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범죄 수사 ‘문제는 영어’
  • 동두천·오민수 기자 ()
  • 승인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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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동두천 살인사건 “말 안통해” 포기했다 뒤늦게 범인 소환… 무성의 드러내


 

동두천시 미군클럽 접대부 윤금이씨(26) 피살사건을 담당한 의정부경찰서 형사과 장풍작 계장(52)은 “14년간 강력사건을 다뤄왔지만 이렇게 참혹한 시체는 처음 보았다”라고 말했다. 온세상이 시한부 종말론으로 떠들썩하던 10월28일 오후 3시 자신의 월세 4만원짜리 자취방에서 윤씨는, 자궁에는 피묻은 콜라병이 꽂혀 있고 항문에는 우산이 26㎝ 깊이로 박혀 있으며 얼굴은 둔기로 심하게 짓이겨진 채로 발견됐다. 현장에 함께 출동했던 의정부경찰서 한 형사는 “살해현장을 보는 순간 미군 범죄임을 직감했다”고 말했다.

형사의 작감은 적중했다. 범인은 미군이었다. 의정부경찰서 형사들이 목격자들의 진술과 근거물을 바탕으로 10월31일 새벽 주한미군 제2사단 정문 앞에서 피묻은 바지와 농구화 차림으로 귀대하던 케네스 마클 일병(20)을 검거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피의자 심문조서도 작성하지 않고 케네스 마크 일병을 미군범죄수사대(CID)로 넘겼다.

“영어 잘하면 누가 형사 하나”

당연히 여론이 들끓었다. 동두천시 영업용 택시기사들은 11월 5일부터 “마클 일병이 한국 법정에서 처벌받을 때까지 미군의 승차를 거부한다”면서 무기한 승차거부에 돌입했다. 일부 상점에서는 미군에게 물품을 팔지 않았다. 지역 재야단체와 종교단체 등은 바로 성명서를 내 미군측과 한국 경찰을 비판하고 나섰다. 사태가 이쯤되자 11월7일 서울지검 의정부지청과 의정부경찰서는 ‘이례적으로’ 마클 일병을 소환조사해 범행을 자백받았다.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방침이다.

그러나 사건처리 과정을 지켜본 시민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동두천 시민들은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고, 11월7일 오후 3시 시민 학생 등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범인이 소속한 미 2사단 정문 앞에서 제1차 시민규탄대회를 가졌다. 대책위는 “한국 검찰과 경찰이 윤씨 살해사건과 관련해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미군측에 범인을 넘겼다가, 뒤늦게 소환조사한 것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한 행위”라며 검찰과 경찰의 각성을 촉구했다. 민주당도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한국 경찰의 수사 태도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냈다.

검찰과 경찰은 피의자 심문조서도 꾸미지 않고 미군측에 범인을 받자, “범인이 묵비권을 행사해서 관례대로 미군측에 범인을 넘겼을 뿐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범인을 상대로 무슨 수사를 할 수 있겠느냐”하며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사실 한국 민간인과 미군과의 마찰이 자주 발생하는 동두천시를 관할하고 있지만, 의정부경찰서 형사들은 대부분 영어를 하지 못한다. 물론 의정부경찰서에도 외국인 수사를 담당하는 외사계 형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사계 형사 4명 중에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단한명도 없다. “설사 영어를 할 줄 안다 해도 조서를 꾸밀 정도는 안된다”고 한다. 외사계의 주된 기능도 외국인 상대 수사가 아니라 첩보수집이다. 미국인을 상대로 수사를 하려고 해도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범인을 잡아놓고도 미군측에 수사를 의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정부경찰서 형사들은 “영어로 수사를 할 수 잇을 정도면 누가 고달픈 형사 노릇을 하겠느냐”라고 반문한다. 주한미군 범죄에 관한 한 당국의 준비상태가 얼마나 미흡한지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2년간 재판관 행사 겨우 1.39%

한 · 미 양국은 불평등한 한 · 미 관계의 상징이었던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지나 ㄴ91년1월 개정, 대부분의 범죄에 대해 우리나라가 형사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미군을 상대로 수사를 할 전문 수사요원조차 확보해놓지 못한 실정이다. 또한 범인을 잡아놓고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군측에 넘긴 이번 사건에서 알 수 잇듯이, 우리나라 검찰과 경찰은 그동안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해왔다. 한마디로 권리행사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법무부가 지난 10월19일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주둔군지위협정이 개정된 91년 주한미군 범죄자는 1천1백97명이었고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범죄자는 5백21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중에서 우리나라가 재판권을 행사한 경우는 91년 18명, 92년 6명에 불과했다. 전체 범죄자 중에 단지 1.39%에 대해서만 재판권을 행사한 것이다. 범죄자 1천1백52명 중에 13명을 재판해 1.12%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했던 90년도에 비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개정된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르면 강도 · 강간죄 이외에 교통사고 중 음주운전과 뺑소니, 폭력행위 등 사소함 범죄까지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게 돼 있다.

미군측으로 인도된다고 해서 사건이 ‘엄격하게’ 처리되는 것도 아니다. 미군 쪽에서 우리측에 통보해온 사건처리 결과를 보면, 90년 1월부터 92년 8월까지 전체 1천7백30명 중에 구류 · 징역 등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5.7%인 1백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강등이나 주의, 견책 등 가벼운 징계에 그쳤다. 미약하나마 주권국으로서 권리행사가 가능하도록 법을 다듬어놓았지만 검찰과 경찰의 적극적인 의지도 부족하고 미군측의 인식도 미흡한 상태다. 아직도 미군은 ‘치외법권’ 지대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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