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제에 미련없다”
  • 에르푸르트 (독일) · 진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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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특파원이 본 ‘통일의 그날’ 이후 동독 표정

환경정화 등 재건논의 활발…“사회통합 5년은 걸릴 것”

 통독의 꿈이 이루어지자 독일 국민은 춤과 노래와 불꽃놀이로 자축했다. 그 떠들석한 축하행사의 뒤안길에서, 엊그제까지 동독이라고 부르던 지역에 사는 보통 시민은 장래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그들의 일상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 지방 도시를 찾아갔다.

 중세에 생긴 古都 에르푸르트는 베를린에서 서남쪽으로 약 2백km 떨어진 인구 22만명의 도시이다. 호텔앞 역전 광장에서 우연히 이야기를 건네게 된 30대의 한 남자가 기꺼이 인터뷰 요청에 응해주었다.

 “아직 나라가 분단되어 있으며 따라서 통독에 관심이 많은” 한국에서 왔노라고 주석을 단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설명을 굳이 안붙였어도 대화에 응해 주었을 것 같은, 부담없이 개방적인 사나이였다. 그는 나중에 집에 들러서 사진을 찍도록 해달라는 부탁에도 서슴지 않고 응해주었다.

 베른트 리폴트, 34세. 마침 부인과 함께 두살짜리 딸 테레제를 자전거 앞 바구니에 싣고 역전까지 자전거로 산책을 나온 길이었다. 옷차림은 매우 허술해보였으나 두사람 다 여윈 편이면서 건강해 보였다. 15년 경력을 가진 전기공이다. 처음에 전기 관계 일을 한다기에 ‘엔지니어’냐고 물었더니, 두손을 펴보이고 “손을 놀려서 일하는 사람”이라며 매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는 학교교육을 11년, 부인은 12년 받았다. 둘다 영어를 상당히 잘하므로 통역이 따로 없어도 되었다.

 우선 통일이 되어서 좋으냐고 물으니 “좋다”고 답변한다. 그러나 “매우 좋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와 제도가 모두 동독식에서 서독식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일시적일지는 몰라도 실업자가 늘어나는 어수선한 현실이 역시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는 것 같았다. 리폴트씨는 그러나 비관하지 않는다. “앞으로 서독 투자가 더 늘면 6개월쯤 지나 사정이 좋아지겠지요.”

 실업자들도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보장제도에 따라 최종 봉급의 63%가 지급되고 있으며, 자녀가 있는 실업자는 68%를 받는다.

 

다시 찾은 ‘여행의 자유’ 만끽

 대세야 어떻든 리폴트씨네 생활설계는 매우 단단한 편이다. 9월의 남편 수입은 1천2백마르크(약 56만원)였으며, 방적공업협회의 사무직원인 부인 베아테(28)의 수입은 1천3백40마르크(약 62만5천원)였다. 지출은 1천마르크 정도였다니까 상당한 액수가 저축으로 남았음을 알 수 있다. 살림이 알뜰한 탓도 있지만 주거비가 몹시 싼 것이 저축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3가구가 한층씩 차지하고 사는 조촐한 건물의 맨 윗층에 들어 있는 리폴트씨네가 지금 내고 있는 집세는 월 53마르크(약2만4천7백원)이다. 층마다 따로 석탄을 때서 난방을 하는 등 불편은 있지만 15평 가까운 아파트치고는 헐값이다. 그러나 집세는 내년 초에 대폭 조정되어 적어도 2~3배는 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 7월에 동서독 화폐가 통합되는 바람에 서독 화폐보다 훨씬 열등했던 동독 화폐의 가치가 불어나자, 저금했던 돈으로 자동차를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꽤 많지만, 리폴트씨는 자동차는 안살 작정이다. “이미 공해가 심한데 우리까지 차를 사서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리폴트 부부는 자전거를 애용해왔고, 앞으로도 자전거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동 · 서 장벽이 무너진 지금, 두사람은 한창 외국여행을 즐기고 있다. 벌써 2주일 동안 헝가리, 오스트리아와 서독의 뮌헨을 도는 기차여행을 했으며, 파리 1일 관광을 위한 3일간의 버스여행도 했다. 파리행 비용은 1인당 60마르크(약 2만8천원) 밖에 안되었다.

 리폴트 부부는 연내에 4~5일 예정으로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갔다올 생각이며, 내년에는 “예산이 허락한다면” 3주일 동안 아이슬란드를 방문할 계획이다. 다년간 여행자유를 박탈당해온 동독 사람들의 여행욕이 부풀어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에르푸르트는 작년 이맘 때 동독을 뒤흔든 평화적 대혁명의 진원지인 라이프치히에서 과히 멀지 않다.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스 교회와 칼 마르크스광장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무르익어갈 무렵 에르푸르트에서도 매주 목요일 밤 7시반부터 프레디거(PRE DIGER)라는 개신교 교회에서 모임이 열려 리폴트 부부도 참석했다. 20대와 30대를 중심으로 약 5백명의 시민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서서 동독 정치와 경제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2~3시간 동안 토론하다가 헤어지곤 했다.

 

고르비의 ‘불간섭 선언’ 높이 평가

 통일문제도 논의했느냐고 기자가 물어보니 리폴트씨는 “그때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독을 어떻게 하면 더 민주화할 수 있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 당시 라이프치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라이프치히의 대중집회에서 독일 통일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베를린 장벽이 11월9일에 개방된 후 거의 2주일이 지나서였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영국 언론인 티머시 카튼 애쉬씨의 기술에 의하면, 스스로의 신분을 ‘단순한 기술자’라고만 밝힌 한 연사가 등단하여 “동독의 사회주의는 약속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전제한 다음, “연방공화국의 우리 동포는 결코 외국인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통일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시위 군중은 “도이칠란트, 아이니히파터란트” (독일, 하나의 조국)라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것은 바로 동독 호네커 정권이 부르지 못하도록 금해온 국가의 한 구절이었다.   원래 민주화운동을 영도한 사람들의 생각은 동독의 민주화였다. 그들은 서독에 대해서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래저래 3백만명 이상이 1949년 이래 서독으로 빠져나간 후에 동독에 남기로 한 일종의 잔류파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왕성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서독의 매력이 동독 대중을 끌어당긴 것이며, 통일의 물결은 이들 동독 민주화세력을 앞질러 이제 1년도 못되어 통일을 실현시키고 만 것이다.

 리폴트씨는 통일이 이루어지는 데 누구의 공이 컸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우선 동독  일에 간섭을 않기로 용단을 내린 고르바초프를 꼽아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는 솔리대리티(연대노조)를 통해서 공산정권 하에서도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폴란드를 꼽았다. 셋째로는 동독사람들이 우회해서 서독으로 갈 수 있도록 국경선을 개방한 헝가리를 꼽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나라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가 평화적으로 데모를 한 공”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정치적으로 리폴트씨는 녹색당을 지지한다. 구 서독에서는 약 8%, 구 동독에서는 약 10%의 지지 밖에 받지 못하는 정당이지만 환경보호와 반핵운동 등을 강력히 주장해나감으로써 기민당이나 사민당 같은 대정당의 정책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환경문제는 구 동독 재건계획의 중요 안건으로 올라 있다. 구 동독 남부 공업지대에서 북으로 서독을 거쳐 흐르는 엘베강의 극심한 오염문제를 다루는 특별위원회가 곧 작업을 시작할 태세에 있다. 환경 외에도 국영업체의 민영화, 도로건설, 전화망 신설, 주택건립 등 과제는 수두룩하다. 요즘 베를린에서 라이프치히로 뻗는 고속도로는 특히 교통이 복잡하다. 1930년대 히틀러 시대에 만든 자동차 전용도로인 ‘아우토반’(Autobahn)에 새로운 콘크리트를 얹는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몇해 안가서 구 동독의 도시와 도로의 모습이 일변할 것은 틀림없는 추세이다.

 그러나 양독의 사회적인 통합에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누구나 말하고 있다. 리폴트씨도 “적어도 5년은 걸릴 것”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게 서독체제 위주로 통합이 되어가는 데 이의가 없는지, 동독이란 존재가 갑자기 없어져버린 데 대해 섭섭한 생각은 없었는지 물었을 때 그의 답변은 명료했다. “아이 디든트 크라이.” 눈물을 전혀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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