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피카소가 그린 ‘한국 학살’
  • 우정제기자 ()
  • 승인 1990.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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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술이 모험》에 나타난 한국 모습 … 마티유는 KAL기 격추 다뤄
서양 미술사에 투영된 한국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최근 국내에는 프랑스 평단에서 역저로 평가된 J.L.페리에의 편저 《20세기 미술의 모험》(프랑스 셴느출판사 펴냄)이 번역 소개돼 이 같은 궁금증을 푸는 한가지 가늠자가 되고 있다.  (API社 펴냄 金貞和 역).  현대 미술의 흐름을 공시성과 통시성의 두 축으로 조망한 총9백쪽 분량의 이 방대한 저술 속에 한국 관련 작품은 고작 두점, 공교롭게도 모두 학살을 주제로 한 그림을 싣고 있어 눈길을 끈다(한국태생 작가로는 유일하게 백남준이 소개되어 있다).

 수록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전의 대학살〉(1.09m×2.09m)과 조르쥬 마티유의〈269명의 대학살〉.각기 51년과 85년의 세계미술사를 장식하고 있다.  전자는 미군의 한국전 개입, 후자는 소련의 KAL기 격추를 고발한 작품으로 37년 스페인 내란을 증언한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3.50m×7.77m)의 전통을 잇는 학살화들이다(〈게르니카〉는 스페인 국경도시 게르니카를 포격, 1천6백여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낸 프랑코의 만행을 고발한 작품.  이를 계기로 피카소는 혁신과 지성편에 가담, 44년 종전 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한국전의 대학살〉은 〈게르니카〉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게르니카〉와 유사점을 갖는다.  금속성 회색을 주조로 노랑과 녹색이 연하게 채색된 단색조의 화면이 흑백 톤의 〈게르니카〉를 연상케 한다.  어린이와 여자들이 무방비의 피해자로 등장하는 모습도 그렇다.  특히 벌거벗은 임부들 사이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서양미술사에 나타난 학살화의 전통에서 예수의 시체를 안고 슬퍼하는 성모마리아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그런데 작가 자신은 이 그림을 발표한 뒤 관객들의 몰이해를 몹시 섭섭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70세의 거장이었던 피카소가 왜 그 같은 박대를 당해야 했을까.   ‘제2의 게르니카’를 기대한 미술애호가들의 욕심이 지나쳤단 말인가.  평론가들은 그 이유가 당시 공산당원이었던 그의 신분과 큰 연관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의 편저자 페리에는 당시의 논란을 이렇게 소개한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불만을 감추지 않고 토로했다.  공산주의자인 피카소가 ‘군중미술’과 관련해 당의 지침에 충실히 복종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즉 공산당원으로서의 시각보다는 ‘인류애적 동정심’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 그림은 공산당 안팎에 큰 시비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 대목은 《다리》 90년 6월호에 발표된 신은철 교수(동부켄터키주립대학)의 논문 ‘피카소 한국전 학살도에 숨은 뜻은’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신교수는 “비당원 지성인들이 이 그림을 노골적인 공산당 선전화라고 냉대, 결국 좌우 양측으로부터 홀대를 받았다”면서 “정치적 이념으로 가늠질당하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인 만큼 피카소의 세계관 속에서 재조명해 진정한 의미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의 대학살〉보고 피카소와 결별”

 한편 발표 후 근 40년이 흐른 오늘 이 작품은 한국 작가들 사이에서도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가나이트》90년 7·8월호의 ‘박고석ㆍ김병기 대담’에서 두 원로화가는 평론가와 작가의 관계를 논하며 정치성을 띤 피카소의 작품들에 강한 회의를 표한다.  “…〈한국전의 대학살〉은 나로 하여금 부산 시절 피카소와 결별선언을 하게 만들었다.”김병기 화백은 이 같은 고백담에 이어 “51년 황해도 신천에서 발발한 학살에 관한 토막소식이 피카소를 흥분시켰는지 모르지만 그런 작품이 나올 만큼 그는 조선을 알지 못했다”면서 차라리 “80년 광주의 학살이 이 같은 그림에 맞지 않는가”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밖에도 한국전과 직접 관련된 피카소의 그림으로 〈전쟁과 평화〉(1952)를 꼽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페리에의 미술사집에는 이 작품이 한국전과 관련됐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근 80년의 창작활동을 통해 4만점 이상을 쏟아낸 다산의 작가에게서 ‘동방의 나라’한국 관련작이 한점이나 두점이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피카소의 후광 때문에도 국내에 익히 소개된 앞의 그림들과 달리 마티유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83년 사할린 상공에서 발생한 소련 미사일의 KAL기 격추를 규탄한 이 그림은 85년 아비뇽 교황궁에서 열렸던 그의 회고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았다.  기호와 물감을 뿌려댄 자국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하늘의 작열하는 모습이 여느 연설문이나 사진보다 강렬하게” 2백69인이 헛된 죽음을 상기시킨다.  지난 51년”기호가 의미에 서행한다”는 새로운 이론을 주장, 서정적 추상주의의 대가가 된 마티유는 프랑스의 생존 원로작가 중 한사람이다.  수학 심리학 등의 이론가로서 현대과학이 보여주는 대담한 스펙타클과 여기서 발원하는 예술의 창작성에 주목하는 작가이다.  그는 또 대중 앞에서 단 3초만에 그림을 완성,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기록을 수립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동양의 서예와도 같은 신속한 제작법을 특성으로 하는”그의 작품세계를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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