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지금 ‘보수주의 천국’
  • 워싱턴 · 이석렬 특파원 ()
  • 승인 1992.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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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중심 사회 건설” 주장 공공 연 … 대중문화 · 교육 · 종교에까지 영향

  워싱턴 교외에 있는 흑인학교 하워드대학의 몇몇 교수들이 지난달에 가진 한 모임은《선택…미국에서 흑인이 살아남는 秘法》이라는 책의 복간을 축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책은 20년 전에 출판된 이래 흑인 사회에서 널리 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50여개 대학이 교과서로 채택해서 쓸 만큼 무게가 있는 책이다. 이런 책이 13판을 낼 만큼 날개 돋친 듯 팔린 것을 축하해야 할지 아니면 흑인이 살아남기 위해 지혜를 짜내야만 하는 오늘의 세태를 걱정해야 할지 교수들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이다. 연방정부 기관들이 지금 까지 흑인들을 헐벗고 굶주리도록 내팽개쳤고, 걸핏하면 낙태를 권장하여 아기를 갖지 못하도록 하고 심지어는 씨를 말리기 위해 ‘종족말살 음모’를 꾸며왔다는 점을 이 책은 소상히 들춰내고 있다.

 흑인 말살음모가 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 아닌가는 흑인 민권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뉴욕 타임스>와 C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흑인 10명 중 6명이 정부가 의도적으로 도시빈민 흑인에 대해 마약을 손쉽게 구해 쓸 수 있게 눈감아주고 있다고 대답했고, 에이즈(AIDS)와 같은 병균을 정부가 실험실에서 만들어 흑인을 상대로 고의적으로 유포시키고 있다고 믿는 흑인이 29%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일로 미루어보아 흑인 말살음모 설을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종주의 고개 들어 소수민족 긴장
 지금 보수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미국 사회에 한동안 잠잠했던 인종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나 흑인들뿐만 안라 유대인 동양인 멕시코계 등 비백인계 소수민족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다. 왜 보수주의 세상에서 비백인계 소수민족들은 주눅 들어 사는가.

 미국의 보수주의, 특히 정치학에서 말하는 보수주의는 미국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 확산시키기를 원하는 하나의 신념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한다. 이런 가치관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은 원래 미국 연방헌법이 각 주에 부여한 헌법정신을 받들어 정치의 중앙집권적 경향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 후생사업을 벌여나가는 것도 반대한다.

 비대한 정부나 막강한 세력을 가지 노동조합 등도 거부대상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들은 한결같이 강력한 반공주의자가 되고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지만 청교도 정신을 금과옥조로 삼는 앵글로 색슨 백인들(WASP)이 중심이 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는 보수당이라고 불리는 정당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1948년경까지만 해도 정치인들이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다가는 크게 망신을 당할 정도로 자유주의가 판을 쳤다. 그러나 미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이와 함께 소련 공산주의 세력이 급격하게 팽창함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와 대결할 하나의 이념으로 보수주의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60년대 공화당 보수파 배리 골드워터에 의해 보수주의는 처음으로 정치세력화 됐다. 미국 양대 정당의 하나인 공화당이 보수주의자들의 온상이 된 이우는 1854년에 만들어진 공화당 창당 이념이 국가이익 우선과 민족주의라는 점에서 보수주의자들의 이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보더라도 보수주의자들과 공화당 정치인들은 백인 중심의 정치문화가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도전받아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난 10여 년 동안 백악관을 장악한 보수주의공화당 정부가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잘못을 소수민족계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공헌한 자유주의 민주당 탓으로 돌리면서 은근히 백인들을 부추겨온 데 있다고 보는 견해가 틀린 말은 아니다.

“레이건과 부시가 앞장섰다”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의 어두운 면, 즉 범죄 · 마약거래 · 10대 소녀들의 임신 · 동성연애 같은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지나친 관용 때문에 독버섯처럼 번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나라사랑, 근검절약, 성의 문란을 조장하는 낙태의 금지, 학교에서의 기도 등 전통적 가치관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수민족 차별금지법을 고치고 다수백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야한다고 열을 올리는 것이 공화당이 들고 나온 정책이다.

 2백년 역사상 처음 흑인으로 버지니아 주지사에 당선돼 내년 대통령선거의 민주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한 더글러스 와일더는 “오늘날처럼 인종주의가 팽배해진 것은 보수주의 레이건과 부시 정권이 그 분위기를 앞장서서 만들어놓은 탓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레이건이 정부 보조금으로 간신히 살아가는 흑인들을 빗대어 “후생비 타먹는 여왕님”이라고 조롱했던 사실 들과 부시가 소수민족 차별금지법이 일종의 특혜라고 자주 들먹이는 일을 그 보기로  들었다.

 이런 판국이니 백인 우월주의자로서 테러단 KKK의 두목을 지냈고 나치즘을 신봉한 경력을 가지 루이지애나 주 의회 의원인 공화당 데이비드 듀크(41)가 주지사에 출마했다가 낙선을 한 뒤 내년 대통령선거 입후보를 선언하면서 ‘미국 제일주의’를 들고 나와 사회복지제도의 전면 개혁을 당당히 공약으로 내세울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닉슨 보좌관 출신으로 레이건백악관에서 공보비서를 지낸 공화당내 우파 패트릭 부캐넌(53)은 부시에 대항해 내년 선거에 나서게 된 이유를 “새로운 민족주의를 고양하여 미국 제일주의로 보수주의 진면목을 보여 주겠다”고 장담했다. 그가 말하는 민족주의나 미국 제일주의는 기독교 전통의 백인 중심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 제일주의’ 외치는 大選 출마자들
 정객들이 미국 제일주의나 민족주의들 들고 나와 떠들 때마다 흑인 등 소수민족에 대한 백인들의 눈살을 더욱 사나워진다. 조지타운대학 샘 머쿨로 교수는 “과거 경제가 나빠지면 으레 정치인들이 희생양을 찾아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통례였고 지금은 소수민족을 희생양으로 삼아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고 있다” 고 말한다.

 보수주의 ‘두뇌’를 자부하는 워싱턴의 헤리티지재단 연구위원 리처드 핏셔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을 원하고, 경제성장을 기대하고 강력한 국방정책을 지지하며 밥과 질서가 있는 사회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은 비로 미국이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나라라는 증거”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는 보수주의가 앞으로도 미국의 지배이념으로 정착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보수주의의 확립이 레이건 대통령의 지도력에 기인한다고 밝혔다. 즉‘레이건 혁명’으로 불리는 정책이 현실 세계를 보는 미국인들의 눈을 오랫동안 흐리게 한 자유주의의 잘못에서 개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부시 행정부는 레이건 혁명의 연속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이미 깔아놓은 철로를 달리고 있는 기관차에 지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편 보수적이면ㄴ서 중도적인 입장에 있는 워싱턴의 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 연구소(AEI) 선임연구위원 어빙 크리스톨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망했다는 것은 금세기 최대의 사건인데도 아직도 사회주의 이념이 잔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제한 뒤 “미국 현대 자유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궤도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단언함으로써 보수주의의 전성기를 예고했다.

연방 최고재판소 보수파가 장악
 그는 정치적인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현대 자유주의는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가치관과 충돌하고 있어 반문화적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지만 미국인의 전통적 가치관을 뒤집어놓지는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주의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위협들, 특히 때를 만난 듯 거세지는 여권신장운동 같은 것은 과격한 노동운동보다 더 사나운 적이 됐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프랑스혁명 이후에 일어난 반문화운동을 시발점으로 아방가르드 큐비즘 다다이즘 미래파 초현실주의 같은 미술 분야의 사조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의 산물로 보통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며, 이밖에 비트족 출현 · 로큰롤 · 비틀즈 등 청년문화가 한때 풍미했지만 어디까지나 문화적 혁명에 그쳤을 뿐 정치적 혁명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미국 사회에 아직도 현대 자유주의가 온존하고 있는 곳이 대학뿐이라고 지적한 그는 60년대 베트남 전 반대 데모의 주역들이 교수가 되어 ‘학문적 비합리주의’를 퍼뜨리고 있다고 빈정댔다.

 크리스톨은 또“사상적으로 미국의 지성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지적 · 도덕적 상대주의에 심취해 있고 문화적 니힐리즘에 빠진 결과 보수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기독교사상을 노예의 도덕으로까지 매도하고 있지만 기독교 도덕관이야 말로 부르주아 자본주의와 한 몸”이라고 주장했다.

 백악관이 지난 10여 년간 보수주의 총본산이 돼 있는 동안 연방 최고재판소 대법관 9명 거의 모두가 보수주의자들로 채워졌다. 그 때문에 60년대 치열한 민권운동의 결과로 생긴 각종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들에 대한 대법원의 유권해석이 입법취지와는 다르게 해석돼 나올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종교와 국가를 갈라놓은 헌법정신에 따라 공립학교에서는 공식석상에서 어떠한 종교의식도 갖지 못하도록 판결을 한 판례가 기독교 보수파의 극성으로 무시당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산모가 원하면 낙태를 할 수 있는 권리조차도 이를 허용하지 말라는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로 지금은 정부보조금을 받는 보건소에서 환자와 의사가 낙태라는 말을 전혀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일도 생겼다. 해마다 정부가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적은 돈마저도 부수주의자들이 나서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고 시비를 걸고나와 항상 실랑이가 될 정도다. 이를 테면 점잖지 못한 작품은 제외시킨다는 것인데 그 기준은 보수주의자들의 입맛대로다.

보수파 교회 신도 늘고 컨트리뮤직 대유행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특유의 전통 컨트리 뮤직이 대유행을 하고 있는 것은 정치 못지않게 대중문화도 보수화하고 있는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부 테네시주가 컨트리무직의 본고장으로 이름이 나 있지만 최근에는 미시시피주의 작은 도시 하나가 컨트리뮤직 극장만 10여개씩 가지고 있고, 그 가운데 이름 있는 극장은 한달에 1백만 달러씩 수입을 올릴 만큼 관객이 줄을 서서 찾아온다고 한다. 노래 자체도 애향심을 길러주는 내용이 많은 컨트리뮤직의 공연은 끝에 그에 애국가를 불러 애국심을 북 돋아 주고 있다.

 텔레비전에 나와 설교를 하는 목사들도 거의 모두가 보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북부나 서부대도시 장로교 또는 감리교 간판을 내건 교회들이 심자가 없어 문을 닫는 경우가 있는데도 남부와 중부 농촌지대의 침례교나 복음주의 보수파 교회는 신도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고 몰몬교 같은 권위주의 교파도 교세가 날로 커져 종교계의 보수화 경향 역시 두드러진다.

 흑인 민권단체들은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 시절에 만들러진 민권법에 따라 소수민족들이 그런대로 어깨를 펴고 살 만하다가 레이건 대통령 이후 다시 찬 바람이 부는 옛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은 환경을 맞아 했다고 크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이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사회구성원 가운데 어느 한 집단이 살아남는 궁리를 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가 감돈다면 결코 문명의 나라라고는 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2천3백만 명의 흑인들이 발을 못 뻗고 자는 그런 사회를 두고 어떻게 새 세계 질서를 만드는 큰일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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