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오리무중 피의자 인권은 실종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2.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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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 도난사건, 피해자만 잇따라

 수사관들이 경찰에 몸담을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는 말이 있다. “열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라.” 피의자의 인권이 범인검거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서울신학대학의 후기대 시험지 도난사건 수사과정을 살펴보면 경찰은 “한명의 범인도 잡지 못하고 수많은 피해자만 만들어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수사 초동단계에서부터 “모든 피의자는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을 때까지는 죄가 없다”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의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법적 절차가 철저히 무시되었다. 20여일간의 수사과정에서 서울 신학대학 관계자들과 가족,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한번씩은 범인취급을 당했을 정도였다.

 경찰은 사건 초기에는 학교 당국자들의 말만 듣고 조종남 전 학장의 연임반대 투쟁을 벌여온 학생들과 그 학생들을 지지해온 서명파 교수들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학장 퇴진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을 알려진 김삼복 교수(기독교교육과)는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기 전인 1월21일 오전 학교 당국자에게 “시험이 예정대로 치러지느냐”고 물었다고 해서 범행에 깊숙이 관련된 것처럼 일부 언론에 보도되기까지 했었다.

 서울신학대학 총학생회 사회부장 정재현군(신학과 3년)은 “서명 교수나 총학생회 간부들이 혐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잠깐만 수사를 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경찰은 서명 교수와 학생들이 학교 보직교수들을 쫓아내기 위해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성급한 판단을 내렸지만, 조학장 문제는 이미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지난해 12월3일 연임을 하지 않기로 결론이 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경찰은 그런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도 전에 언론에 서명교수와 학생들이 수상하다고 흘려 여론재판부터 먼저 하려고 들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범인을 잡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범인을 만들려고 한 것 같다”고 얘기했다.

 사건 발생 하루 뒤인 22일 밤 이 학교 경비원인 정계택씨가 범행을 자백하자 경찰의 수사방향은 1백80도 선회했다. 이번에는 조종남 전 학장을 비롯한 학교 임직원들이 배후에서 조종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수사의 초점을 그쪽으로 맞췄다. 연일 학교 임직원들이 불려다니며 수사를 받았다.

 하지만 경찰은 정계택씨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어떠한 물증도 확보하지 못했으며 범행 동기나 배후 인물을 캐내는 데도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정계택씨가 자백을 번복하고 이 학교 경비과장인 조병술씨가 의문의 자살을 함으로써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영장 없이 72시간 동안 정씨 구금
 정계택씨의 변호를 맡은 이양원 변호사는 “이번 사건만큼 피의자의 인권이 철저히 유린된 예도 드물 것이다.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수사기관도 중압감에 시달렸을 것이란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수사결과를 발표해 그같은 중압감을 피의자에게 전가하려고 한 것은 큰 잘못이다. 특히 정계택씨의 경우는 경찰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가 범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당연히 누려야 할 법적인 권리마저 보장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피의자를 검거한 뒤 보통 48시간 이내에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석방해야 하는 것이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물증확보에 계속 실패하자 ‘긴급구속’이란 이유로 72시간 동안이나 영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씨를 구금한 바 있다. 또 특수절도에 대한 물증확보에 결국 실패하자 정씨가 과거에 저질렀던 배임사건을 들춰내 횡령혐의로 영장을 발부받는 편법을 택하기도 했다.

 이변호사는 이와 관련 “정씨를 횡령혐의로 구속한 것은 법적으로는 무리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수사윤리상 큰 문제가 있고 또 절차에 있어서도 정씨를 횡령혐의로 바꿔 구속하려면 당연히 석방한 뒤에 다시 영장을 발부받아 구속했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 수사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피해자는 정씨가 “시험지를 줘 합격시키려고 했다”고 한 대상인물 황모양(ㅂ 여고 3년)이다. 황양은 언론에 신분이 노출된 뒤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 10일 실시된 후기대학 시험에서 서울신학대학에 응시하기는 했으나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두문불출하고 있는 상태이다.

 서울신학대학의 한 직원은 “경찰은 정씨가 황양의 원서를 접수시킨 것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모양이지만 정씨가 황양의 원서를 접수 시킨 것은 실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한 것이었다. 마침 정씨가 그날 비번이었기 때문에 한 것이지 특별한 사유는 없었다. 정씨가 황양의 원서를 접수시킨 사실은 대부분의 직원이 알고 있었다. 정씨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공개적으로 원서를 접수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경찰이 정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발표해버렸으니 황양은 도대체 어디 가서 피해를 보상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전과기록 말소된 20여년 전 허물 들춰내
 서울신학대학 경비과장 조병술씨의 가족들은 조씨가 자살한 것은 수사과정에서 경찰과 언론이 조씨의 전과를 들춰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오른쪽 조병술씨 부인 윤명숙씨 인터뷰 참조).

 이 대학 직원인 ㅈ씨는 “경찰은 조씨가 자살하자 조씨가 범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를 하고 있지만 이치에 닿는 것 같지가 않다. 경비과장인 조씨가 기왕 시험지를 빼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뭣하러 그런 어설픈 방법을 썼겠는가. 조씨가 하려고만 든다면 얼마든지 감쪽같이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조씨를 잘 아는 대부분의 학교 직원들은 조씨가 시험지 도난사건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물의가 빚어지고 자신의 감추고 싶은 과거까지 들추어지자 욱하는 심정에서 자살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조씨가 가족과 직원들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수사당국은 말 그대로 생사람을 잡은 셈이다. 또 설혹 조씨가 범행과 관련이 있다해도 전과기록에도 말소돼 있는 20여년 전의 피의자 허물이 들추어지는 수사관행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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