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라도 법복 벗을 준비 돼 있다”
  •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5.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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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 · 혁신 판결’ 내려온 박태범 부장판사 단독 인터뷰

전국에 화재를 불러일으켰던 강주영양 사건에 대한 선고 공판을 마친 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박태범 부장판사(43)를 만났다. 이 사건은 증인 98명에 1천3백64쪽의 수사기록, 2천7쪽에 달하는 공판 기록을 가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일문일답식 인터뷰는 한사코 사양했다. 아니 아예 인터뷰 자체에 큰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판사는 판결로써 말할 뿐이라는 신념을 가졌기에 언론에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국민의 남다른 관심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1월17일 국가보안법 핵심 조항인 7조에 대해 직권으로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고, 2월7일에는 검찰의 불구속 기소한 조흥은행 전 · 현직 고위 간부 4명을 유죄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하는 등 사법부에 대한 일반인들의 불신감을 불식하는 일련의 혁신적 판결을 내려 왔다. 이런 터에 강주영양 사건을 맡으면서 집중심리제로 신속하게 재판을 전개하는가 하면,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고인들을 불러 재판장 직권으로 신체 검증을 하고, 의혹이 있는 범행 현장을 직접 재검증하는 적극적 재판 태도로 일관했다.

 

“국민의 소박한 법 감정도 중요한 기준”

 그는 87년 6월의 공안 정국 아래서도 보도지침 내용을 기사화해 기소된 <말>지 사건 관련자들을 무죄 석방한 전례가 있어 전부터 소신 있는 판사라고 인정받았다. 그는 부산지방법원 재임 기간을 정리하면서 어떤 신념으로 일해 왔느냐는 물음에 “판사는 언제라도 법복을 벗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지난 1월 ‘국제사회주의자들(IS)’사건 관련자 4명을 보석 석방하여 국가보안법에 대한 위헌심판을 제청한 동기에 대해서는 “현행 법으로는 무죄 판결이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에 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남과 북을 다 비판하는 사상이라면, 헌법상의 기본권인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식으로 북쪽 노선을 추종하는, 즉 북한과 주의 · 주장을 같이하는 사건이라면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언제라도 ‘구체적이고 가능한 위험’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가 적용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구체적이고 가능한 위험을 판별하는 데는 “일반 국민의 소박한 법 감정 범위를 넘는지 여부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박판사는 강주영양 사건 11차 공판 서두에서 검찰이 제시한 머리카락 증거에 대해 ‘극히 중요한, 매우 결정적인’이라는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했을 때의 상황에 대한 질문에 “그전에는 검찰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피고인측의 증거 조작은 없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 유전자 감정법은 오차가 극히 적다는 말을 듣고 머리카락이 확실한 증거라면 피고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지능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주심인 황판사는 유죄를 확신하고 있던 터였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선고 공판에서 2대 1이라는 심판의 합의 내용을 공개하자, 법원조직법 65조 ‘심판의 합의는 공개하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을 들어 비록 처벌 조항은 아니지만 그가 법을 어겼다는 법조계 시각도 있다. 그는 이에 대한 답변을 피했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서 결정문을 발표할 때 소수 의견을 별도 공개하는 점을 들어, 사회적 관심이 높고 유 · 무죄 증거 대립이 치열한 재판에서 합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오히려 재판 결과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례적으로 합의 내용을 공개할 밑바탕에는 재판부의 고뇌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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