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총리는 유럽 대통령?
  • 파리·진철수 유럽지국장 베를린·윤도현 통신원 ()
  • 승인 1992.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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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총리, 통일 후 주도권 확보…주변국 “지나치게 나선다” 반발

 요즘 세계 강대국 지도자들 중에는 정치적 위치가 단단한 사람이 드물다. 존 메이저 영국 총리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힘겨운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입지는 임기 도중에 하차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돌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 일본의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도 측근들의 정치자금 부정 사건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위치가 든든한 사람은 헬무트 콜 독일 총리뿐이다. 그가 이끄는 통일독일은 인구가 8천만명으로 늘어났으며 유럽에서 으뜸가는 경제력을 가진 대국이다. 따라서 국제 무대에서 독일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 유고 사태에 대처함에 있어서 독일이 크로아티아 독립 승인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유럽공동체(EC) 여러 나라에게 이에 동조하도록 강요하다시피 한 처사는 주변 국가들의 심한 반발을 샀다.

 유럽공동체나 미국이 유고슬라비아 내전 수습을 위해 과감한 대책을 빨리 세우지 못한 것은 사실이며, 독일의 주장이 휴전을 촉구하는 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독일의 강압적인 외교 수단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고압적 태도와 비슷하다”
 결국 지난 1월15일 유럽공동체는 독일의 제안대로 크로아티아공화국 승인에 동의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이에 앞서 독일은 일방적으로 크로아티아 독립을 승인했다. 유럽공동체의 독립 승인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관계 수립을 늦춰 불쾌감을 표시했으며 미국은 승인을 보류하고 있다.

 더구나 독일이 크로아티아 문제를 가지고 외교 공세를 편 것이 12월 초순 마스트리히트 유럽공동체 정상회담이 열린 직후였기 때문에 독일의 처사는 유럽통합 분위기를 해치는 것으로 지탄받았으며, 유럽공동체가 독일의 제안을 마지 못해 수락했을 때 독일 정부가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며 흥분한 것도 주변 국가들의 비위를 건드렸다. 이러한 독일 정부의 태도를 보고 영국의 보수계 신문 <선데이 텔레그라프>는 히틀러의 고압적 태도와 비슷하다고까지 혹평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보고 20세기 전반의 독일 패권주의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독일 군대의 해외파병 문제는 다른 한편에서 국방비 지출의 감소·군비 축소 등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 팽창의 징후로 보기는 힘들다. 기독교민주당 중심의 현 집권세력은 국제관계의 변화와 더불어 독일의 국력에 걸맞게 분쟁지역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해외파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오로지 평화유지의 목적으로만 파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체코 폴란드 등 독일 주변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독일 자본이 활발히 진출함으로써 점점 경제적으로 독일에 종속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독일이 예전의 히틀러 시대처럼 그들의 영토를 침범하거나 강제적으로 예속시키려 한다고는 생각지 않고 있다. 독일 국내에서 신나치 등 공격적 민족주의가 어느 정도 확산중이지만 독일 경제가 지속적 불황의 늪에 빠져 허덕이지 않는 한 극우세력이 계속 성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지난해 신나치주의자들이 망명신청자들의 임시숙소를 습격하는 등 외국인에 대한 적대행위를 자행한 것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올랐을 때 여야를 막론하고 이를 규탄했으며, 노동조합 등 사회단체들의 반대운동도 활발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우선 독일뿐 아니라 여러 나라가 탈냉전 시대를 맞아 자기네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어리둥절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점령 아래 있었을 때와 분단상태였던 때 서독의 역할은 비교적 분명했다. 한쪽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진영의 제일선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동방 외교의 일환으로 소련 블록과 활발한 무역을 하는 등 자본주의 국가의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룩하고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독일은 급변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정책 방향을 모색중이다.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독일의 적극적인 자세가 자칫하면 주변 국가들의 우려를 자아낸다는 사실을 독일 정부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콜 총리도 2월 초순 <월 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예상 못했던 통일이 갑자기 이루어짐으로써 주변의 경계심도 급격히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독일이 갑자기 되살아났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은 누구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독일 국민은 이를 명심해야 한다.”

 다른 나라들이 독일을 경계하는 상황을 그는 날씨에 비유했다. 콜 총리는 “어디 날씨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가. 비가 오면 우산을 받고 해가 나면 도리없이 윗저고리를 벗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고작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콜 총리는 독일 정부가 유럽공동체 회원국으로서, 또 유엔 회원국으로서의 국제적 의무를 책임있게 감당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1년 전 걸프전쟁 때 독일은 헌법 규정상 참전이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상당수의 독일 국민은 스위스처럼 중립국가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타내 외국으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다고 비난받고 나서면 나선다고 비판받는 것이 독일의 처지인지도 모른다.

 독일 정부는 걸프전쟁 때 방관자 노릇을 했다는 오명을 씻기 위해서도 유엔 평화유지군에 참여하기 위한 개헌을 구상하고 있으나 언제 실현될지는 아직 모른다. 이 파병 문제에 대한 국내 여론은 평화적 활동에만 참여하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주변 국가들이 파병 문제를 패권주의와 연관시켜 경계하는 것같지는 않다.

미국은 독일의 ‘적극적 자세’ 환영
 유럽에서 미국의 영향이 점차 줄어들고 영국과 프랑스가 경제 침체에 시달리므로 독일의 영향력이 유난히 돋보이게 마련인 상황에서 주변 국가들은 앞으로 독일이 어떤 역할을 맡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영국과 프랑스의 책임있는 언론 기관의 논평은 신중하다. 어차피 독일이 유럽공동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은 분명하지만 유럽공동체의 결속을 위해서 독일이 너무 나서지는 말아주었으면 하는 태도이다.

 프랑스의 유력지 <르 몽드>는 콜 총리가 통일 독일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사실에 유럽공동체 회원국들이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입장이라고 평하면서, 영어와 프랑스어처럼 독일어도 유럽공동체 공용어로 채택해달라는 요청도 장차 독일이 유럽공동체의 중추적인 위치에 앉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신문은 독일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현재 독일이 통독 경비에 시달려 경제상태가 좋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새 강대국 독일의 등장을 우려하는 주변 국가들이 당장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고 주장했다.

 유럽통합을 추진함에 있어서 독일의 새로운 고자세가 어떤 균열을 가져올까 염려하는 유럽의 의견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독일의 적극적인 자세를 환영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로버트 키미트 독일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 1월 하순 본에서의 한 연설에서 “독일같은 믿음직한 우방을 빼놓는다면 미국이 누구와 손잡고 효과적인 공동행동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했다. 그는 유고 사태에 대한 미국과 서독간의 의견차이는 예외적인 일에 속한다고 말했다. 서독이 유럽에서뿐 아니라 중동·중남미 지역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 주기를 바란다고도 말했다. 이것은 독일의 외교자세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미국 언론계 일부에 나타난 것에 대한 외교적 제스처라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미국이 독일을 중요한 연결고리로 삼아서 유럽과의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요는 어느 나라든 탈냉전 시대의 새 질서 구축을 혼자 힘으로 감당해나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국제무대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미국은 군사력은 충분하지만 자금이 부족하고, 유럽은 군사력과 자금을 약간씩 갖추었지만 아직 결속력이 약한 형편이라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은 가진 것은 돈뿐이며 새 질서를 구상할 만한 의지가 박약한 것으로 유럽의 분석가들은 보고 있다.

 요즘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러시아 등 옛 소련에 대한 원조 계획에 관한 주도권 경쟁에서 비롯된 몇 가지 알력 때문에 다시 냉각 상태에 빠졌다. 앞으로 미국과 유럽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국제질서의 틀이 잡혀나갈 것이라고 볼 때 미국과 독일의 관계는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할 것같다. 현재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개를 위해 미국이 독일을 통해 프랑스에 압력을 가하고 있듯이, 미국 외교가 독일에 의존하는 사례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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