 모양을 설명하면서 이와 똑같은 칼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마침 경찰이 찾는 칼이 가게에 다 떨어지고 없어 다른 가게를 수소문해 안내했다. 경찰이 칼을 산 곳은 김씨 가게에서 멀지 않은 삼일유통, 김씨는 거기서 경찰이 칼 두 자루를 사면서 한 자루에는 서씨의 사인을 받고, 나머지 한 자루는 '예비용으로 보관하겠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경찰에 따르면, 예비용이란 수사참조용이라는 뜻이다.

 이 때부터 칼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려는 작업이 시작됐다. 양쪽 증인 15~16명이 차례로 법정에 불려갔다. 이 과정에서 재판부는, 경찰이 서씨를 검거하기 훨씬 전인 1월14일(사건 발생 4일후) 전경 40~50명을 동원하여 덕천천을 한차례 수색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재판부는 경찰이 그곳에서 끝내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도 경찰 증언으로 확인했다. 경찰은 이 수색 작업에 대해 "사건 발생 직후 행하는 광범위한 증거 수색 작업이었을 뿐, 칼이 버려진 사실을 알고 뒤진 것은 아니었다"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서씨가 버린 칼을 찾아내 법원 제출한 터였다. 경찰이 칼을 찾은 때와 장소는 1월26일 오전, 문제의 덕천천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짜는 경찰이 김씨를 통해 칼 두 자루를 산 바로 다음날이었다.

 더 의심스러운 부분은 1월25일 밤 북구경찰서 형사들을 덕천천 부근에서 봤다는 목격자가 나온 것이다. 결국 재판부는 경찰이 가게에서 산 칼을 일부터 덕천천에 빠뜨리고 다음날 수색해서 찾아낸 것처럼 꾸며 법원에 제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 이 칼에서는 혈흔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이 샀다는 칼 두 자루 중 한 자루는 행방을 알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 경찰은 "김씨의 기억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칼 하나만 샀다"라고 말한다.

대질조사 요구 묵살… 수사권 남용 흔적 많아
 문제는 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씨를 범인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수사권을 남용하거나 그릇되게 사용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재판부 판결문에 따르면, 경찰은 서씨가 자기를 범인이라고 제보한 친구 박○○씨를 자기와 대질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는데 묵살했다. 또 경찰은 현장 목격자의 진술 내용을 임의로 바꿔 자기네측에 유리하게 적용했다. 이를테면 '사건 발생 때와 가장 근접한 시간에 피해자의 집에 왔던 사람과 서씨의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는 목격자 진술을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바로 서씨였다'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기록했다.

 1심 무죄 판결은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한 결과로 나왔다. 물론 92년과 93년 저지른 절도미수. 절도죄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되어 서씨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살인에 대한 피고인 자백 부분은 증거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경찰이 제시한 물적 증거도 신빙성에 의문점이 있으므로 피고인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강도살인 혐의는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 해당하여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결했다.

 1심이 무죄 판결을 했지만 검찰과 경찰의 태도는 변하지 않고 있다. 검찰은 11월5일 부산지방고등법원에 1심 판결을 취소해 달라는 항소장을 냈다. 부산지점 정진국 검사는 "비록 무죄 판결이 났지만, 그 원인은 증거 능력에 대한 법원과 검찰의 견해 차이에서 비롯됐다"라고 밝힌다. 경찰도 법원 판결 이후 제기된 탈법수사 지적을 강하게 부인하며 서씨가 범인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부산 북구경찰서 강력1반장은 "유죄를 입증할 완벽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흠은 있지만,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증거를 조작한 일은 절대 없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씨 가족들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 서씨가 검거된 이후 경찰로부터 '말못할 협박. 위협에 시달렸기'때문이다. 서씨의 둘째형 서덕원씨에 따르면, 담당 형사가 자기네 회사로 찾아와 '동생을 살리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강요한 적도 있다고 한다. 동생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는 동의서를 써주면, 강도살인죄를 상해치사죄로 바꿔 형을 감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서덕원씨는 "경찰이 자신 있으면 무슨 이유로 피의자도 아닌 사람에게 동의서를 받아내려 했겠는가. 억지로 죄를 만들려다 보니 되지도 않는 동의서를 생각해낸 것이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경찰은 증거 조작 시비와는 별도로, 과학성을 포기한 수사 방식으로 경찰의 명예도 또 한번 상처를 준 것이 분명하다. 1심 판결을 이끌었던 박태범 판사는 "범인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수사가 이뤄져야 하며, 피의자 인권도 일반 시민과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판결에 담긴 뜻을 설명한다.
朴晟濬기자

부산지방 검찰청
피고인은… 과도를 동녀의 목에 대고 금품을 내놓으라고 하다가 동녀가 돈을 준다고 하면서도 즉시 돈을 꺼내주지 않고 피고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위 과도로 피해자의 목 부위를 1회 찔러 소파에 넘어뜨려 동녀가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것을 보고 방안의 문갑과 옷장을 뒤져 금품을 찾다가 금품을 발견하지 못해 실망하여 화가 난 데다가 후일 동녀가 피고인을 알아보면 증거가 된다고 생각하고 아예 동녀를 살해하여 증거를 인멸하기로 마음 먹고 위 과도로(동녀의) 등과 가슴부위 등을 약8회 찔러 그 자리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여 살인한 것이다.
-공소장 내용 일부

손홍익 법률 사무소
피고인이 1월24일 범행을 자백하면서 범행에 사용하였다는 칼과 장갑을 신문지에 싸서 덕천천에 버렸다고 진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중요한 증거인 칼 수색을 바로 하지 않고 1월25일 칼 2자루를 구입한 후 1월26일 칼 수색작업을 한 것은 왜 그렇게 했는지... 경찰에서 보관중인 과도를 제외한 나머지 1개의 행방은 어떻게 된 것인지...경찰이 범행을 맞추기 위하여 피고인으로 하여금 그곳에 칼을 버렸다고 진술하게 해놓고 수색하기 전날 밤에 미로 과도를 그곳에 버려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마저 들 정도입니다.
-변호사 변론 요지 내용 일부

부산지법 제3형사부
증인 김대섭의 진술에 의하면, 1월25일 경찰이 자신의 가게로 와서 피고인이 사용하였다고 하는 과도와 똑같은 칼을 요구하기에… 다 팔리고 없다고 말하자, 경찰이(피고가 사용한) 과도는 하천에 버려 찾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같은 종류의 칼이 필요하다고 이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을 안내하여 줄 것을 요구하여…, 다른 가게로 안내하여 주니 경찰이 과도를 2자루 구입하여 한 자루는 피고인의 사인을 받고 한 자루는 예비라면서 구입한 사실이 있다고 하여…, 경찰이 일부러(구입한 칼을) 덕천천에 빠뜨려 놓은 다음, 증거물로 찾은 것처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드는 것이며….
-법원 무죄 판결 내용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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