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한국은 ‘미군의 천국’
  • 변창섭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6.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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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행정협정 독소 조항 개정 협상, 미국 무성의로 미궁에 빠져

 
3만7천여 주한미군의 주둔에 관한 한·미행정협정(SOFA)의 독소 조항을 개정하기 위한 협상이 미국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또다시 표류할 전망이다. 67년 발효된 이래 미군범죄를 양산하고 비호하는 대표적인 불평등 협약으로 손꼽혀온 한·미 행정협정의 개정 협상은 미국측이 문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당분간 돌파구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

 지난 3월 워싱턴에서 6차협상을 가진후 6개월만에 서울에서 열린 협상에서 한 ·미 양구대표들은 색심 쟁점인 형사관할권에 대한 이견을 끝내 좁히지 못했다. 그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는 주한미군에 의한 살인·강간 등 흉악범죄사건에 대해 한국의 사법당국은 앞으로도 속수무책인채 미군 당국의 눈치만 보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문제의 협정 제 22조 형사관할권 조항에 따르면, 미군 또는 그 가족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한국이 1차적인 재판권을 갖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조항 제3항에 따르면 , 설령 1차 재판권을 한국이 갖더라도 주한미군측이 재판권을 포기해 달라고 요청하면 이에 대해 ‘호의적 고려’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더구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예 1차적 재판권마저 포기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살인·강간 저질러도 ‘재판권 포기해 달라’?

 이같은 독소 조항 때문에 주한미군 당국은 미군이 살인이나 강간 등 중범죄를 저질렀어도 한국측에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해 달라고 요청했고ㅡ 한국측은 군말 없이 호의적 고려를 해왔다. 한 통계에 따르면, 67~91년 주한미군 범죄는 약 4만5천건에 달했는데 한국이 재판권을 행사한 사건은 고작 0.6%인 2백70여건이다. 이는 일본의 32%, 필리핀의 21%에 비하면 형편없이 낮은 수치다.

 대조적인 것은 한국처럼 대규모 미군 기지를 가진 일본의 경우다. 일본은 지난해 9월 오키나와에서 미군 병사가 초등학교 여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이 벌어진 뒤 그해 9월 말 미국측과 협의해 주일미군의 주둔 지위에 관한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위원회는 협상 개시 한 달 만에 흉악 범죄의 경우 일본 사법 당국이 미군 피의자를 기소하기전 이라도 신병을 인수할수 있도록 하는 획기적인 합의를 끌어냈다. 말하자면 미·일 행정협정의 독소조항은 그대로 둔채 이 조항을 신축적으로 운용한다는데 합의한 것이다. 실제로 이같은 합의를 본지 9개월 만인 지난 7월 나가사키 현 사세보시에서 한 일본인 여성을 피습한 미군이 일본 경찰에 넘겨져 수사를 받음으로써 개선된 운영ㄷ제도가 효과를 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유사한 범죄가 한국에서 발생했을때미군 당국이 순순히 미군 피의자를 한국 사법 당국에 넘겨줄 것인가. 대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이번 7차 협상으로 미국측은 일본과는 차별적인 접근 자세로 한국을 상대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를테면 흉악 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를 기소하기 전이라도 한국측에 신병을 인도하는 문제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미국측은 △피의자가 참고인에 대해 반대 심문할 권리를 보장하고 △참고인 진술의 경우 ‘법정 진술’만을 증거로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즉 미국측은 재판이 끝나야 신병을 인도하도록 되어 있는 현행 규정을 고치자는 뜻에는 동의 하면서도 미국적 기준에 의한 피고인 보장 장치를 요구함으로써 협상을 난관에 빠뜨린 것이다.

 현행 행정협정에 따르면 한국 검찰은 미군 피고인이 무죄 판결을 받거나 피고인이 상소하지 않을 경우 항소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 7차 협상에서 한국측은 이같은 조항을 개정하자고 요구했으나 미국측이 강력히 반대해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밖에 미국 정부대표가 입회해야만 미군 의자가 한 진술을 증거로 채택할수 있다는 조항을 개정하는 문제도 별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지난 6개월 동안 일곱차례나 독소 조항 개정 협상을 벌여왔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이는 한국측의 협상력 부족 탓이라기보다는 미국측의 노회한 협상력과 성의 부족 때문이다. 이번 협상에 참여했던 한 인사가 미국측이 쟁점들을 개별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서로 연계한 수정안을 제시하는 바람에 협상이 더욱 어려웠다고 털어놓은 것도 이를 증명한다.

 현재 한국측은 미국측의 수정안을 면밀히 검토해 추후 협상을 통해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양국 정부 모두 개별 쟁점 사항에 대해 합의점을 끌어내기보다는 문제가 되는 조항을 연계해 일괄 합의점을 찾아낸다는 방침이여서, 앞으로 협상이 재개되더라도 빠른 시일안에 타결점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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