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로 변하는 음반시장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4.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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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완전 개방 앞두고 대형 매장 설립 잇달아 … 도매상 횡포 사라질 전망

내년이면 음악을 접하는 환경이 많이 달라진다. 종합유선방송의 음악 전문 채널이 2개 생겨나 텔레비전을 통해 하루종일 음악이 쏟아진다. 음악을 ‘듣는’ 시대에서 음악이 ‘저절로 들리는’ 시대로 변하는 시점이 바로 95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음악을 접하는 환경을 크게 바꾸는 것은 대형 음반 매장의 출현이다. 외국의 음반 유통업체가 한국에 상륙해 음악 애호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형 매장이 문을 여는 것이다. 국내 음반업계에서는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

외국 음반 유통업체에 대항해 국내 유통업체가 벌이는 전쟁은 지난 11월15일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 신나라레코드가 문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대형매장(3백30평)인 신나라레코드 용산점은, 95년 서울 매장의 문을 여는 미국의 타워레코드와 영국의 버진메가스토어의 한국 시장 잠식을 막기 위해 새 매장을 갖추었다고 밝힌다. 타워·버진과 함께 다국적 음반 유통회사로 세계 각지에 점포를 갖고 있는 영국의 HMV와 미국의 레인보우도 내년 연말 혹은 유통 시장이 완전 개방되는 96년에 한국에 진입할 태세여서 국내 음반업계는 긴장과 불안 차원을 넘어서서 아예 업종을 바꾸거나 문을 닫는 소매상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포장지 안 뜯고 음악 들어본 후 CD 구입
그동안 소매보다 도매업에 주력해온 신나라레코드는 용산 소매업을 열면서 비장하기까지 한 각오를 밝혔다. “주먹구구식 유통 방식으로는 국내 시장을 타워나 버진에게 고스란히 내줄 수밖에 없다. 소비자에게 애국심만 강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국적 음반 소매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쟁력을 갖춘 다음에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외국 매장을 조사하고 직원을 교육하는 등 5년이나 준비해 용산점을 열었다는 신나라레코드 정문교 부사장은 “버진·타워에 비해 손색없는 매장을 꾸몄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신나라레코드 용산점의 특색은 우선 국내 최대라는 데 있다. 3백30평 매장에 들어가 있는 음반의 타이틀 수는 7만개다. 그것은 매장에서 고전 음악과 대중 음악으로 나뉘어 있고, 대중 음악은 다시 세계 민요, 한국 가요, 팝, 재즈, 샹송, 칸초네 등 장르 별로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

PC통신·팩시밀리·전화 등 다양한 판매 방식을 도입한 신나라레코드 음반 매장은 소비자가 직접 음악을 듣고 음반을 고를 수 있는 시설을 국내에서는 처음 제대로 구비했다는 점을 자랑거리로 내세우고 있다. 청음기라 불리는 이 기기는 구매할 CD의 포장지를 뜯지 않은 채 음악을 직접 듣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음반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소비자가 기호에 따라 음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청음기를 40대 마련해 놓은 것이다.

국내 음반시장은 89년부터 직배 체제에 들어간 5대 음반 메이저사(폴리그램·소니뮤직·워너뮤직·EMI·BMG)와 국내 재벌그룹들이 참여하면서 양적 성장을 거듭해 지난해 총 매출액이 3천7백억원에 이르렀다. 이는 세계 음반시장에서 열한 번째이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다음가는 규모이다.

‘황금 어장’노리는 외국 유통업체들
89년에 들어온 음반 직배사들은 지난해 총 5백27억원을 벌어들이면서 국내 팝 시장을 거의 독식하고, 손지창·피노키오 같은 국내 가수에게까지 손을 뻗쳐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매출 1백76억원을 기록한 90년과 비교하면 직배사들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국 음반시장이 ‘황금 어장’으로 점점 커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국 유통회사들이 한국 음반시장을 넘보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음반 소매점을 여는 회사는 미국의 타워레코드이다. 섬유 수입 업체인 (주)일경물산이 로열티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국내에 들어오는 타워는, 이미 서울 강남역 근처에 3백평 규모의 매장을 확보해 개장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타워는 현재 11개국에 1백70여 매장을 갖고 있는 세계 최고의 음반 유통 회사로, 매장이 18개 있는 일본에서는 92년 한 해에 9천만달러(약 7백20억원) 매출을 기록했다.

타워가 가장 큰 강점으로 내세우는 점은 ‘매장에 모든 음악을 갖춰놓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틀스나 마이클 잭슨의 음반은 1집부터 빠짐 없이 구비해 음악 마니아들에게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일경물산 타워레코드 프로젝트 팀 정진용 과장은 “10만 타이틀은 구비할 수 있다. 전산 시스템을 갖추어 재고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소비자가 컴퓨터 화면에 손을 대어 원하는 음반을 찾는 뮤즈 시스템도 도입할 예정이다”라면서, 내년 연말께 2호 매장을 열고 해마다 매장을 하나씩 열겠다 라고 밝혔다. 타워는 한국 직원들을 본사에 불러 교육을 끝내고, 내년 초 40~50명을 더 뽑아 매장에 투입할 채비를 하고 있다.

타워와 함께 세계 양대 음반 유통 회사로 꼽히는 버진은 새한미디어와 50대 50 지분으로 새한버진메가스토어코리아라는 회사를 만들어 한국에 들어온다. 버진은 내년 하반기 개장을 목표로 서울 강남 일대에 매장을 물색하면서 타워와 마찬가지로 2·3호 매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 11개국에 52개 점포를 갖고 있는 버진은 항공기·레코드 제작 등을 겸하고 있는 유통 회사로, 타워의 본거지인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에 매장을 열 정도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외국의 음반 유통 업체가 문을 열 경우 그 파장은 교보문고가 개장할 당시 출판계에 파장이 일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라고 음반업계는 예상한다. 그들이 지구상에 나와 있는 어떤 음반이든 다 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전문 지식을 갖춘 직원을 매장에 배치해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부추기는 노하우를 구사한다면, 소규모 구멍가게 식에 익숙해온 한국의 유통 구조가 일대 변화를 겪게 될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최신 음악 정보를 제공하고 충분한 휴식 공간까지 갖추게 된다면 한국의 음반 유통 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음반업계가 걱정하는 점은, 다국적 유통 회사들이 한국의 유통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물론, 가격 경쟁을 하면서 음반 제작사들까지 쥐고 흔들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유통의 폭력’ 종식 … 소비자 권리 복권될 듯
현재 음반은 제작사 백여 개와 도매상 33개, 소매상 2만개를 거쳐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이 과정이 전근대적이어서 음반 판매 집계조차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뛰어난 음반을 만든다 해도 후진성을 면치 못한 유통 구조 때문에 사장되기 일쑤이다. 게다가 소매상에 대한 일부 도매상의 횡포가 잦아 20%의 이윤을 남기는 도매상이 차라리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 제작사와 소매상이 많다. 외국 음반 유통업체가 한국에 문을 연다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곳은 바로 도매상이다. 국내의 관례를 의식해 처음에는 도매상과 거래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제작사와 직거래하고, 그만큼 가격을 내리는 경쟁 체제에 들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방법을 개발하는 데 힘써야 한다. 레코드를 파는 게 아니라 음악을 팔도록 점주들의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소비자가 좋은 음악을 선택할 수 있게끔 소형점들이 체인식으로 연합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면 시장이 쉽게는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음반 제작사인 뮤직디자인 대표 서희덕씨의 말이다. 외국 유통 회사들의 진입으로 내년 한국의 음반시장은 국내사와 외국사의 전쟁터로 변하겠지만, 이 전쟁이 오히려 소비자에게는 유익할 수 있다. 불합리하고 체계 없는 유통 때문에 음악을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했던 소비자에게 그 권리를 돌려줄 계기는 최소한 마련되기 때문이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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