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에 타오르는 ‘참 인술’ 불길
  • 연길.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7.08.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한한의사협회, 조선족 동포에게 무료 진료 … 남북 공동 봉사 활동도 계획중

대한한의사협회 소속 해외의료봉사단(단장 권용주)이 중국 길림성 연변 지역에 지핀 참인술의 불씨가 계속 계속 타오르고 있다. 17명으로 구성된 해외 봉사단이 지난 7월27일 ~ 8월3일 의료 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뒤, 결길 시 신흥가 113호에 위치한 광주약방(廣州藥房)에는 연일 환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광주약방 총경리 최연옥 주관약사는 <시서저널>과의 국제 전화에서 “의료봉사단이 돌아간뒤 며칠 사이에 벌써 환자가 백명 이상 다녀갔다”라고 밝혔다. 광주약방은 진학가에 위치한 아동약방(亞東藥房)과 더불어 의료봉사단이 싼 값에 약을 지을 수 있도록 지정한 곳이다. 아동약방을 이용한 환자 수까지 합치면 의료 봉사의 ‘효험’을 본 환자 수는 훨씬 많아질 것이다.

봉사 기간 내내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최연옥씨는“ 그동안 돈이 없어 치료를 못하는 동포들을 보면서 애만 태웠다. 그러나 이번에 의료 봉사라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제 그 불씨를 계속 키워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현지 의료인들도 새로운 가능성에 기대를 품게 된 것이다. 의료봉사단이 연길 시 현지에 도착한 지난 7월 27일 밤은 무척 더웠다. 연길 시 현지 관계자들조차 섭씨 33도가 넘는 날씨가 한 달째 계속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이 날 현지 주민들은 더위를 식혀줄 낭보를 접하고 마음이 들떠 있었다. 연길 시내에서 벌어진 전중국 축구대회에서 조선족 자치주 축구팀이 상해팀을 격파한 것이다. 한국에서 온 최은택 교수가 대표팀 감독을 맡은  이래 하위권에서 맴돌던 자치주 팀이 승승장구하자 사기 피해 등으로 한국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졌던 현지 주민들의 마음은 다소나마 풀렸다. 여기에 한의사들의 의료 봉사라는 또하나의 기쁜 소식이 보태진 것이다.

93년 네팔·카자흐스탄에 대한 무료 봉사를 필두로 매년 두세 차례씩 해외 봉사 활동에 나섰던 한의사협회 해외의료봉사단이 이번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대상 지역으로 선정하게 된 것도 1차적으로는 상처받은 조선족 동포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권용주 단장(한의사협 국제 이사)은 이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하나라고 간명하게 표현했다. 이밖에도 △중국측 파트너인 연변 대학 의학원측과 공동 진료를 통한 한·중간 의학 교류 △북한 국경 지대에서의 봉사 활동을 통한 남북 한의사간 공동 진료 가능성 타진이라는 목적도 있었다.

한국인 사기 피해자에게 진료 우선권
한의사협회측은 이처럼 다각적인 목표를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해왔다. 지난 6월12일에는 사전 협의차 연번 대학 의료팀이 서울을 방문했고, 협회측은 약 3천명분 약재를 준비하기 위해 김우식 약무이사를 미리 현지에 파견했다. 진료의 효율성을 높이고 진찰권을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 다양한 배포망을 활용하기도 했다. 특히 연변 지역에 파견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를 통해 사기 피해를 본 동포들에게 진찰권이 배포 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무료 진료가 시작된 7월28일 오전, 연변 의학원 부속병원 대강당은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조선족 동포로 가득찼다. 한족 주민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첫 날이라 주로 연길 시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둘째날부터는 연길 외에도 도문·용정·돈화·계산툰·삼합 등 자치주내 각 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봉사단 추산으로는 한의사 1명당 하루 평균 70~80명, 많게는 백여명까지 활자를 진료했다고 한다. 따라서 총 진료 기간에 한의사협회 소속 한의사 14명과 연변 대학 중국인 의사 10여 명이 진료한 환자 총수는 처음 목표로 삼았던 3천명이 훨씬 넘는다. 재진·삼진까지 받은 환자수를 전부 합치면 7천~8천명 정도가 진료 혜택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연변 지역 고유의 풍토와 식생활 문화 등은 동포들의 병력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진료 현장에서 만난 북죽철 연변 의학원 부속병원 원무과 부과장(48)은 “폭음을 마다하지 않는 음주 문화와 맵고 짠 음식을 주로 먹는 식생활 습관 등으로 인해 간과 위장 계통 질환이 특히 많았다”라고 말한다. 이 점은 봉사 활동에 참여한 한의사들이 모두 공통으로 느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견된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도 울화병이 많다는 점이었다. 95년 사할린 동포들에 대한 무료 봉사 활동에도 참여한 정성훈 원장(부산 낙영한의원)은 “사할린에서는 차가운 기후 조건에 따른 동통성 질환이 많았는데 이곳 동포들은 울화병에서 연유한 신경쇠약이나 위장 계통 질환이 특히 많았다”라고 말했다.

이런 울화병 증세는 시장 경제로 편입되느니 과정에서 빚어진 과도한 심적 부담에서 온 경우도 있었지만, 한국인으로부터 당한 사기 피해로 말미암은 경우도 많이 목격되었다. 진료 활동에 참가한 한의사들은 사기 피해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심심치 않게 접했다. 강원도 한의사회 임일규 회장 역시 가슴 아픈 사례를 목격했다. “사기 피해로 인한 불면증과 소화 불량 증세를 호소해온 50대 여성을 진료했다. 병증 치료에 앞서 우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애쓰지 않을 수 없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탈북자 약 20명 신분 감추고 진료 현장 찾아와
진료 기간중 긴장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미리 예상은 했지만 연길 시내에 숨어있던 탈북자들이 신분을 감추고 진료 현장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안전을 우려해 드러내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의료진 사이에 탈북자에 대한 얘기가 소곤소곤 건네졌다. 약재실 담당자들은 약 20명이 다녀간 것으로 추산했다. 신변 위협 때문에 드러내놓고 치병할 수 없는 이들의 딱한 처지가 한의사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서은미 원장(서울 목동 푸른한의원)은 “이래저래 분단의 아픔을 느꼈다. 탈북한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금전적으로라도 도와줄 걸 그랬다”라며 가슴 아파했다.

현지 인사들에 의하면 요즘은 겨울철에 비해 탈북자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두만강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내 곳곳에 주민들이 보호하고 있는 탈북자가 꽤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초창기에는 더러 고발하는 사례도 있었으나 북한의 식량난이 알려지면서 요즘은 주민들 모두 적극 보호해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번 해외봉사단은 한국 각지에서 온 한의사 14명과 대한한의사협회 직원 등 모두 17명으로 구성되었다. 봉사단원 중에는 세계 여러 곳에서 봉사 활동을 경험한 베테랑도 있고, 처음 참여한 의사들도 있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봉사단원 모두는 ‘그들(해외 동포를 지칭)에게 조국을, 한의학을 세계 속으로’하는 이번 의료 봉사의 슬로건 아래 강한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해외 봉사 활동의 산파 역을 맡은 권용주 단장은 그동안의 성과를 토대로 ‘한의학 세계화’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친다. 대한한의사협회 해외 봉사 활동은 지난 6월 우즈베키스탄에 한방병원을 건립하는 성과를 낳았고, 카자흐스탄에는 현지 정부 요청으로 현지 체류 한의사가 파견되었다. 또 사할린에서는 현지 정부가 한약을 러시아 공식 의약품에 등록시켜 한약재를 수출할 길이 열리기도 했다.

보건복지부가 중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의학의 세계화 시책과도 절묘하게 부합해, 이번 연변과 타지키스타 의료 봉사에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정부 예산이 지원되는 괘거가 이루어졌다. 권용주 단장은 “한의사의 근의관 임관과 국제 협력한의사 제도(병역 의무 대신 해외에 한의사를 파견하는 제도)를 가로막는 병역법의 관련 조항만 개정된다면 한의학 세계화의 물꼬가 터질 것이다”라며 관련 법 개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대한한의사협회는 이번 연변 지역에 대한 봉사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는 북한의 한의사(북쪽에서는 93년부터 ‘고려 의사’라고 함)들과 상호 교류해 남북 한의사의 공동 의료 봉사를 실현할 계획이다. 권용주 단장은 북한 접경 지역인 연변에서 타오른 참인술의 불씨가 연변 동포들을 통해 북한에까지 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